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쌓여있는 세운상가... 독일 대학생들이 감탄 연발한 까닭
<오마이뉴스>와 노동-시민사회의 연대 문화 확산을 위해 만들어진 솔라시 조직위원회는 202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구체적 현실 속에서 더 나은 내일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사례로 보는 대안 정책'을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정희영 기자]
서울 '세운상가'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복잡하게 뻗어나가는 을지로의 골목들, 탱크도 거뜬히 만들 수 있었다는 전설을 품은 전자부품 업체들, 젊은이들의 핫플로 떠오른 오랜 노포들과 새로 생긴 카페들... 철거와 보존에 대한 치열한 대립이 끊이지 않는 이곳에 2024년 가을의 어느 날, 독일 뉘른베르크 예술대학의 학생들이 찾아왔다. 약 5년간 세운상가 일대에서 일했던 내게 이곳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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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에서 온 학생들을 맞이한 세운상가의 한 카페 |
| ⓒ 정희영 |
을지로~청계천 일대를 아우르는 '세운상가군'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나왔던 고장 난 미군의 전자기기 수리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청계천 전자상가는, 200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해 전 세계로 확산된 제작문화운동(maker movement)이 부상하기 훨씬 전부터 자연 발생한 제작문화의 토착적 도시공간이었다(조동원, 청계천 전자상가, 복제의 기술문화, 디지털문화의 형성, 인천연구원, 2017).
이러한 배경을 기반으로 1960년대 서울의 현대화·산업화 정책 아래 조성된 세운상가에는 1970~80년대 TV·라디오·가전제품 수리 및 조립 문화의 발전과 함께 기술자들이 모여 독특한 산업 생태계를 형성했다. 전기, 전자, 기계 등 전자산업 중심의 세운상가는 자연스레 주변(을지로의 조명, 건축자재, 방산시장의 포장재료, 인현동의 인쇄 골목, 동대문의 패션상가까지)으로 이어지며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이끌었다. 이 역사를 느낄 수 있는 한 작업실로 학생들을 데려갔다.
업력 30년 이상의 기술장인이 1만여 명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큰 힘이 돼요. 이렇게 젊은 사람들과 잠깐이라도 만나 안부 인사하고 산책하는 게 나에게 중요한 작업의 시작이에요." (류재용 기술장인)
세운상가에서 50년간 작업실을 운영해 온 류재용 기술장인은 70년대 원자력 연구소, 대덕연구단지 등에서 자동제어장치를 만들던 '원조 기술자'다. 이제 작업실은 그의 취미 공간이 되어 스피커를 만드는 오디오기기와 코일선들이 쌓여있다. 장인표 수제 앰프에서 울리는 따뜻한 공명이 공간을 감싸자 독일 학생들의 호기심 어린 표정이 더욱 깊어졌다.
학생들은 손으로 직접 납땜한 회로 기판과 정교하게 조립된 진공관을 유심히 살펴보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장인은 부품의 수급, 최근까지 이어졌던 젊은 기술자들과의 협업 등의 일상을 설명했다. 특히 오랜 연구 활동의 원동력을 궁금해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답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큰 힘이 돼요. 이렇게 젊은 사람들과 잠깐이라도 만나 안부 인사하고 산책하는 게 나에게 중요한 작업의 시작이에요." (류재용 기술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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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재용 기술장인의 작업 공간에서 |
| ⓒ 정희영 |
세운협업지원센터가 문을 열기에 앞서, 서울시는 세운~청계대림상가를 공중보행교로 잇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공간을 새롭게 만들어 청년 창업자들을 입주시켰다. 이들은 기술, 제조업에 기반하여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메이커'로서, 기존의 기술장인들이 가진 전문성, 노하우, 인적 네트워크 등에서 도움이 필요했다. 세운협업지원센터는 2022년 문을 닫을 때까지 '세운메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기존의 기술장인과 청년 메이커를 연결하고 협업을 지원했다.
장인의 작업실을 나온 학생들은 2017년 당시 입주했던 메이커 그룹 중 한 곳을 방문했다. '여성을 위한 기술랩'의 전유진 대표가 독일 학생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그동안의 활동 성과와 요즘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단순한 제작 지원이 아니라, 기술과 젠더를 연결하여 기술적 자립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는 전 대표의 설명에 예술사회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크게 끄덕였다.
"기술은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전통적인 제조업 단지 한가운데에서, 기술을 소재로 새로운 사회 변화를 고민하는 이 기업의 활동은 매우 중요해 보입니다." (학생A)
학생들은 방금 만나고 온 류재용 기술장인과 같은 기존의 기술장인들과도 협업을 하는지에 대해 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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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을위한기술랩’ 전유진 대표와의 만남 |
| ⓒ 정희영 |
이정성 장인은 백남준 아티스트의 작품 구현을 맡았던 테크니션으로, 아직까지도 전 세계 곳곳에 전시된 비디오아트 전시물의 수리·보전을 도맡고 있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독일 학생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그 유명한 백남준의 파트너가 있다니!
두근거리며 문을 연 작업 공간은 그 자체로 백남준 전시실이었다. 각종 매체, 교과서에서 보던 특유의 모니터들이 가득, 또 한켠에는 전 세계에서 날아온 백남준 전시회의 도록들이 꽂혀있었다. 예술학도로서 감탄과 질문을 연발하는 학생들에게 이정성 장인은 조금 느리고도 담담하게 답변을 해주었다.
"백 선생과 세계 곳곳을 다니며 작품 설치도 하고, 수리도 하곤 했어요. 하루는 뉴욕, 하루는 프랑스 이런 식으로.,. 이제는 이 부품들을 구하기도 어렵고, 이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하는 일은 전 세계 전시관에서 요청한 백업 부품을 만들어 보내는 거예요. 말하자면 내 사후를 대비해 주는 거요." (이정성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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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빼곡히 쌓인 백남준 미디어아트 전시부품 |
| ⓒ 정희영 |
지구 반대편에서 온 외국인 학생들과 함께 세운을 걸었다. 세운협업지원센터가 갑작스레 문을 닫은 후 2년 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청계상가에서 보이던 남산은 26층 빌딩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청년 메이커와 기존 제조업체가 나란히 줄 서 있던 자리에는 카페와 술집이 더 많이 보인다.
이 거대한 생태계에 처음 발을 들이는 청년들을 환영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연결하여 안정적으로 적응을 돕던 협업지원센터는 더 이상 문을 열지 않는다. 발로 뛰며 얼굴을 트고, 관계를 맺었던 사장님들만이 남아 다시 찾아온 나를 반가이 맞아줄 뿐이다. 당시 세운상가군 도시재생이 가졌던 산업재생, 보행재생, 공동체재생의 세가지 목표를 이루기엔 실험이 너무 빨리 끝났다고 느껴진다. 새롭게 생성된 하드웨어 구조물이 안정화되고, 이와 연결되는 사람들이 공동체로서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만 3년이 필요하다.
아쉬운 점은, 정책이 너무 성급하게 바뀐다는 것이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공간 사이, 각기 다른 개인이 품은 이야기가 어떻게 만나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속도로 정책이 결정되고 예산이 집행된다. 대림상가와 진양상가를 잇는 보행데크가 완공된 것이 2022년인데, 이마저도 곧 다시 철거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에 큰 안타까움을 느낀다. 공간-사람-산업을 잇는 철학의 부재가 뼈아프게 다가온다.
독일의 학생들은 세운상가 하나를 보고 갔지만, 대한민국의 각 도시에는 저마다의 세운상가가 있다. 예전의 영광을 뒤로하고 쇠락한 거리. 농촌을 떠난 청년들이 도시로 갔다지만 도시에도 청년은 없다. 골목골목을 채우던 각양각색의 삶의 방식들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다시, 세운에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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