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반독재투쟁 선각, 의문사 당한 장준하 열사

김삼웅 2025. 9. 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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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열전 41] 아무도 믿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의문사였다.

[김삼웅 기자]

▲ 1983년 12월 24일, 개헌청원 서명운동 발표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에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선생
ⓒ 장준하기념사업회
일제강점기에는 광복군으로 일제와 싸우고, 해방 후에는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귀국하여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하고, 이승만 독재시대에는 월간 <사상계>를 창간하여 민주주의 교육과 민권투쟁에 나서고, 박정희 군부독재 시대에는 펜을 던지고 거리에 나서서 민주회복과 민족통일운동에 앞장섰다.

산행 길에 '실족사'라는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난 장준하 열사는 광복군 출신으로서 일본군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과 줄기차게 싸우다가 의문사를 당하고, 이장 과정에서 드러난 유골에서는 두개골이 예리한 망치 같은 것으로 함몰된 흔적이 확인되었지만, 여전히 사인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장준하 열사는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청계동에서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개명한 할아버지는 의주에 양성학교라는 사립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고, 아버지는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사에 교목(校牧), 그리고 교회 목사가 되었다.

14세에 삭주에서 대관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가족이 삭주로 이사를 하여 대관보통학교 5학년에 입학하여 2년 만에 졸업하고, 숭실중학교에 이어 선천읍에 있는 신성중학교로 전학하였다.

선천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정주 신안소학교 교사로 3년 동안 근무하고,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일제는 1943년 조선인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지원병제를 실시했다. 말이 지원병제이지 반강제로 지원케하는 징병제 실시의 전단계였다.

장준하는 1943년 11월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일본군 입대를 피하기 어렵다는 것과, 고향에서 아버지가 신사참배 거부로 신성중학교에서 쫓겨났다가 3년 후 겨우 삭주의 대관교회 목사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자신이 지원을 기피했을 경우 가족이 당할 불행은 뻔한 것이었다.

귀국하여 신안소학교 시절 하숙집 딸인 김희숙과 결혼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젊은 여성들을 일본군 위안부나 일본 공장으로 끌고가고 있어서, 김희숙의 아버지가 중국으로 망명한 터여서 일본군에 끌려갈 공산이 높았기 때문이다.

일본군에 입대하여 국내에서 훈련을 마치고 중국 강소성의 서주에 있는 부대에 도착하여 3개월 정도 현지 훈련을 받고 츠카다부대로 전출되었다. 장준하는 4명의 동지와 함께 일본군을 탈출, 천신만고 끝에 중경 임시정부에 도착했다. 장준하 열사는 광복군에 편입되어 <등불>과 <제단> 등의 광복군 잡지를 만들고,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국내진공 선발대로 뽑혀 이범석·김준엽 등 한국군 4명, 미군 18명과 함께 8월 18일 서안비행장을 떠나 C-46 수송기편으로 서울 여의도 공항에 도착했다.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서였다.

해방 3개월 만인 11월 23일 상해를 거쳐 귀국했다. 장준하도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등 15명과 함께 1진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김구 주석의 비서 일을 맡아 격동기 해방정국에서 활동했다.
 <사상계>가 복간된다. 1950 ~ 1960년대 대표적 지식공론장이었던 <사상계>가 故 장준하 선생의 뜻을 받들어 문명을 전환하고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종합지로 거듭날 예정이다. 사진은 복간될 <사상계> 표지
ⓒ 윤종은
그의 생애에서 큰 전환점이 된 것은 1952년 9월 피난수도 부산에서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사상(思想)>에 참여한 일이다. 정부가 공산주의와 싸우는 시점에서 국민의 민주주의의 사상적인 이념을 진착시키기 위해 낸 잡지였다.

장준하는 <사상>이 폐간되면서 이 잡지를 편집 기획했던 경험과 중경에서 발행했던 <제단> 등의 정신을 되살려 1953년 4월 사상계사를 설립하고 월간 <사상계>를 발행했다. 거의 혼자서 창간호를 펴낸 것이다.

장준하는 <사상계>를 발행하면서 이승만 독재와 횡포를 비판하고, 민족사의 전통과 서구 민주주의 사상의 연구·전파에 심혈을 기울였다. 1950년대에 이어 60년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이 잡지는 필독서가 되었다. 값진 논문과 매서운 시론이 실리고, 특히 함석헌 등의 글이 실릴 때는 책이 불티나게 팔렸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과 유혹이 많았으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박정희의 5.16쿠데타는 장준하의 <사상계>와 운명적인 대척점을 이루었다. 5.16 이후 처음으로 나온 1961년 6월호에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에서 중앙정보부가 문제 삼은 것을 필두로 저항·비판과 탄압의 등식이 이루어졌다.

장준하는 특히 1964,5년 박정희의 굴욕적인 한일회담 추진을 세차게 비판하고 직접 대중강연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했다. 자신이 광복군으로 일제와 싸울 때,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로서, 결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자격도,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할 자격도 없다는 주장이었다.

장준하의 날 선 비판에 정부는 <사상계>사에 세무조사를 비롯하여 전국의 서점에 압력을 넣어 판매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견디다 못해 그는 제7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서울 동대문 을구에서 당선되었다. 이에 앞서 삼성재벌의 사카린 밀수규탄 집회에서 박 대통령이 '밀수왕초'라고 비판했다가 구속되었다. 장준하는 옥중에서 당선된 것이다.

1972년 유신쿠데타는 또 한번 장 열사의 생애에 변곡점이 되었다. 장준하에게 박정희의 영구집권 야욕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일본군 출신이 5.16쿠데타에 이어 10년 이상을 집권하고, 그것도 모자라 종신집권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면서 유신을 선포한 것이다.

장준하는 재야 민주인사들과 민주수호국민회의를 조직하여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던 중 유신쿠데타를 맞았다. 신민당 유진산 당수 체제의 미온적인 노선에 불만을 갖고, 탈당하여 양일동 등과 민주통일당을 창당하고 최고위원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유신 정권의 탄압으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는 등 좌절을 겪었다.

박정희의 권력욕망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학생·재야·시민들의 유신헌법 개정운동을 정부는 대통령 긴급조치를 선포하면서 봉쇄했다. 장준하는 1972년 12월 24일 함석헌·천관우·백기완 등과 각계 인사 30명이 서명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본부를 결성했다. 그리고 서명운동을 시작하여 광범위한 국민의 서명을 받았다.

박정권은 개헌청원운동을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장준하와 백기완을 구속하고, 군법회의에 넘겼다. 1심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도 똑같은 형량이 선고된 데 이어 대법원 형사부는 상고를 기각하여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이 선고 확정되었다.

장준하 열사는 감옥에서 심한 병환에 시달렸다. 심장과 간경화 증세가 악화된 것이다. 추운 날씨에 1년여 동안 구속상태의 재판과 옥고가 건강을 크게 해친 것이다. 박 정권은 연말에 장준하를 구속정지 형태로 석방했다.

장준하에게 '운명의 해'가 되는 1975년이 되었다. 1월 8일 박 대통령에게 장문의 공개서한을 보냈다. 강연도, 언론사 기고나 인터뷰도 철저하게 막힌 상태여서 '공개서한'을 택한 것이다. 요지를 들어보자.

"국헌을 준수한다고 서약한 귀하 스스로가 그 선서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헌법기관의 권능을 정지시키고, 헌법제정권력의 주체인 국민을 강압적인 계엄하에 묶어놓고 '국민투표'라는 요식행위를 통해 제정한 소위 '유신헌법'으로 명실상부하게 귀하의 1인 독재 체제만을 확립시켰습니다."
▲ 명동성당에서 열린 장준하 선생의 영결식 장면 1975년 8월 2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엄수된 장준하 선생의 영결식 장면, 이날 영결식에는 미망인 김희숙 여사와 3남 2녀 등 유가족과 백낙준, 유진오, 김영삼, 김대중, 박순천, 함석헌, 양일동, 김홍일, 김준엽 선생, 그리고 평소 고인을 따르던 시민 등 1천 5백여 명이 참례했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장준하 열사는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가끔 산에 올라가 울연한 마음을 달랬다. 1975년 8월 17일, 꼭 30년 전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위해 광복군 장교의 신분으로 국내에 들어왔던 그날,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사고지점은 경사 75도, 높이 12미터의 가파른 암벽이었다. 직업 알피니스트가 아니면 감히 내려올 수 없는 바위를 타고 내려오다가 추락했다고, 정체가 의심되는 동행인이 증언했다. 아무도 믿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의문사였다.

의문사를 당하기 전에 모종의 결단을 준비하고 있었던 사실이 사후에 밝혀졌다. 중경 임시정부 청사에 걸렸던 태극기를 대학 박물관에 기증하고, 부모님 묘소를 찾아 때 이른 벌초와 성묘를 하고, 김대중·함석헌·홍남순 등 재야민주인사들을 은밀히 만났다. 이들과의 만남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박정희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적인 국민저항운동이 아니겠는가 추론이다.

정부는 1991년 8월 15일 장준하 열사의 영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전집이 간행되고 기념사업회가 구성되었다. 2025년 봄 장남 장호권 씨에 의해 <사상계>가 복간되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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