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7일에서 20일까지 중국 황산에 다녀왔다. 하루는 황산에 올라 서해와 천해(天海)를 중심으로 기이한 소나무(奇松)과 괴상한 바위(怪巖)을 살펴보았다. 하루는 황산 시내 문화유산을 살펴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항저우(杭州)에 들러 서호(西湖)와 만송(萬松)서원을 둘러보았다. 이번 답사의 주제는 황산과 항저우의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이다. <편집자말>
[이상기 기자]
▲ 휘주문화박물관
ⓒ 이상기
황산시에서 꼭 보아야 할 곳이 휘주고성과 휘주문화박물관이다. 휘주고성은 흡현 휘성진에 있다. 진나라 때 처음 만들어졌고, 당나라 이후 휘주부의 치소였다. 명청시대 수리와 복원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중국 3대 지방학파인 휘학의 발상지다. 예의를 중시해 중국 동남의 추로지향(鄒魯之鄕) 예의지방(禮儀之邦)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내성과 외곽 그리고 4대문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성안에 석패방, 부아(府衙), 옛거리, 누각, 휘원(徽園), 기념관 등 문화유산이 많다. 휘주고성은 낭중(閬中)고성, 평요(平遙)고성, 여강(麗江)고성과 함께 중국 4대 고성으로 불린다.
황산시 둔계구에 2008년 새롭게 문을 연 휘주문화박물관은 휘주의 역사와 문화, 상업과 교육, 예술과 건축 관련 유물을 전시한 1급 박물관이다. 크게 5개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전시실은 휘주로 달려가기(走進徽州)라는 주제로, 구석기 시대부터 원나라까지 대표적인 역사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제2전시실은 천하 휘상으로 명청시대 큰 부를 이룬 휘주 상인들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휘주 여인들의 활약도 소개된다.
▲ 휘주 삼조(三雕)를 대표하는 나무 조각
ⓒ 이상기
제3전시실은 휘주 교육이다. 휘주는 송나라 때 신유학을 꽃피운 지역으로 유교 문화의 성지로 여겨진다. 휘주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권력과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교육에서는 과학기술도 다루고 있다. 과학은 경세치용(經世致用)적 관점에서 첨단 학문이 된다. 휘주사람들은 의학 수학, 천문학 등을 공부했다.
제4전시실은 휘주 예술이다. 휘주 예술은 휘주의 자연과 문화에서 나왔다. 웅장한 산수를 배경으로 인문학적 분위기에서 생활한 휘주 사람들은 서화(書畫)를 통해 자신들의 가치관과 감정을 표현했다. 그들은 휘묵(徽墨)과 흡연(歙硯)을 사용해 수묵화를 그렸고, 당나라 이래 휘파 전각과 판화를 발전시켰다. 제5전시실은 휘주 건축이다. 건축은 촌락의 민가 주택, 사당과 묘우, 패방, 원림을 통해 나타난다. 그리고 건축의 예술성은 돌, 벽돌, 나무에 새긴 조각을 통해 높아지게 된다. 이를 휘주 삼조라 부른다.
휘주 문화와 예술 속에 담긴 정신
▲ 황산의 소나무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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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주문화박물관을 들어가면 만나는 것이 황산의 소나무 정신이다. 황산에는 영객송, 송객송, 단결송, 흑호송, 기린송 등이 있다. 이들 소나무가 보여주는 정신은 여섯 가지로 자강(自强), 병박(拼搏), 단결, 진취, 개방, 봉헌(奉獻)이다. 그 중 병박이라는 말이 생소하다. 중국어 사전을 찾아보니 전력을 다해 분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을 성취하기 위한 방식을 설명했다.
정풍오설(頂風傲雪)의 자강 정신이 첫째다. 산 정상의 눈보라에도 굴하지 않는 자강 정신이다. 견인불발(堅忍不拔)의 병박 정신이 둘째다. 중목성림(衆木成林)의 단결 정신이 셋째다. 중목성림은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룬다는 뜻이다. 백절불굴의 진취 정신이 넷째다. 백번 꺾여도 굴하지 않고 나감을 말한다. 광영사해(廣迎四海)의 개방 정신이 다섯째다. 광영사해는 사해처럼 널리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전심전의(全心全意)의 봉헌 정신이 여섯째다. 전심 전력으로 봉사하는 정신을 말한다.
▲ 점강효강풍편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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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소나무 정신 속에서 휘주의 역사와 문화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곳 제1전시실에는 휘주의 문화와 예술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는 작품이 분야에 관계 없이 나와 있다. 먼저 섬세한 조각작품이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휘주 삼조다. 십장생 조각, 화조도 조각, 추수하는 모습을 표현한 생활 조각 등 다양하다. 양각으로 새겨 입체감이 뚜렷하고 정교하다.
그림으로는 청나라 건륭제 때 그린 점강효강풍편도권(漸江曉江風便圖卷)이 전시되어 있다. 점강은 전당강 지류인 신안강의 옛 이름이다. 점강은 황산시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흐른다. 새벽녘 점강에 바람이 불 때 자연 풍경을 묘사한 두루마리 그림이다. 점강의 수로와 포구, 강을 운행하는 어선과 범선,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때의 쓸쓸한 나무들을 담백한 필치로 그려냈다.
▲ 휘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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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를 통해 1611년 홍인이 그림을 그리고 오백염이 화제를 썼고, 석도가 나중에 발문을 덧붙였음을 알 수 있다. 홍인은 명말 청초 신안화파의 대표화가고, 오백염은 그가 좋아하는 친구였다. 그런데 이 그림의 원 소장처는 안휘성박물관이고, 이곳에 있는 것은 복제품으로 보인다. 이 그림을 보면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떠오른다. 그것은 추사가 절강파로도 불리는 신안화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진나라 때 와당, 한나라 때 지석, 삼국시대 토용이 전시되어 있다. 향로 또는 화로로 사용되었을 청동기도 보인다. 수당시대의 동경도 여럿 있다. 송나라 시대 작품으로는 책자와 도자기가 전시되어 있다. 책자는 <휘주부지>와 유학 관련 서적이다. 도자기는 청자로 주병, 합과 발, 주전자, 상 같은 생활용품이다. 그런데 색이나 조각이 최상품이 아니다.
장사를 통해 얻은 부를 교육에 투자하다
▲ 휘주 상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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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상은 휘주와 신안 지역 상인으로, 장강 지역에서 부를 이뤄 베이징까지 진출했다. 중국 3대 상인으로,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중기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휘주는 농토가 많지 않은 산간 지역이어서 가난했고, 장사를 통해 부를 축적할 수 밖에 없었다. 당송 시대부터 목재, 도자기, 칠기를 유통시켰고, 차와 벼루 그리고 문방사우를 생산했다. 송나라 때 유학자 주희의 외조부도 상점과 여관을 경영해 큰 돈을 번 휘상으로 알려져 있다.
휘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학문을 좋아하던 그들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유교를 숭상하고 학자를 우대했다. 그 때문에 휘주에서 상업과 교육이 특히 발달할 수 있었다. 휘상은 교육을 통해 배운 유교적 이상을 상업에 적용하려고 했다. 그들은 이익보다 의리를 중시해, 정당한 가격을 책정하고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상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또한 학교를 지원해 인재를 키우고 문화를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 휘상의 활동영역을 보여주는 지도
ⓒ 이상기
명나라 초기 휘상은 중국 내륙 소금 유통을 통해 최고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명나라 중기부터 청나라 건륭제에 이르기까지 휘주 상인들은 중국 제일의 상인 집단이 되었다. 상인의 수, 활동 범위, 종사하는 업종, 자본 규모 등에서 전국 최고였다. 휘주 성인 남성의 70%가 상업에 종사할 정도였다. 이때 휘상은 중국 뿐 아니라 일본, 동남아, 포르투갈과도 무역을 했다.
그러나 건륭 말기부터 봉건제가 무너지고, 세금 징수가 가혹해지면서 휘상의 수입이 줄기 시작했다. 소금 유통과 금융업의 독점 지위를 잃고 차와 목재의 유통에서도 큰 손실을 입어 부가 축소되었다. 외세에 의한 중국의 개방이 이루어지면서, 바다를 끼고 있는 광동성, 강소성, 절강성 상인들이 주도권을 잡고 재벌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휘상이 남긴 문화유산은 안휘성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휘주를 대표하는 상인과 학자 이야기
▲ 휘상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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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는 역사(史)가 있고, 지방에는 지(志)가 있고, 씨족에는 족보(譜)가 있다."
휘주는 원나라 때부터 청나라 때까지 사용된 지방 이름이다. 이때 경제와 문화가 번성해 휘(徽)자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휘주의 경제와 문화를 일으킨 명문가가 많았고, 이들은 족보를 만들어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기록했다. 당나라 때 월국공(越國公)에 봉해진 왕화, 송나라 때 성리학자 주희, 청나라 때 경제학자이자 화폐이론가인 왕무음과 거상 호설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을 지낸 후진타오가 휘주 출신이다.
이들은 대개 상인 집안에서 자라 교육을 받고 정치가, 학자, 관료로 성장했다. 이처럼 경제와 교육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먼저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휘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휘상이 이룩한 부의 근원은 상품의 판매와 저장, 전당과 금융, 전매업 등이다. 이들 휘상이 가장 번창할 때가 청나라 전성기인 강희 옹정 건륭제 때다. 이들은 장강과 경항 대운하를 중심으로 황제의 신임을 얻어 궁궐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들은 황제의 만수무강을 축하하는 공연을 벌여 황제를 즐겁게 하기도 했다.
▲ 청나라 때 휘주의 4대 거상
ⓒ 이상기
청나라 전성기 휘주를 대표하는 거상 넷이 있다. 그들이 왕응경, 왕정장, 강춘, 포지도다. 왕응경은 양저우에서 소금 거래로 돈을 벌었다. 그리고 옹정제와 건륭제 때 재난과 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쌀 수만 석, 금은 수만 량을 제공해 구호 활동을 벌였다. 건륭제로부터 광록시(光祿寺) 소경(少卿)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왕정장 역시 소금 거래로 돈을 벌어, 경제와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건륭제의 남쪽 지방 순례를 주관했을 뿐 아니라 황실 행사에 거금을 지원했다. 이런 연유로 휘주 상인들은 건륭제 중기 이후 소금 산업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나라 말기의 호설암(1823~1885)도 유명하다. 그는 항저우의 상인으로 태평천국의 난 때 청나라 군대에 군량미와 군수품을 제공했다. 그는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부를 이룩했고, 관은(官銀)을 이용해 부강은행을 설립했다. 그리고 상하이를 중심으로 전국에 분점을 설치해 살아있는 이재의 귀신으로 불렸다. 항저우에는 호경여당이라는 중국식 제약회사를 만들어, 피온단, 팔보단, 행군산 등을 생산해 군과 민간에 공급했다. 이 때문에 그는 강남의 약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정치에서는 증국번을 배워야 하고 상업에서는 호설암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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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로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1130~1200)가 가장 유명하다. 주희는 할아버지가 휘주 무원현 출신이다. 1126년 송나라 수도 개봉이 금나라에 점령되어, 1127년 항저우 근방 임안에서 남송이 출범하게 되었는데 이때 할아버지가 복건성 무이산 북부 우계현으로 이사했다. 그 때문에 주희는 우계현에서 태어났다. 주희가 세상을 떠난 후 1210년 문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이때 그를 기리는 사당 문공사가 건립되었다. 1227년에는 태사 벼슬이 내려지고, 휘국공이라는 봉호를 받았다. 문공사는 1253년 남계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주희는 정호(程顥), 정이(程頤)의 이학(理學)을 이어받아 집대성한 대학자다. 주희의 성리학은 주돈이의 도학(道學)사상에서 출발한다. 주돈이는 <노자>의 무극(無極), <역경>의 태극(太極), <중용>의 성(誠)을 결합해 도학 사상을 만들어냈다. 정호와 정이가 이를 이어받아 도를 천리(天理)로 보았다. 사회 질서는 천리에 의해 결정되므로, 천리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선하며, 그러한 본성을 이(理)로 보았다. 세상만사가 다 이에서 출발하며, 이가 있는 곳에 기(氣)가 있다고 생각했다.
▲ 효제충신과 예의염치를 강조한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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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는 이정(二程)의 이기론을 토대로, 이를 형이상자로, 기를 형이하자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는 추상적 원리(原理)고, 기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심정(心情)이다. 이가 기에 의해 생물을 창조하고, 생물은 끊임없이 동(動)과 정(靜)을 반복한다. 동이 양(陽)이고 정이 음(陰)이며, 이를 통해 오행(金木水火土)이 생겨난다. 이러한 사물의 원리를 탐구하고 지식을 넓히는(格物致知) 구체적 방법으로, 천리를 탐구하고 인륜을 밝히고 성인의 말씀을 공부하고 사리에 통달할 것을 제시한다. 여기서 천리는 인의예지로 이루어진 도덕률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