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권의 조기 몰락, '신의 비밀' 건드린 탓?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윤석열 정권의 조기 몰락은 '신의 비밀'을 잘못 건드린 데도 기인한다. 이는 연산군 정권이 범했던 과오다.
연산군 정권의 붕괴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 중 하나는 1498년의 무오사화다. 사화는 선비들이 입은 재앙이라는 의미에서 사화(士禍)로도 표기되지만, 무오사화의 경우에는 역사기록물 원고인 사초(史草)가 관련됐다는 이유로 사화(史禍)로도 표기된다.
연산군 정권은 개혁파 지도자 김종직(1431~1492)의 '조의제문'이 거론된 <성종실록> 사초를 문제 삼았다. 김종직이 1458년에 작성한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초나라 의제를 추모한다. 연산군 정권은 이 글이 신하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추모하는 속뜻을 담고 있다면서, 수양대군의 증손자인 연산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불온문서라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이를 발판으로 김종직에게 대역죄가 적용되고 부관참시가 실시됐다. 또 대대적인 공안정국이 조성돼 개혁파 선비와 관료들이 화를 입었다. 이는 연산군 정권이 사료를 임의로 왜곡하고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위험한 집단이라는 경계심을 세상에 확산시켰다.
역사기록을 남긴 고대의 사관들은 종교 수행자들이었다. 기독교 역사를 담은 성경도 예언자 등에 의해 집필됐다. 주나라의 행정체계를 기록한 <주례>에 따르면, 사관의 원형은 고대의 점인(占人)들이다. 점인들은 자신이 연초에 점친 일과 실제 벌어진 일을 연말에 비교할 목적으로 1년간의 사건·사고를 기록했다.
이처럼 신을 모시는 수행자들이다 보니 고대 사관들의 업무수행 태도는 신성성을 띠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록을 신의 비밀처럼 다뤘고, 정치권력이 이를 왜곡하거나 침해하면 신명을 다해 저항했다. 역사왜곡에 대한 인류의 저항이 특히 치열한 데는 이런 고대의 전통도 저변에 깔려 있다. 서른 살밖에 안 된 연산군이 조기에 실각한 데는 그의 역사파괴도 결정적 작용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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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년 5월 7일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윤 대통령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해법과 관련해 제3자 변제가 "유일한 해결책”이라면서 “정부 방침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 ⓒ 연합뉴스 |
윤 정권은 일제 강제징용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 정부가 책임을 떠안는 제3자 변제를 강행했다. 강제징용 현장인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만들어주는 데도 일조했다. 또 과거사를 바로잡는 진실화해위원회는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누구이고 가해자가 누구인지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이 같은 역사 파괴를 집약한 것이 2024년 8월 30일의 한국사 교과서 검정결과 공개다. 한국학력평가원의 역사왜곡 교과서를 통과시킨 이 사건은 윤 정권이 '신의 비밀'을 함부로 건드리는 집단임을 보여줬다.
한국학력평가원은 1999년에 설립된 민간 기업이지만, 이 회사의 역사교과서 집필에는 윤 정권이 개입됐다. 이주호 당시 교육부 장관의 청년보좌역인 김건호가 교과서 필진이었던 사실이 잘 웅변한다.
이주호는 이명박 정권의 교육과학기술부장관 때인 2011년에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꿔 기술하는 '2009 개정 교육과정'을 이끌었다. 반공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둔갑시키는 교과서 집필 기준을 마련했던 그의 청년보좌역이 한국학력평가원 교과서 집필에 관여했던 것이다.
한국학력평가원 역사교과서는 우리 역사를 임의로 왜곡했다. 조선 후기 선비들이 만주족인 청나라를 폄하하고 조선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자 퍼트린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역사적 맥락과 맞지 않게 서술한 것도 그 일례다. 이 책은 "고려의 다원적 천하관과는 달리 조선의 세계관은 소중화였다"고 한 뒤 소중화 세계관하에서 조선인들이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두었다고 기술했다.
조선 후기의 일부 지식인들은 청나라에 의해 대체된 명나라를 '중화'의 정통국가로 떠받드는 방식으로 청나라에 대한 반감을 표출했다. 그러면서 조선을 그 중화의 계승자인 소중화로 설정했다. 이는 정묘호란·병자호란의 치욕을 안긴 청나라를 오랑캐 위치에 두기 위한 것이었다.
소중화론은 만주족 청나라가 지배하는 국제질서하에서는 조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인식을 깔고 있었다. 한국학력평가원 교과서는 이런 맥락도 고려하지 않고, 조선을 중국의 아류로 자리매김했다. 일제강점기 역사학자들의 서술 태도를 모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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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년 8월 30일 새 교육과정(2022개정 교육과정) 적용으로 학교 현장에서 사용할 새 중학교 역사·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검정 결과가 공개됐다. 이 중 처음 검정을 통과한 한국학력평가원의 교과서는 보수적 시각으로 현대사를 서술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
| ⓒ 연합뉴스 |
"열악한 조건으로 일본군과 싸워 이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본다. 오히려 우리 민족의 소중한 생명만 희생될 뿐이다. 나는 순간의 분함을 참고 훗날을 도모하여 실력을 키우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이런 논리를 퍼트리는 것이 한국 대중의 생명을 걱정해서가 아니라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이 글은 독립운동이 '순간의 분함을 참지 못하는 행동'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느낌을 갖게 되면 친일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도 있다.
위 교과서는 일제의 한국 수탈도 이상한 방향으로 서술했다. "지하자원이 풍부한 한반도 북부 지방에 일본이 독점 진출하여 군수공장과 제철소 등을 세우고 철광석과 석탄 등 광물자원을 수탈하였다"라는 서술도 그 일례다.
위 문장은 일제가 한국을 수탈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로 다음 문장은 "이에 한국의 경제구조는 군수산업 중심의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였고, 소비재 산업은 크게 위축되었다"고 말한다.
일제가 수탈한 결과로 한국의 소비재 산업은 위축됐지만 한국의 중화학공업은 크게 성장했다고 위 교과서는 주장한다. 수탈의 결과로 일본의 중화학공업이 성장했다고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고 위와 같이 기술한 것이다. 일제 수탈로 인해 한국이 이익을 봤다는 서술은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반감을 떨어트리기 위한 것이다. 이런 역사교과서가 윤석열 정권의 검정을 통과했던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심각했던 데는 뉴라이트를 앞세운 역사교과서 집필도 한몫 했다. 이는 두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치열해진 주요 요인이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윤 정권은 뉴라이트와 합세해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만들어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빠진 구덩이에 똑같이 빠진 것이다.
역사에 익숙한 집단은 과거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는 훈련이 잘돼 있다. 불과 얼마 전에 이명박·박근혜가 빠진 구덩이에 똑같이 빠진 사실은 윤 정권이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집단임을 보여준다. 그런 정권이 '신의 비밀'을 함부로 건드렸다가 낭패를 크게 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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