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영아처럼..." 연산군 주물렀던 장녹수의 실체
[김종성 기자]
후궁 장녹수는 폭군 연산군을 조종했다.
tvN 퓨전사극 <폭군의 셰프>에서 장녹수를 연상시키는 인물인 강목주(강한나 분)는 연희군(이채민 분)의 마음을 묶어놓기 위해 전전긍긍하지만,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 실제의 장녹수는 그런 단계를 뛰어넘었다.
지난달 31일 <폭군의 셰프> 제4회에서 강목주는 갑작스레 연희군의 곁을 독차지한 요리사 연지영(임윤아 분)을 몰아낼 목적으로 대왕대비(서이숙 분)를 움직인다. 연지영은 타임슬립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건너갔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에게는 의문과 경계의 대상이다.
강목주는 대왕대비가 주최하는 요리 경연에서 연지영이 탈락해 처벌을 받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연지영이 뜻밖에도 대왕대비의 추억이 깃든 시금치 된장국을 만들어내는 바람에 강목주의 작전은 실패한다. 제3자를 개입시켜 연지영과 연산군을 떼어놓으려 했던 시도는 보기 좋게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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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vN <폭군의 셰프> 관련 이미지. |
| ⓒ tvN |
이 기록에 사용된 젖먹이의 원문은 영아(嬰兒)다. 유아를 다루듯이 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영아를 다루듯이 연산군을 조종했던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폭군의 셰프> 속의 강목주는 상당히 점잖은 편이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5촌 당숙인 제안대군의 노비였다. 제안대군의 노비와 결혼해 자녀를 낳은 장녹수는 운평(運平)과 흥청의 단계를 밟아 연산군을 만났다.
연산군은 관청에 속한 공노비 중에서 춤과 음악을 잘하는 기생들을 운평으로 선발했다. 사노비가 아니라 국가 소속의 공노비였던 장녹수는 이런 운평의 일원으로 선발됐다. 연산군은 운평 중의 일부를 흥청으로 선발하고 궁궐로 불러들였다. 장녹수는 이 단계도 통과했다.
장녹수는 노비이자 기생이고 연산군은 군주였지만, 이런 신분 차이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않았다. 이 사이에서는 장녹수의 개인적 특성이 훨씬 강하게 작용했다.
우선, 장녹수는 노래 실력이 대단했다. 위 <연산군일기>는 "노래를 잘해서 입술과 치아를 움직이지 않고도 그 소리가 청량하고 들을 만하다"고 평했다. 이 기록을 남긴 사관(士官)은 장녹수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 사관이 "들을 만하다"는 평을 남겼다. 장녹수의 팬이 기록을 남겼다면 훨씬 나은 평가가 나왔을 것이다.
장녹수는 연산군보다 인생 경험도 풍부했다. 1502년에 나온 위 기록은 장녹수가 "30여 세"였다고 말한다. 연산군은 1476년 생이다. 그래서 1502년에 26세였다. 이해에 장녹수가 서른을 넘겼다고 했으니, 연산군보다 대여섯 살 혹은 그 이상 많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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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vN <폭군의 셰프> 관련 이미지. |
| ⓒ tvN |
장녹수는 나이만 많은 게 아니라 결혼 경험도 풍부했다. "남편에게 시집가는 게 절제가 없었다"고 위의 <연산군일기>는 말한다. 이 기록에서 나타나듯이 장녹수는 결혼을 꽤 많이 했었다. 인생 경험과 더불어 이런 요인도 장녹수가 연산군을 가스라이팅하게 만든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연산군은 갓난아기 때 헤어진 친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장녹수는 모성애 결핍을 극복하지 못한 연산군을 애인처럼 다루기도 하고 젖먹이나 노비처럼 다루기도 했다. 연산군의 정서를 교묘히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연산군은 화가 많이 난 상태에서도 장녹수만 보면 금세 기뻐하며 웃었다고 한다.
연산군 12년 9월 2일자(1506.9.18.)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매료된 시점은 음력으로 임술년 이후다. 임술년 1월 1일인 양력 1502년 2월 7일 이후였던 것이다.
1502년에 나온 위의 <연산군일기>에는 장녹수가 종4품 후궁인 숙원으로 표기돼 있다. 한편, 연산군 9년 12월 24일자(1504.1.11.) <연산군일기>는 이날 그가 종3품 숙용으로 승진했다고 알려준다. 1502년에 종4품이 되고 1504년 연초에 종3품이 됐던 것이다.
국정에 깊이 개입했던 장녹수
장녹수는 이런 승승장구를 거치면서 국정에도 깊이 개입했다. 조정의 인사 문제나 포상·징계·재판 등에도 끼어들었다. 그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왕족의 청탁을 받은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연산군 8년 8월 30일자(1502.9.30.) <연산군일기>는 왕실 종친인 남천군 이쟁이 노비 송사에서 승소하기 위해 장녹수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알려준다.
장녹수가 임금의 관심을 끈 것은 1502년 2월 7일 이후이고, 남천군의 뇌물공여가 실록에 기록된 것은 그해 9월이다. 장녹수의 권력장악 속도가 매우 빨랐음을 알 수 있다.
장녹수는 그렇게 획득한 권력을 세상을 괴롭히는 방식으로 휘둘렀다. 궁궐 밖에 마련된 자기 주택을 확장할 목적으로 그 주변의 민가들을 모조리 철거했다. 또 정부 소유의 선박을 이용해 평안도 미곡 7천 석을 거래했다. 대중의 사유재산을 침해하고 국가의 공공기물을 임의로 사용했던 것이다.
장녹수가 연산군을 만난 것은 연산군이 왕이 된 지 6년 뒤다. 이후 연산군은 중종반정이라는 쿠데타로 실각했다. 그 기간동안 장녹수는 연산군의 폭정을 거들면서 자신의 탐욕을 충족했다. 연산군 정권을 침몰시키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던 것이다.
예능인의 길을 걷기보다는 권력자가 되어 세상을 억압하는 쪽을 택한 장녹수는 결국 연산군 정권과 함께 몰락을 맞이했다. 중종이 즉위한 첫날의 상황을 기록한 중종 1년 9월 2일자(1506.9.18) <중종실록>은 장녹수가 "난(亂)의 근본"으로 지목돼 참수형에 처해졌다고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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