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동네 예찬, 제주에 살면서 제일 좋은 러닝코스

김태리 2025. 9. 10.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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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가장 크게 바꾼 곳... '오늘도 법환을 달린다'는 말 속에 담긴 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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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리 기자]

 나의 일상은 법환포구 러닝에서 시작된다.
ⓒ 김태리
새벽 다섯 시.

휴대폰 알람을 끄고, 잠들어 있던 반려묘 다람이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반쯤 뜬 눈으로 500여 일째 습관으로 이어오고 있는 덤벨을 이용한 근력 운동을 해낸다. '피곤한데 다시 잘까? 오늘은 러닝 쉴까?' 하는 생각과 '오늘도 달려야지!!' 생각들이 부딪힐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곧바로 러닝 준비를 한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이고, 현관문을 열자 제주의 새벽 공기 속 해 뜨기 전 붉은 하늘이 반긴다. 기지개를 한번 크게 켜주고, 습기가 가득하지만, 가까이 느껴지는 바다 냄새와 풀 내음에 코도 깨워본다. 나의 하루의 시작이다.

달리기만 해도 이미 작은 성공

내가 달리는 곳은 서귀포 법환 바닷가 러닝코스다. 이름만 들으면 거창한 '코스'를 떠올리지만, 사실은 작은 동네의 바닷길 산책로에 가깝다. 하지만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길이다.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주는 루틴이자, 하루를 여는 의식 같은 곳.

집에서 몇 분만 걸으면 바다가 열린다. 달리기 시작하는 첫 발자국이 닿는 순간, 아직 해가 뜨기 전 어스름한 바다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바다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지만, 그 표정은 매일 다르다. 파도가 거세게 밀려올 때도 있고, 호수처럼 잔잔할 때도 있다.
 법환포구 러닝코스에서 만나는 호랑이섬
ⓒ 김태리
법환포구를 지나 바다 옆 길을 달리면, 왼쪽으로 커다란 호랑이섬 '범섬'이 나를 응원해준다. 새벽의 범섬은 짙은 그림자 같기도 하고, 아침 햇살에 물드는 순간에는 보석처럼 빛난다. 이 풍경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작은 성공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 길의 매력은 단순히 '바다가 보인다'는 데 있지 않다. 달리다 보면 길 위로 바람이 밀려온다. 계절마다 다른 향기와 공기,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제주를 여행온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얽혀 있는 길. 그래서 나는 이곳을 '성지'라 부른다. 신앙적인 의미가 아니라, 내가 하루를 새롭게 얻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계절이 남기는 발자국

법환 러닝코스는 계절마다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봄이면 길가에 유채꽃이 바다와 어우러 지고, 여름이면 수국이 범섬과 함께 꽃길을 이룬다. 달리기에 너무 좋은 황홀한 계절 가을을 지나, 겨울이 오면 특유의 겨울바다 냄새와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따뜻한 남쪽나라 서귀포의 매력은 나를 매일 달리게 한다. 여러 러닝 동호회 사람들이 함께 모여 달리고, 사진을 찍는 모습도 자주 본다.

그 중에서도 여름은 그야말로 법환의 절정이다. 햇빛은 뜨겁고 피부는 땀이 자꾸 눈으로 들어와 눈이 매워 시야를 가리기도 하지만, 러닝 후 용천수에 풍덩 뛰어들 순간만을 기대하며 하루 목표치만큼을 해낼 수 있다.
 제주 서귀포 법환포구 러닝코스를 달리고 난 후 천연 수영장 막숙 용천수에 몸을 담그면 땀과 피로가 한꺼번에 사라진다.
ⓒ 김태리
러닝 후 우리동네의 자랑, 천연 수영장 막숙의 얼음물같은 용천수에 몸을 담그면, 땀과 피로가 한꺼번에 사라지고, 아이싱이 절로된다. 여름 러너들의 특권 같은 순간이라 여름이면 더욱 뜨거운 태양아래 러너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이 코스의 또 다른 매력은 '사람'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달리다 보면 낯선 사람들이 익숙한 얼굴로 변한다. 항상 반려견과 함께 걷는 어르신이 있고, 낚싯대를 들고 새벽부터 포구로 향하는 아저씨가 있다.

달리다 마주칠 때면 가볍게 목례를 하기도 하고, 가끔은 관광객들이 엄지를 들고, '화이팅! 수고많으십니다!' 하고 응원을 보내주기도 한다. 그러면 나도 기분이 좋아져 다음 마주치는 러너에게 "화이팅화이팅!" 하고 응원메세지를 전파하게 된다. 오고 가는 짧은 인사들이 아침을 꺠우고, 마음을 환하게 한다.

러닝 동호회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달린 적도 있다. 하지만 혼자 달릴 때가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 위에서 만나는 '동네 사람들' 덕분에 전혀 외롭지 않다. 우리가 같은 길을, 같은 시간에, 각자의 이유로 걷고 달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위로가 된다.

러닝은 나의 루틴, 법환은 나의 스승

처음 법환에서 달리기 시작했을 때는 단순히 살을 좀 빼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달리기는 내 하루를 붙드는 힘이 되었다. 사업 준비로 밤을 새운 날도, 마음이 뒤숭숭한 날도, 이 길을 달리며 나누는 나와의 대화들 속에서 많은 것들이 정리된다.

달리면서 들이마시는 공기, 뛰는 발소리, 그리고 바다가 건네는 풍경. 그것들이 뒤엉켜 내 마음을 차분히 만든다. '오늘은 어떤 하루를 만들까?'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을까?' 범섬은 늘 묵묵히 그 답을 알려준다. "그저 달려라. 멈추지 말고. 오늘도 달리러 나왔으니, 멋지게 하루를 시작해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법환포구 러닝코스
ⓒ 김태리
어떤 이는 묻는다. "제주에 살면 제일 좋은 게 뭐예요?" 많은 답이 있겠지만, 나에게는 단연 법환 러닝코스다. 관광객들이 잘 모르는 작은 동네의 길이지만, 내 삶을 가장 크게 바꾼 곳이다. 나는 여기서 매일 새로 태어난다.

바다를 보며 숨을 고르고, 계절을 느끼며 발걸음을 옮기고, 사람들의 따뜻한 눈빛을 받으며 다시 힘을 얻는다. 그래서 나는 이 길을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다. 단순한 운동 코스를 넘어서,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길이 될 수도 있으니까.

오늘도 법환의 바다는 여전히 파도 소리를 낸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풍경이지만, 달리는 내 마음은 매번 새롭다. 운동화 밑창이 닳아도, 피부가 까맣게 그을려도, 나는 이 길을 계속 달릴 것이다.
법환 러닝코스는 내게 단순한 운동 공간이 아니라, 삶의 속도를 조율해주는 은혜로운 길이다.

"오늘도 법환을 달린다."

이 한 문장 속에 내 삶이 있다. 내일도 나는 같은 길 위에서, 또다시 새로운 하루를 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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