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 세상 떠난 원어민 교사, 축구팬들이 기억하는 이유
[김성호 평론가]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08년 세상을 떠난 뉴질랜드인 그레이엄 피든(Graeme Peden)이 있다. 1963년생인 그레이엄은 2000년대 경기도 안양에 터를 잡고 영어 원어민교사로 일하며 한국과 연을 쌓았다. 축구를 좋아했던 그는 자연히 당시 안양을 연고지로 했던 프로축구팀 안양 LG 치타스의 팬이 되었다. 정부 정책에 따라 수시로 연고지를 옮기던 당시 프로스포츠 관행에 따라 충청도를 거쳐 서울에 둥지를 텄던 LG 치타스(1991년 이전엔 럭키금성 황소 축구단)가 안양에 새로 터를 마련했을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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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멤버 그레이엄 스틸컷 |
| ⓒ 다양성동영화제 |
2025 다양성洞영화제에 소개된 <리멤버 그레이엄>은 그레이엄과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한국에서 영어 원어민 교사로 일했던 수만 명 중 한 명인 그레이엄 피든이 어째서, 또 어떻게 기억돼 마땅한 존재가 되었는지를 살피는 단편영화다. 2024년 작, 30분이 좀 안 되는 단편 다큐멘터리로 지난해 프로축구단 FC안양에 얽힌 희노애락을 다룬 화제작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의 감독 중 한 명인 나바루가 만들었다. 전작에 이어 역시 FC안양에 얽힌 이야기란 점에서 한 층 발전한 모습이 기대되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관련기사: 팬들 버린 안양 LG 치타스... 분노한 팬들의 놀라운 복수 https://omn.kr/25sf8 )
개인적으로 감독 나바루를 알고 지내는데, 우연히 마주친 어느 날인가 그가 내게 이 영화를 소개했다. 신작이 무엇이냐 묻는 내게 그는 이번엔 '깃발이 주인공'이라고 했다. 축구팬이라면 서포터가 흔들거나 구장에 거는 크고 작은 깃발이며 걸개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깃발로, 그것도 그를 주인공 삼아 영화 한 편을 만들 수가 있다고? 나는 그럴 수 있는 깃발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는 터다. 이번 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본 건 그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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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멤버 그레이엄 스틸컷 |
| ⓒ 다양성동영화제 |
영화는 그레이엄을 기억하는 이들을 카메라 앞에 세워 그와 얽힌 추억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FC안양 창단 당시부터 서포터석에 걸려 있던 걸개 'Remember GRAEME'과 이 걸개의 주인공인 그레이엄 피든이 어째서 특별한 사람인지를 보인다. 그저 오늘 FC안양 응원석에서 마주할 수 있는 하나하나처럼 또 한 명의 팬일 뿐이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곁을 내어줄 수 있는 동료이고 동지이며 친구인 사람. 특히나 그 시절 외국인이 흔치 않았던 한국에서 안양이란 도시를 연고로 한 축구팀의 팬이라는 점은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고.
안양 LG 치타스를 향한 그의 애정은 누구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아서 그저 같은 팀을 응원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들은 서로에게 또한 짙은 애정을 느꼈다고 전한다. 팀을 너무도 좋아하여 비행기가 뜨지 않은 어느 날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택시를 타고 원정을 가기까지 했을 정도다. 그레이엄은 특유의 친화력과 격의 없는 성품으로 국적도, 언어도, 문화적 배경도 다른 이들과 허물없는 관계를 맺어나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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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멤버 그레이엄 스틸컷 |
| ⓒ 다양성동영화제 |
구단이 연고를 이전한 뒤 아예 해당 스포츠에서 마음을 뗀 이들을 여럿 알고 있다. 개인 팬으로선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 실망과 회의가 일종의 우울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러나 안양 LG 치타스의 팬들은 달랐다. 이들은 진짜 서포터, 아끼는 것을 위해 저항하고 항전할 줄 아는 이들이었다. 연맹의 결정에 반발하고 그 부당함을 알렸으며, 일이 어찌 될 수 없게 된 뒤에는 민의를 모아 안양에 시민구단을 새로 창설케까지 했다. 그 팀이 빼앗긴 붉은 색 대신 포도의 고장 안양답게 자줏빛을 상징색으로 쓰는 FC안양이 되겠다. 온갖 역경을 딛고 올해 K리그1으로 승격, 깊은 부진에 허덕이는 FC서울과 만나 역사적 승리를 거둔 바로 그 팀이다.
그레이엄은 2013년 FC안양의 창단을 보지 못했다. 팀을 빼앗긴 뒤 한동안 축구를 보지 않았고, FC안양의 팬들과 함께 항의하는 집회에 참여하고, 해외 언론에 부당함을 알리는 서한을 써 보냈으며, 이태원 등지에서 외국인들과 만나 FC서울을 응원하면 안 되는 이유 등을 알려왔다던 그다. 그런 그가 2008년 집으로 돌아가던 버스 안에서 돌연 쓰러져 숨졌다고 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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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름성수 포스터 |
| ⓒ 필름성수 |
연맹은 무능했고, 기업 주도 구단은 이기적이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판단은 산업적, 또 사업적으로는 틀리지 않았다. 다만, 스포츠 정신과 연고제의 가치를 저버렸단 점에서 틀린 것이기도 했다. 피해는 고스란히 안양 LG 치타스를 좋아하던 팬들의 몫이었다. 그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이들은 저들 중 하나였던 그레이엄을 잊으려 들지 않는다. 팬을 저버린 구단과 싸워 새로 팀을 만든 이들이기에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의 가치를 더더욱 잘 아는 것일 테다.
의지를 잇는 자가 있다면, 꿈은 이어진다. 이뤄지는 일이다. 그레이엄의 꿈도 그렇다. 그는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FC안양이 그 서포터들이 있는 한.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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