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절대 '볼 수 없는' 영화, 다 OTT 때문입니다
김성호 평론가
OTT서비스를 비롯해 인터넷 환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VOD서비스까지, 지나간 영화를 집 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된 세상이다. 최신 극장 개봉작까지 약간의 시차를 두고 OTT서비스로 공개되는 상황은 세상 모든 영화를 내 집 안방에서 볼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
OTT서비스는 그 구조부터가 사용자 주도적으로 설계되지 않았다. 사용자 화면(UI, User Interface)부터가 그렇다. 원하는 작품을 검색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본사항이 아닌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첫 화면부터 수많은 작품이 노출돼 사용자의 관심을 사로잡는데, 현재 OTT 내에서 인기 있는 작품은 물론이고, OTT서비스가 독자적으로 제작한 오리지널 콘텐츠, 또 영화사의 광고가 반영된 영상물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사용자는 저 스스로의 판단으로 제가 볼 작품을 고른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OTT서비스 업체의 설계에 따라 콘텐츠를 고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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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판 스틸컷 |
| ⓒ 20세기 폭스 |
주목해야 할 것은 작품과 관객 사이를 편리하게 이어주고 있다고 믿어지는 OTT서비스가 실제로는 그 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OTT서비스 안에는 인간이 제작한 모든 작품이 들어 있지 않다. 현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대부분의 작품은 OTT서비스 바깥에 있고, 업체들은 그 작품들을 제 세계 안에 들이려는 노력을 거의 하고 있지 않다. 이미 확보한 콘텐츠조차 노출하려는 노력을 않는 상황에서, 확보하지 않은 콘텐츠에 대해선 아예 관심조차 없단 표현이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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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판 스틸컷 |
| ⓒ 20세기 폭스 |
주지하다시피 루멧은 영화사를 논할 때 빠져선 안 되는 명감독이다. 또한 법과 정의를 주제로 한 작품에 있어선 가장 앞자리에 드는 인물이기도 하다. 데뷔작인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이제껏 가장 훌륭한 법정영화라 평가되고, <심판> 또한 그 가치가 수시로 언급되고는 하는 것이다. 당대 명배우 폴 뉴먼이 주연을 맡은 데도, 법과 정의와 관련한 선명한 주제의식에 더해 연출자 루멧의 존재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터다.
<심판>의 줄거리는 간명하다. 삶을 포기하다시피 했던 막장 변호사 갤빈(폴 뉴먼 분)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한때 잘 나가는 변호사였던 그는 불의의 사건을 겪은 뒤 일과 가정생활 모두에서 완전한 파탄에 이르렀다. 벌써 반 년 넘게 사건 하나 맡지 못하고 있는 그는 일을 따겠다고 남의 장례식장을 돌며 명함을 내밀어야 할 만큼 궁색한 처지에 있다. 그런 그에게 절친한 친구 미키(잭 워든 분)가 손을 내밀어 사건 하나를 소개한다. 지역 유명 가톨릭 병원에서 의료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여성의 사건이다. 영화는 갤빈이 이 사건을 맡아 일류 로펌과 겨루는 과정을 제법 극적으로 그려낸다.
당초 사건은 별 어려움 없이 풀릴 것처럼 보인다. 건강했던 젊은 여성이 식물인간이 되는 과정에 마취약을 부적절하게 사용한 정황이 분명히 드러났던 것이다. 이를 증언해 줄 병원 내 의사를 구한 건 결정적이라 해도 좋을 순간이다. 흔한 의료소송 사건에서 그러하듯, 갤빈은 공익제보자를 확보한 순간 승리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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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판 스틸컷 |
| ⓒ 20세기 폭스 |
<심판>은 장단이 극명히 엇갈리는 영화다. 폴 뉴먼에 앞서 출연이 유력했던 스타배우의 입김으로 각본가가 수차례 변경될 만큼 제작에 난항을 겪었던 게 첫 번째 문제가 됐다. 망가진 변호사가 대중의 호감을 사기 어렵단 이유로 그는 제 캐릭터의 전사를 드러내는 상당한 분량의 에피소드를 추가하려 압력을 넣었다. 훗날 루멧이 서사가 망가진단 우려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고 회고했을 정도다. 캐릭터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각본이 고쳐질수록 이야기는 산으로 갔다. 치밀한 법정물이 극적인 대신 현실성을 잃어가기도 했다. 폴 뉴먼이 원안을 본 뒤 참여를 확정하기까지 영화가 본래의 매력을 거의 상실했을 만큼 변질됐단 우려가 나왔을 정도다.
망가진 각본은, 그러나 잠재력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폴 뉴먼의 연기는 시종 탁월해 그 엉망진창의 캐릭터가 별 부연 없이도 수긍이 될 정도다. 시드니 루멧은 법정에서 변론하는 갤빈의 모습을 흔한 바스트샷이나 클로즈업샷으로 담는 대신, 마치 법정을 그대로 중계하듯 멀찍이서 떨어져 잡기 일쑤다. 폴 뉴먼이 법정 안에 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설득하고 휘어잡는 모습을 모조리 보여주겠다는 듯이. 각본이 다소 망가져 있던 위태로운 상황이 도리어 연출과 연기가 절실하게 제 역할을 해내게끔 했다. <심판>은 그래서 불완전함이 완전함을 이루는 역설적 사례의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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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판 포스터 |
| ⓒ 20세기 폭스 |
법을 잘 알지는 못하여도 인간다움에 대한 감각이 있기에 배심원이 더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결말은 이 영화 <심판>을 오늘날까지 유효한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매수로부터, 개인의 독단으로부터, 또 지적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 판사가 과연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배심원보다 누구의 인생을 결정할 자격이 더 있다 할 수 있는가. 쉽게 답할 수 없는 이 문제를 <심판>은 단순하지만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다.
의료소송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또 배심원제의 가치를 일깨운다는 점에서 한국의료변호사협회는 <심판>을 2025년 한국에서 다룰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정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한국에선 합법적인 경로로 보기가 쉽지 않다. DVD를 구입하거나 이를 구비한 영상자료원 및 소수 공립도서관에서 대여하지 않는다면 따로 볼 방법이 마땅찮은 것이다. 한국에서 영업하는 어떠한 OTT서비스도 루멧의 이 작품을 구비하고 있지 않다. 이 영화가 한국사회에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을뿐더러, 영화사에 손꼽히는 명감독의 아카데미 감독상 노미네이트작임에도 말이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변호사 중에서도 이에 문제를 느꼈다 전한 이가 여럿이었다.
OTT서비스가 영화를 볼 수 있는 가장 흔하고 강력한 창구로 굳어져 가는 상황에서 소외되는 작품에 대한 인식조차 거의 없는 상황을 나는 불편하게 여긴다. OTT서비스 내에서, 또 그 바깥에서 대중에게 더 쉽게 다가서는 작품과 그렇지 못한 영화 사이의 격차가 분명해진다. 조명 받는 작품이라 해서 마땅한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리를 잃어가는 영화라 해서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 우리를 나아지게 할 작품과의 연결점을 잃어버리고 있다. OTT가 가져온 편리함에도 그를 마냥 진보라 여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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