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한달 30만원 받는 노인과 500만원 버는 노인, 정부는 누구 편인가

고현종 2025. 9. 5.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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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종 기자]

 2023년 12월 13일 서울 마포구청에서 열린 '2023 마포구 노인 일자리 박람회'에서 한 노인이 구직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다.
ⓒ 연합뉴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79세 이순자(가명)님이 종로 고시원을 나선다. 홀로 사는 그의 한 달 수입은 기초연금 30만 원이 전부다. 젊은 시절 삯바느질로 자녀를 키웠다. 국민연금이란 제도는 그림자도 몰랐다. 수급자 600만 명 시대라지만, 그 안에는 이렇게 한 푼도 받지 못하는 노인도 많다.

이순자님은 교회에서 나눠주는 쌀 한 포대로 한 달을 버티고, 병원비가 나가면 라면으로만 끼니를 잇는다. "나도 나이 들어서 일 못 하게 되면 나라에서 좀 도와준다고 하던데, 그게 연금인 줄은 몰랐어." 그의 목소리에는 서러움이 묻어난다.

같은 날 오후, 강남 논현동의 한 카페. 66세 최아무개씨는 정장을 차려입고 노트북을 펴놓은 채 상담을 한다. 은행 지점장 출신인 그는 퇴직 후에도 금융 컨설팅으로 월 500만 원을 벌고, 국민연금 140만 원까지 합쳐 한 달 640만 원을 손에 쥔다. 소득으로 인해 일부 연금이 감액되는 것에 그는 불만을 터뜨린다.

"국민연금은 내가 30년 넘게 성실히 낸 돈으로 모아둔 것인데, 나이 들어서도 열심히 일한다고 왜 받을 돈을 빼가는 거야? 불합리하잖아." 두 개의 노후, 두 개의 현실. 그런데 정부가 귀 기울인 쪽은 누구였을까.

상위 2%를 위한 선택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월 1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정기획위원회 국민보고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재명 정부는 최씨의 목소리에 응답했다. 지난 8월 19일 국정기획위원회는 소득 활동 감액 기준을 월 309만 원에서 509만 원으로 대폭 완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순자님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기초연금 30만 원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고, 노인 일자리에 참여해도 월 30만 원 남짓 추가 소득이 전부다.

그러나 월 400만 원 이상의 소득자는 감액을 면할 수 있게 됐다. 월 400만 원부터 600만 원까지의 소득자는 감액을 면하고, 그 이상 고소득자 역시 감액 크기가 줄어들게 된다. (참고로 당초 소득활동 감액 기준이었던 309만 원은 근로소득공제 후 금액에 해당된다. 공제 전 금액은 약 411만 원이다. 월 509만 원 소득의 근로소득공제 전 금액은 약 621만 원이다. - 편집자 말)

이 정책으로 인해 혜택을 받는 고소득자는 600만 명의 노령연금 수급자 중 단 14만 명, 2.3%에 불과하다. 연금을 받으면서도 월 411만 원 이상을 버는 최상위 소득자들인 셈이다. 감액 규모도 대부분 5만 원에서 10만 원 내외다.

극심한 수급액 격차

2023년 기준 국민연금 평균 수급액은 월 62만 원이지만, 하위 20%는 30만 원대, 상위 20%는 100만 원 이상을 받는다. 고용이 안정된 이들일수록 오래 가입해 더 많은 혜택을 받는 구조다. 국민연금이 빈곤을 줄이기는커녕 노인 내부 불평등을 확대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소득 활동 감액은 이런 불균형을 조금이라도 바로잡으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그런데 정부는 이마저 "불합리하다"라며 풀어버리려 한다.

더 뼈아픈 것은 이것이 더불어민주당 정부의 선택이라는 점이다. 김대중 정부는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을 제정해 빈곤층의 생존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했다. 노무현 정부는 장기 요양 보험을 도입해 돌봄을 사회화했다. 두 정부 모두 사회적 약자를 우선하는 정책 기조를 견지했다. 이재명 정부는 이번 조치는 기존 정책 기조와의 단절로 읽힌다.

1천억 원,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

이번 조치로 국민연금 지출은 매년 1천억 원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초연금을 인상하거나 공익활동형 노인 일자리를 새로 만들 수 있다. 치매 돌봄 바우처를 10만 명에게 연간 100만 원씩 제공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필요 기반 접근'이다. 가장 절박한 곳부터 우선 지원하는 것, 그것이 사회보험의 정신이다.

국민연금의 본래 목적은 노후 빈곤 방지와 사회적 연대였다. 모든 국민이 힘을 모아 서로의 노후를 책임지자는 약속이었다. 정부의 이번 선택은 그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하고, 이미 넉넉한 이들에게 더 많이 주겠다는 선언이다. 정부에 묻는다. 이것이 정말 김대중·노무현이 꿈꿨던 나라인가? 1천억 원의 소중한 재정을 진짜 필요한 곳에 써야 하지 않겠는가?

사회적 약자를 우선하는 정책 기조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오늘의 잘못된 선택이 내일 더 큰 불평등의 씨앗이 될까 두렵다.

내일도 이순자님은 30만 원으로 한 달을 버텨야 한다. 어디선가 또 다른 어르신은 폐지를 주우며 새벽 어둠 속에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그들의 굽은 등과 거친 손이 새벽 공기처럼 차갑게 우리 가슴을 파고든다. 과연 우리는 누구의 노후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새벽이 오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 국민연금이 잃어버린 길을 찾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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