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 집에서 죽은 고모, 반 세기 지나 추적한 조카
김성호 평론가
또 한 여성이 죽었다. 1일 일본 도쿄에서 40대 여성이 30살 한국인 남성 박모씨에게 살해당했다.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이다. 바로 며칠 전 그녀가 직접 일본 현지 경찰에 신고까지 했던 것이다. 둘은 애인 관계였다. 한국에서 찾아온 그가 그녀의 집에 머물며 폭력을 행사했다고 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박씨에게 접근금지 경고 처분까지 했으나 그가 며칠 뒤 다시 돌아와 범행에 이른 걸 막지 못했다. 무엇을 더 했어야 할까. 제 일을 그만두고,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을까. 신고 이상의 어떤 조치를 해야 그로부터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차마 무엇이라 답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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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양 스틸컷 |
| ⓒ 한국독립영화협회 |
<양양>은 제224회 독립영화 쇼케이스 상영작으로 선정돼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지난달 일반에 상영한 작품이다. 양주연 감독의 77분짜리 장편 다큐로, 지난해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돼 세 차례 선보이며 주목받기도 했다. 일생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여겨온 다큐 감독 양주연이 제 가족사 가운데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연이 자리한단 걸 알게 되고, 이를 파헤치는 이야기다. 사적다큐가 공적문제와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는 과정이 인상적인 영화로, 지난 시대 한국의 여성 일반이 마주했던 부당한 압제와 폭력의 민낯을 자연스레 내보인다.
영화는 어느 겨울밤, 아버지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부터 비롯됐다. 주연의 아버지는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제 딸에게 "고모처럼은 되지 말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제게 고모가 있었던가? 주연은 그날 40년 전 자살한 고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어째서 주연은 제게 고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가. 그것이 이 영화 <양양>의 출발이 된다.
영화는 주연이 고모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을 뒤따른다. 존재조차 몰랐던 고모다. 그를 찾아갈 수 있는 단서는 역시 제 아버지일 밖에 없다. 술에 취하여 제게 고모의 존재를 알려주었던 아버지를 설득해 카메라 앞에 앉히고, 또 어머니의 이야기도 듣는다. 그렇게 마주하는 진실은 고모의 죽음이 가족에 의해 완전히 은폐되었다는 사실, 또 가족 중 누구도 그 죽음 아래 깔린 이야기를 충실히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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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양 스틸컷 |
| ⓒ 한국독립영화협회 |
아버지가 전해준 이야기는 고모의 죽음에 얽힌 직접적 단서보다는 간접적 배경에 대한 것들이다. 아버지와 고모의 아버지, 그러니까 감독의 할아버지는 철도공무원이었다. 살기 팍팍했던 그 시절, 공무원의 부족한 봉급으로 여러 자식들을 책임져야 했던 그는 그 무거운 짐을 묵묵히 감내하며 자식들을 잘 키워낸 흔하지만 성실한 가장이었다. 공부를 곧잘 했던 고모와 그 동생인 아버지까지 모두 대학교에 보낸 건 당시 평균을 고려하면 대단한 성취라 해도 좋을 것이었다.
가장의 무게를 훌륭히 감당해온 할아버지는 한편으로는 가부장적 인물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팠던 고모가 마음을 접고 집에서 그나마 가까운 광주의 조선대학교에 진학한 건 할아버지의 강요 때문이었다. 딸은 멀리 보낼 수 없다는 할아버지의 지침이 고모에겐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됐다. 감히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던 그 시절이다. 그러나 불만까지 사그라질 수 있었을까. 주연의 아버지는 누나의 죽음 이면에 이 같은 억압이 있었으리라고 짐작한다.
<양양>이 흥미로워지는 건 이 지점으로부터다. 그저 현실에 대한 불만족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던 고모의 죽음 이면에 가족이 제대로 알지 못했던 끔찍한 진실이 있다는 걸 영화가 다가서서 확인하는 것이다. 주연에게 연락이 닿은 고모의 고등학교 친구들은 그녀들이 기억하는 고모의 성격과 당시의 관심, 죽음을 둘러싼 내밀한 이야기까지를 전해준다. 수십 년 묻혀 있던 진실에 다가서는 이 영화의 걸음은 적어도 러닝타임 절반에 이르기까지는 거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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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양 스틸컷 |
| ⓒ 한국독립영화협회 |
고모와 가까웠던 고등학교 동창은 그 죽음에 얽힌 사연 또한 알고 있다. 고모의 죽음 뒤 할머니가 제 딸의 단짝 친구를 찾아와선 종종 울고 돌아가는 일이 있었다고 했을 만큼, 그 죽음을 남다르게 겪어낸 친구다. 영화는 그녀가 말해준 진실, 고모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사연을 차츰 풀어주기 시작한다.
대학교에서 고모는 좋지 않은 남자를 만났다 했다. 고모의 친구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수배를 당하고 몰래 숨어든 인물이라고 그를 떠올린다. 그가 고모를 의심하고 통제해 수시로 싸웠다는 이야기를 고모의 친구가 전해준다. 고모는 그와 헤어지고 싶어 했다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모가 그 시절 읽었던 시집에 밑줄 쳐진 시구들은 그 당시 복잡했던 그녀의 심경을 짐작하게끔 한다. 오늘날 가스라이팅이라 불리는 심리적 장악이 이뤄졌을까. 둘 사이의 문제를 한참 시간이 지난 오늘 되짚는 일의 한계는 명백하다. 분명한 건 고모가 그와의 관계로부터 음독에 이르렀다는 사실, 또 그녀가 그의 자취방에서 발견됐다는 것이다. 그녀가 병원으로 옮겨졌을 땐 이미 늦어버렸다고 했다.
고모의 죽음을 추적하고 가려진 존재를 복원해나가던 <양양>은 그 죽음 앞에서 선택과 마주한다. 고모가 그저 자발적 선택으로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니란 게 명확해지는 가운데, 끝까지 추적해 범인 앞에 이를 것인가, 아니면 고모의 존재를 복원하고 이해에 다가설 것인가가 두 갈래 길로 나뉘는 때문이다. 영화가 택하는 건 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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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양 독립영화 쇼케이스 포스터 |
| ⓒ 한국독립영화협회 |
제목인 '양양'은 두 양씨 여성, 즉 감독 주연과 죽은 고모의 연결을 뜻한다. 양씨 가문의 두 딸이 겪어내야 했던 차별, 저들의 존재를 은근히 밀어내는 부당한 힘의 작용에 대응한 연대를 그린다. 고모는 이미 죽고 주연은 이제야 그 존재를 알았으나, 그녀는 수면 아래 잠긴 고모의 존재를 이끌어 수면 위로 끌어올려 복원해내는 것이다. 그 마땅한 자리를 양씨 사내들이 아닌 은근히 무시당하는 딸 주연이 해내는 모습은 그래서 저항적이고 통쾌하기까지 하다.
다만 영화가 다소 모호한 귀결로 다가서는 듯 느껴지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누나와 남동생 사이의 차별, 세대를 건너 답습되는 성차별적 규범에 대한 문제의식은 고모의 죽음이며 데이트 폭력 문제와 명확하게 엮여들지 않고 나열되는 수준으로 펼쳐질 뿐이다. 영화의 귀결이 되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 또한 이 영화의 주제와 긴밀히 조응하지 못한다. 가족 안에서 고모의 자리를 복원한 선택이 어떠한 차이를 빚었는지도 드러나지 않는다. 여러모로 한 편의 영화로 완성도가 높다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양>은 유효하다. 끝까지 파고들어 고모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를 카메라 앞에 세우길 포기하였을지라도, 그 죽음과 여성 일반에 대한 억압 사이의 관계를 명징하게 연결 짓지 못했을지라도 그렇다. 주연의 고모와 마찬가지로 가까운 남자에게 죽는 여자들의 존재가 끊이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 사회는 마치 고모의 존재를 지워버린 양씨 사람들처럼 그녀들 하나하나를 개별적 죽음으로 밀어두고서 함께 보지 않으려 든다.
16년 간 죽은 1560명의 여성들이 그렇게 개별적 죽음으로 지워져갔다. 다음 죽음도 그렇게 다뤄진다면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이 모두가 게으르고 비겁하며 그릇된 태도의 결과란 걸 영화 <양양>이 돌아보도록 한다. 어쩌면 그 죽음 아래 감춰진 진실이, 나태와 비겁과 책임의 방기가 자리하고 있으리란 의심을 품도록 한다. 나는 그것으로 이 영화가 역할을 다 해냈다고 믿는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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