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 때 성조기 흔들어대는 유이한 나라 한국, 그 뒤에 '심층국가' 있다
[오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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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조기 등장한 국힘 규탄대회 국민의힘이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 계단에서 연 야당탄압 독재정치 규탄대회에서 일부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
| ⓒ 남소연 |
월트 교수는 이런 기득권 집단을 '한 줌의 물방울'이라는 뜻의 블롭(blob) 또는 워싱턴을 감싸는 순환도로의 이름을 따서 '벨트웨이'라고 불렀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표현 방식을 빌리자면, '심층 국가(Deep State)'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정권 교체에도 숭미·친일 정책이 변함없는 이유
한국에도 미국처럼 외교·안보 정책을 쥐락펴락하는 심층 국가가 존재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980년대 민주화 이후 보수 성향과 진보 성향의 정권이 번갈아 집권하고 있지만, 숭미·친일 중심의 외교 정책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그런 정책을 생산하고 주무르는 강고한 집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명품 외교>와 <브라보 한미동맹> 연작을 통해 한국 외교의 문제를 통렬하게 까발린 이창천(필명) 전 대사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와 함께 군중 시위 때 성조기를 들고나오는 세계에서 유이(唯二)한 국가입니다. '미국 숭배의 진(gene)과 밈(meme)'이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깊게 스며들어 있다는 방증입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대미 정책을 두고는 누가 심층 국가의 구성원인지 따지는 게 사치스러울 정도입니다. 정(政)·관(官)·학(學)·군(軍)·종(宗)·언(言) 등 한국 사회의 각 분야에서 잘나가는 사람은 거의 다 그 구성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일 정책은 좀 다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로 가혹하게 다스렸던 쓰라린 역사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친일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도 겉으로 내놓고 얘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안팎의 차이가 대일 정책에서 심층 국가가 준동할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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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제31차 한일포럼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이번 포럼에서는 한국 측 회장인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과 일본 측 의장인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학 명예교수 등 60여 명이 참석해 한일 관계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2023.9.1 |
| ⓒ 연합뉴스 |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 포럼에 참가하는 한국 쪽 사람들이 과연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가, 한국의 변화를 반영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올해 한국 쪽 참가자 면면만 훑어봐도 왜 이런 의문이 나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정권은 이재명 정권으로 바뀌었지만, 참가자 대부분은 윤석열 정권 취향이거나 보수 성향 일색입니다.
일례로, 한국 대표 33명 중에 유명환 회장(노무현 정권 때 주일 대사·이명박 정권 때 외교부 장관)을 포함해 신각수·윤덕민·박철희 등 주일 대사 출신이 4명이 들어있습니다. 유 회장 외에 3명은 모두 보수 정권 시절에 대사를 지낸 인물입니다. 윤석열 정권 때 임명된 박 전 대사와 진창수 전 오사카 총영사는 이재명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불려 들어왔는데도 참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반면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 때 대사를 지낸 사람들은 모두 배제됐습니다. 언론계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 성향의 <조선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 기자와 <중앙일보> 기자 출신 기업인은 들어갔지만, 진보 성향 매체에서는 <한겨레> 기자가 구색용으로 유일하게 포함됐습니다. 다른 분야도 구성원 편향이 대동소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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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제31차 한일포럼 기자회견에서 한국 측 회장인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3.9.1 |
| ⓒ 연합뉴스 |
사실 유 회장은 이념 성향이나 정권과의 친소를 떠나, 한일 관계에서 한국의 '대표'로 나설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김앤장법률사무소의 고문으로 일하며 한일 과거사의 최대 현안인 강제 동원 문제에서 일본 전범 기업의 편에서 일한 사람입니다. 2019년 검찰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직권남용 등의 죄로 기소하면서 내놓은 공소장에 그가 강제 동원 소송에서 어떻게 활동했는지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는 그런 사실이 드러난 뒤에도 회장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고, 포럼 안이나 돈을 지원하는 정부에서, 심지어 언론 쪽에서도 그의 회장 자격을 문제 삼는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당사자는 뻔뻔하게 버티고 주위의 사람들은 눈 감고 덮어주는 심층 국가 구성원의 '끈끈한 의리'를 이보다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겁니다.
수직 시대의 80대 노인들이 수평 시대에도 그대로
한일포럼 말고도 한일 간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나 조직 거의 대다수가 보수 편향, 친일 편향의 인사들에 포획되어 있습니다. 1982년 일본의 교과서 왜곡 파동을 계기로 1984년 한일 간의 문화교류를 증진·강화한다는 목적으로, 대기업이 출자해 설립한 한일문화교류기금을 봅시다. 이한기 초대 이사장이 숨진 1995년부터 이상우(87) 신아시아연구소 이사장이 이사장 자리를 이어받은 뒤 지금껏 1인 회사처럼 운영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는 이명박 정권과 윤석열 정권에서 친일 외교·안보 정책을 주도했던 김태효씨의 스승입니다. 그는 2013년부터는 이사장 자리를 유명환(79) 씨에게 물려줬지만, 회장 자리를 만들어 이사장 시절부터 30년 군림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 시절인 1999년 한일 문화교류 활성화를 위해 설립한 한일문화교류회의도 비슷합니다. 현재 3기째를 맞고 있는데 정구종(80) 전 <동아일보> 동아닷컴 대표이사가 2009년부터 16년째 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활동 전체 기간의 60% 이상을 한 사람이 떠맡고 있는 겁니다.
이런 사례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일 관계는 일부 보수·친일 편향의 노인들이 과다 대표하고 있습니다. 한일 관계는 수직에서 수평으로, 정치·경제 중심에서 문화·예술을 포함한 다방면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는데 한일 관계의 창구를 틀어쥐고 있는 세력은 여전히 수직관계 속에서 정치·경제 쪽에 편향된 교류를 해왔던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시대 변화를 반영하지 못할뿐더러 한국의 달라진 위상도 대표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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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월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21대 대통령 국민임명식에서 국민대표 80인으로부터 임명장을 수여 받은 뒤 감사의 인사를 하며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
| ⓒ 유성호 |
시대 교체, 세력 교체와 함께하지 않는 상층부만의 정권 교체는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진정한 정권 교체는 사회 곳곳에 숨어 활동하는 '그들만의 심층 국가'를 뿌리 뽑고 그들이 자라날 수 없도록 객토 작업까지 끝내는 것, 그래서 '모두의 국가'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겉이 아니라 속을, 머리 위가 아니라 발밑을 잘 살피는 용의주도함이 필요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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