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년 짐승 취급 끝장낸 말, 가슴에 콕 박히네요
[이완우 기자]
|
|
| ▲ 진주 남가람공원 형평운동 기념탑 |
| ⓒ 이완우 |
진주는 우리나라 인권 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형평운동 단체인 조선 형평사가 창립된 곳이다. 1923년 4월, 이 땅의 백정들이 신분 해방을 지향하며 진주에서 형평운동을 출발했다. 백정은 갑오개혁의 '해방의안'으로 신분 평등이 선언되었으나, 현실은 수십 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조선 시대의 백정은 도살업을 세습하는 천민 계층이었다.
백정들은 마을에서 함께 살 수 없었고, 기와집에서 기거할 수 없었다.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으며, 상투를 틀 수도 없었다. 죽어서 공동묘지에 함께 묻힐 수도 없었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우리 민족의 분열 정책을 폈다. 친일 귀족을 양성하고 유지했으며, 조선의 봉건적 질서를 계승하여 억압했다. 백정은 민적(民籍)의 이름 앞에 '붉은 점'을 찍었고, 도한(屠漢)으로 기재했다. 학교의 입학 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서류에 신분을 표시해, 사회 진출도 어려웠다.
|
|
| ▲ 진주박물관 소장 자료. 형평사 창립 취지문, 진주 지식인 강상호 문구, 형평사 잡지 정진, 일제에 의해 파괴된 진주 읍성 풍경 |
| ⓒ 이완우 |
우리들은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바람이 본사의 주지(主旨)니라. (하략)
진주박물관 전시실에서 백정의 손때 묻은 도구였고 형평운동의 상징인 저울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역사적인 가치와 의미가 있는 백정의 저울은 볼 수 없었다. 100년 전 형평사의 저울이 전시되었다면, 형평운동이 더 가깝고 쉽게 이해되었을 듯했다.
|
|
| ▲ 진주 남강의 수직 절벽 촉석(矗石) |
| ⓒ 이완우 |
|
|
| ▲ 인연 조상, 남가람공원 조형물 |
| ⓒ 이완우 |
형평사 운동은 계급을 타파해, 세상이 백정의 인간다움을 인정하기 바랐다. 백정의 교육을 장려하고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게 한다'라는 목표를 설정했다. 백정 신분의 족쇄에 묶여 짐승 같은 대우를 받았던 수백 년의 처절한 한이 들불이 되어 전국에 번졌다. 백정들이 저울을 들고 단체 행동에 나섰다. 무게를 가늠하는 저울(형, 衡)은 평등과 해방의 상징이 되었다.
|
|
| ▲ 신세계를 찾아서 십장생, 남가람공원 조형물 |
| ⓒ 이완우 |
|
|
| ▲ 비상(飛翔) 남가람공원 조형물, 날개 편 백로가 하늘 높이 날고 있는 형상 |
| ⓒ 이완우 |
둘. '비상(飛翔)' 조형물이다. 날개를 하늘 높이 솟구쳐 편 백로가 바람을 타고 힘차게 날고 있다. 대화와 화합, 결속과 협동의 강한 의지를 표상 한다고 한다. 진주시의 상징 새는 백로이다. 이 두 개의 조형물이 형평운동의 이상과 가치를 함께 표현한 듯하였다.
백정들의 신분 해방에 대한 염원과 활동은 오랜 세월 축적되었다. 1896년 관민공동회에서 박성춘이 연단에 올랐다. 스스로 백정임을 당당하게 선언하며 세상으로 나왔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
|
| ▲ 형평운동 기념탑, 진주 한가람공원 주제 조형물 |
| ⓒ 이완우 |
한가람공원의 주제 조형물은 형평운동 기념탑이었다. 두 남녀가 손을 잡고 견고한 족쇄 같은 차별과 편견의 석문을 통과했다. 이 석문은 이내 평등과 화합의 문이 되었다. 두 남녀가 바라보고 걸어가는 높은 두 기둥은 순풍을 받아 희망의 미래로 항해하는 배의 돛으로 보인다. 형평운동 기념탑 앞에는 석조 원탁과 의자가 놓였다. 대화와 화합의 한마당이다.
형평운동 기념탑에 새겨진 글귀는 형평사 주지의 핵심 명제였다. 현재의 우리가 날마다 읽어도 의미가 새로운 내용이다.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愛情)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라.
백정들의 신분 해방과 차별 철폐의 요구는 오래되었으나, 사회의 곳곳에는 아직도 차별의 폐습이 남아 있었다. 백정들은 사회적 차별 속에서도 근면한 활동으로 경제적으로 재산을 축적했다. 1920년대 백정 이희찬은 진주에서 상당한 자산가였다. 그러나 그의 자녀는 백정이라고 여전히 학교 입학을 거부당했다. 이런 현실은 진주에서 형평사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진주 형평사 결성의 동력은 진주 지역의 지식인들과 경제력을 갖춘 백정들이었다. 백정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단체를 결성해 행동하고자 했다. 양반 지식인 일부는 '신백정'이란 모멸적 멸시를 받으면서도 백정의 신분 평등을 위해 협력했다.
백정 출신의 자산가인 장지필과 이학진, 조선일보 진주 지사장이었던 지식인 신현수와 강상호가 형평사 창립의 핵심 활동가였다. 1923년 4월 24일, 형평사 창립 대회가 진주 대안동에서 회원 80여 명이 참가하여 개최되었다. 형평사는 열렬한 지지와 사회단체의 후원을 힘입어 1년여 만에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1924년 8월 이후 진주에 있던 형평사 본사가 서울로 옮겨 갔고, 1930년대 중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이러한 형평 운동의 단체 행동으로 백정의 사회적 지위는 향상되었다. 호적에 남아 있던 신분 표시가 사라졌으며, 백정 자녀의 교육 기회를 보장 받았다. 사회적으로 백정에 대한 차별 관행도 개선되었다. 이처럼 형평운동은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들이 단체를 결성하고 사회운동 세력과 연대해서 인권을 개선한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 운동으로 의미가 크다. 일제 강점기에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사회운동이었으며, 우리나라 인권 운동의 금자탑으로 우뚝 섰다.
형평운동 정신은 차별 없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소수를 존중하여 평등 사회를 만드는 것이 형평 운동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진주에서 100년 전에 시작한 형평운동은 현재의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 기준이다.
형평운동 기념탑에서 진주성 서장대까지 남강 산책길을 따라 2.2km 거리를 걸어보기로 했다. 형평운동 기념탑을 떠나면서, 진주박물관에 형평사 자료로 게시된 소설 내용 부분을 되새겨 보았다.
" 사람이 한 일이야 사람의 손으로 뿌사야지. 임금이다, 양반이다, 상놈이다, 천민이다, 그거를 하누님이 맨들었나? 사람이 맨든 기라. 사람이 맨든 기문 사람이 뿌사부리야제." - 박경리, <토지>
|
|
| ▲ 진주 남가람공원 형평운동 기념탑 |
| ⓒ 이완우 |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통일교 1억 수수' 혐의 권성동 구속...특검 도입 후 첫 현역 의원 구속
- 시위 때 성조기 흔들어대는 유이한 나라 한국, 그 뒤에 '심층국가' 있다
- 워킹맘들은 매일 세 겹의 죄책감을 짊어진다
- 정교일치, 중세로 회귀하는 국민의힘
- [단독] 4년간 2857억 판 PX 화장품들, 수상한 자진해약... 군, '할인율 뻥튀기' 방관했나
- '이 대통령 변호인' 왜 자꾸 중용될까
- [손병관의 뉴스프레소] 조선일보 "이화영 주장 뒷받침하는 법무부 조사결과 나온다"
- 검찰청 폐지는 위헌이 아니다
- 추미애가 꼽은 '나경원 법사위 간사 부결' 이유 네 가지
- [오마이포토2025] "2시간 넘는 한강버스, 누가 출퇴근에 타겠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