‘보기만’ 하는 영화 NO…관객이 줄거리 바꿔 [화제의 기업]

박수호 매경이코노미 기자(suhoz@mk.co.kr) 2025. 9. 1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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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포드AI(Pickford AI)

올해 5월 열린 칸영화제에서 할리우드 거대 제작사도, 유명 감독도 아닌 작은 스타트업이 큰 주목을 받았다. ‘칸 넥스트(Cannes Next)’ 프로그램에 15분짜리 영화를 상영한 게 전부였을 뿐인데 말이다. 무엇보다 보는 방식이 색달랐다. 스크린에는 ‘첫 데이트(First Date)’라는 제목과 함께 데이트를 하는 두 남녀 모습이 애니메이션 형태로 비쳤다. 이때 관객은 해당 영화의 커뮤니티, 우리로 치면 단톡방에 접속, 다양한 주문을 할 수 있다. “그녀의 머리 색을 칭찬해” “어색한 농담을 던져봐” “갑자기 정치 얘기를 꺼내” 등 선의와 악의가 뒤섞인 수많은 명령이 AI 엔진에 쏟아져 들어갔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부터다. 스크린 속 캐릭터들은 이 혼돈스러운 입력값을 실시간으로 반영해 움직였다.

시연이 끝나자 객석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한 유럽 배급사 임원은 “이건 우리가 알던 인터랙티브(상호반응)와는 차원이 다르다. 진정으로 창작 과정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놀랍다’ ‘신선하다’ 등 호평이 이어졌다.

스티븐 파이런(Stephen Piron)과 콜 클리포드(Cole Clifford)가 이끄는 신생 기술 기업 ‘픽포드AI(Pickford AI)’ 얘기다. 이들이 선보인 기술 시연은 그 자리에 있던 업계 관계자에게 충격과 함께 미래에 대한 서늘한 예감을 안겼다.

세계지식포럼에 연사로 방한한 스티븐 파이런 픽포드AI 공동대표.
픽포드AI는 어떤 회사?

딥페이크 사건 중심에 서다

시작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한 편의 ‘장난’에서 비롯됐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스티븐 파이런 픽포드AI 공동창업자는 학창 시절 ‘AI의 대부’ 제프리 힌튼 교수 밑에서 연구하며 생성형 AI의 기반을 닦은 정통 기술 전문가다. 그는 2019년 장난삼아 유명 팟캐스터 조 로건의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렸다. “기껏해야 천 명쯤 보고 우리 친구들이 재밌어할 거라 생각했다”던 그의 영상은 하룻밤 새 350만뷰를 기록하며 걷잡을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이 사건으로 여론은 양분됐다. 뉴욕타임스(NYT)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며 다큐멘터리 제작을 요청하고, 미 의회와 CIA까지 나서 기술 위험성을 경고했다.

반면 할리우드에서는 그의 기술에 주목했다. 더빙이나 대화 수정 등 비용 절감, 효율성 증대라는 기회에 주목했다. 할리우드는 대형 영화의 경우 5년 간 수천명이 달려들어 1억달러 이상 제작비를 들이는데 이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분석에서다.

파이런 픽포드AI 대표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 기술로 과거에는 할 수 없던, 인간의 창의성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일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면서 결론은 “AI 기술을 통제의 대상이나 기존 산업 보조 도구로 보는 대신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매개체로 활용해보자고 의견이 모였다”라고 설명했다.

“역사적으로 스크린과 관객 관계는 일방적이었습니다. 누군가 무언가를 창조하면, 관객은 그저 앉아서 수동적으로 소비할 뿐이었죠. 픽포드는 이 구도를 허무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들이 판매하는 것은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다. 관객이 직접 참여해 매번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경험형 내러티브 플랫폼’ 그 자체를 판매한다. 이는 미리 제작된 옵션 A, B 중 하나를 고르는 넷플릭스의 ‘밴더스내치’ 같은 방식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야기의 모든 부분이 수정 가능하다. 창작자는 완결된 이야기를 제공하는 대신 관객이 뛰어놀 수 있는 거대한 ‘놀이터’의 기본 규칙과 캐릭터를 설계하고 관객은 그 안에서 서사를 직접 창조하는 ‘공동 창작자(Co-creator)’가 된다는 것이 기술의 핵심이자 차별점이다.

관객은 픽포드 플랫폼에 접속, 채팅으로 영화 전개에 관여할 수 있다. (홈페이지 캡처)
왜 지금 픽포드AI인가?

시대정신을 관통하다

픽포드AI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현재 미디어 산업과 기술 지형을 관통하는 거대한 흐름과 맞물려 있다. 로블록스나 포트나이트 같은 메타버스 플랫폼에 익숙한 Z세대는 더 이상 만들어진 세계관을 수동적으로 즐기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이들은 디지털 세상 속에서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능동적으로 행동하고, 다른 사용자들과 상호작용하며 자신만의 서사를 만드는 데 익숙하다. 또한 유튜브와 틱톡으로 대표되는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잠깐용어 참조)는 콘텐츠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계를 허물었다. 픽포드 모델은 바로 이 지점에 자리한다. 메타버스적 자유도와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의 참여 정신을 스토리텔링에 접목한 것.

픽포드AI에 직접 투자한 미국 AI 전문 투자회사 ‘스트랫마인즈(StratMinds)’ 의 리처드 장 대표는 “기술적으로 ‘관객의 실시간 의견 반영’을 구현하기 위해 실사에 가까운 AI 영상 대신 애니메이션으로 쉽게 다가갔다는 점도 매력적”이라고 설명했다.

이 선택을 통해 픽포드AI는 두 가지 차별점을 얻었다. 첫째는 물론 즉각적인 상호작용 능력이다. 둘째는 30분에서 1시간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캐릭터의 정체성과 성격을 유지하는 ‘일관성’이다. 일관된 캐릭터가 있어야만 관객은 이야기에 몰입하고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사용자 인터페이스(UI) 또한 극도로 단순하게 설계됐다. 파이런은 “휴대폰에 문장을 입력하고, 다른 사람들이 입력한 문장에 ‘좋아요’를 누를 수 있다. 그게 전부”라고 설명했다. 이 직관적인 방식은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게 하며, ‘좋아요’ 수는 AI가 수많은 입력값 중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둬야 할지 판단하는 중요한 데이터로 작용한다.

스토리텔링 진화 어디까지?

‘모두가 창작자인 시대’로

픽포드AI가 그리는 미래는 단순히 새로운 형태의 영화를 만드는 것을 넘어선다. 창작과 소비 관계를 재정의하고 이야기 소유권을 민주화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더불어 이런 혁명을 한국 관객에게도 체감할 수 있게 하기 위해 9월 21일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25분짜리 단편 ‘살인 미스터리’ 장르의 ‘위스퍼스(Whispers)’를 공개한다.

픽포드는 이를 위해 유튜브와 트위치에서 최초로 에미상을 받은 거장 버니 수 감독과 협업했다. 버니 수 감독은 캐릭터가 누구인지, 그들의 배경과 동기는 무엇인지, 그들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정립, 플레이어(관객)들이 모험할 수 있는 정교한 세계와 캐릭터라는 ‘나침반’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더불어 마블이나 스타워즈처럼 가치 있는 IP(지식재산권) 기업과 협력, 그 IP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식을 제안하겠다는 복안이다. 파이런 대표는 “수억달러를 들여 5년에 한 번 속편을 내놓는 대신, 팬들이 직접 창조한 수백만개 이야기가 생겨나며 IP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고 세계관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리처드 장 대표는 “생성형 미디어는 이제 막 폭발적인 성장을 앞두고 있다”며, 이러한 흐름이 콘텐츠를 넘어 상거래의 판도까지 바꿀 것이라 예측한다. 그에 따르면 AI는 인간의 창의성을 증폭시켜 미디어 지형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미디어는 새로운 상거래 기회를 창출한다. 영화가 관객의 반응을 읽고 관객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면 관객은 더 몰입하고 영화에 큰 애정을 갖게 되며, 이 과정에서 새로운 상거래 기회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는 콘텐츠 성공의 기준 자체가 바뀌고 있음을 의미한다. 리처드 장 대표는 “과거 성공의 기준이 ‘대중이 좋아할 것 같다’고 추측한 방향을 겨냥해 소수의 관객이 돈을 내고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성공은 관객의 몰입도, 공동 창작 경험, 그리고 콘텐츠에 대한 더 큰 기쁨과 애정에서 비롯될 것”이라며 “이는 곧 더 큰 상업적 성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영화계의 현재와 미래가 교차하는 칸에서 가능성을 입증한 이들이 아시아의 심장 부산에서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업계 이목이 쏠리고 있다.

잠깐용어 *크리에이터 이코노미 | 개인이 자신의 창작물을 기반으로 직접 수익을 창출하는 경제 생태계.

[박수호 기자 park.suho@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27호 (2025.09.17~09.2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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