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이 된 베를린... 베테랑 운동권이 방화범에게 경고한 이유
베를린의 정치 사회 문화적 풍경을 소개하고 그 이면에 숨겨진 역사적 배경을 살피며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통해 독일 수도의 어제와 오늘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편집자말>
[고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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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남동부 지역의 고압 철탑 두 곳에서 발생한 방화 추정 화재로 인해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다. |
| ⓒ EPA 연합뉴스 |
새로운 세대인 이들은 군수산업과 첨단기술 단지를 상징하는 기반 시설을 공격함으로써 '자본주의와 군사 권력에 대한 강력한 정치적 저항'을 행동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번 사건을 저지른 '후배'에게 '선배'가 훈계하고 나섰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은 9일 오전 3시 30분경 베를린 남동부 요한니스탈 지역의 고압 송전탑 2기가 불길에 휩싸이면서 시작됐다. 잠들어 있던 도시가 깨어나기도 전에 5만 가구가 한순간에 전력을 잃었다. 신호등이 꺼지고, 전철이 멈췄으며, 병원 의료기기가 꺼지고, 독일 최첨단 과학기술단지가 마비되었다. 알고 보니 표적은 아들러스호프 과학기술단지였다. 단지 내 정보기술(IT), 로봇, 생명공학, 인공지능, 우주항공, 보안, 군수 관련 기업과 연구소의 전력 공급이 차단됐다.
신속히 복구작업에 들어갔으나 11일까지 약 1만 3000가구가 정전을 겪는 등 완전 복구까지 사흘 이상 걸렸다. 베를린시 당국은 임시 비상신고소를 운영하고 전력 절전을 요청하는 등 대응 조치를 취했다. 비상신고소에 몰려든 시민들은 핸드폰 충전을 요구했다.
사건 당일 온라인 플랫폼 인디미디아에 '일부 무정부주의자' 명의의 글이 올라왔다. 자신들이 이번 방화의 배후라고 밝힌 이들은 이 사건을 군수산업과 첨단기술을 포함한 "자본주의 체제와 군사 권력에 대한 정치적 저항"으로 정의했다. 특히 군산복합체가 자연과 인간을 착취하는 기제라고 비판하며 체제 근간의 시설 공격을 정당화했다. 이들은 "지역 주민 피해는 의도치 않았으나 불가피한 부수적 피해"라고 하며 첨단기술-군산복합체 연결을 통제 불능으로 만들겠다는 급진적 정치 의지를 드러냈다.
카이 베그너 베를린 시장은 이 사건을 "시민을 겨냥한 위험한 공격"으로 규정했고 베를린 경찰도 정치적 동기의 방화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책임자 추적과 추가 위험 차단에 집중하고 있는 경찰은 이번 행위가 계획된 테슬라 개발센터 시설을 겨냥했을 가능성에도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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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남동부 지역의 고압 철탑 두 곳에서 발생한 방화 추정 화재로 인해 대규모 정전이 발생하면서 한 아파트 단지가 어둠에 잠겨 있다. |
| ⓒ EPA 연합뉴스 |
자본주의, 군사주의, 국가 권력에 반대하는 투쟁은 여러 형태로 여전히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한 조직화가 다시 활발해졌다. 이들은 군산복합체와 첨단기술단지를 자본과 폭력의 상징으로 규정해 네트워크를 통한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번 사건을 통해 급진적 저항의 표현이 민간 피해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한다는 사실이 다시 입증되었다. 시민들이 예기치 못한 정전에 따른 불편과 더불어 안전에 대한 위협을 겪게 되면서 지역사회 내에서는 공격 행위에 대한 윤리적 비판이 지배적이다. 경찰과 정부는 정치적 폭력 행위에 대한 강력 대응 입장을 재확인하고 극좌와 극우 분파 모두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중이다. 이번 사건은 급진 저항과 사회 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인디미디아에 오른 무정부주의자 명의의 글에 자신을 "1980년대 반제국주의 운동 베테랑"이라고 칭한 인물이 저항 운동의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경고하는 글을 남겼다. 그는 이번 공격이 전략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군산복합체 공격은 자기네 세대가 만든 행동전략인데 실패한 전략을 다시 끄집어내서 무엇을 하려는지 묻고는 이렇게 평했다.
첫째, 이번 공격은 정치·전략적으로 잘못됐다. 너희는 군산복합체의 전원을 끈 게 아니다. 그저 그럴 수 있음을 증명했을 뿐이다.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사회에 피해만 남겼다.
둘째, 철도·도로·수자원·전력망은 군사적 성격도 띠지만 동시에 시민 삶의 기반이다. 그것을 치면 먼저 타격받는 건 일상이다.
셋째, 정보 제공과 저강도 정치 활동(지역 설명회·거리 캠페인 등)을 통해 사회적 합의의 토대를 쌓지 않은 채 곧바로 무장 행동으로 건너뛰면, 지지층은 증발하고 고립만 심화한다.
넷째, 국가는 이런 사안에 매우 강력한, 전쟁에 준하는 대응을 한다. 체포되면 10년 정도의 장기 실형을 받을 수 있고 주변 생태계까지 압박받는다.
마지막으로, 행동 동기가 자기 과시로 흐를 위험이 있다. 아들러스호프에서 대규모 공개 토론·정보행사 등을 조직해 정치적 공간을 확보했어야 한다. 행동보다 정치적 합의가 중요하고 '대의'를 내세운 행위라도 도시의 약한 고리(환자·고령자·소상공인)에 직접 피해가 돌아가면 공론장의 지지를 잃는다. 결과적으로 더 강한 통제·감시를 정당화하여 역풍을 부르게 된다. 이런 사실은 오랜 저항의 결과로 얻은 교훈이다.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적법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쓰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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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남동부 지역에서 방화 추정 화재가 발생한 고압 철탑을 점검 중인 작업자 근처에 경찰차가 주차되어 있다. |
| ⓒ EPA 연합뉴스 |
"1980년대 반제국주의 운동 베테랑"이라는 익명의 비판자가 쓴 글에 드러나는 경험의 구체성과 자기 성찰의 깊이는 실제 무력투쟁을 겪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들로 보인다.
적군파는 1970년대부터 1998년 해체까지 독일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극좌 무장투쟁 조직이다. 그들 역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선 정당한 투쟁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고립과 국가 폭력의 확대만을 가져왔다. 수많은 테러와 납치, 암살을 저지르며 독일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결국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스스로 해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쓰라린 경험을 가진 사람이 오늘날의 젊은 급진주의자들에게 던지는 경고는 무겁다. 역사는 반복되고 같은 실수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다.
베를린과 독일 사회는 이러한 복잡한 정치적 저항을 어떻게 평가하고 대응할지 앞으로도 신중히 고민해야 한다. 향후 급진 행동이 가져올 파장에 대비함과 동시에 사회적 합의의 중요성 역시 간과할 수 없는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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