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하나로 의생활을 바꿔 놓은 사람

문운주 2025. 9. 5. 16:3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산청 여행 ③] 문익점 유허비에서 묘지까지, 목화로 읽는 역사와 추억

[문운주 기자]

▲ 목화밭 산청 단성면 사월리에 남아 있는 목화밭. 600여 년 전 문익점이 심은 씨앗에서 비롯된 생활혁명의 상징이다
ⓒ 문운주
▲ 목화 남사 예담촌 어느 카페에 전시되어 있는 목화
ⓒ 문운주
8월 22일 오후 4시, 발걸음은 남사예담촌에서 단성면 사월리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고려 말 문익점이 목화씨를 처음 심었던 목화시배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번 탐방은 단순한 유적지 답사가 아니라, 세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목화 재배와 면직물 생산 과정을 다시 떠올리는 여정이다.

어릴 적, 하천 건너편에는 목화밭이 있었다. 여름이면 푸른 잎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가을이면 하얀 솜송이가 톡톡 터져 나왔다. 수확한 목화송이는 마당 가득 널어 햇살에 말렸다. 반짝이는 흰빛은 마치 눈이 내려앉은 듯했다. 그 보송보송한 솜을 얼굴에 붙이며 장난을 치곤 했다.

겨울밤이 되면 방 안에서는 물레가 돌아갔다. 솜은 '드르륵' 소리를 내며 길게 실로 뽑혀 나오고, 실타래는 베틀에 걸려 천으로 짜였다. 그렇게 지은 천과 솜이불은 집안의 보물이자 아이들에게 따뜻한 겨울을 보장하는 생명줄이었다.

딸을 시집보낼 때면 어른들은 정성껏 만든 솜이불을 혼수에 넣었다. 그것은 단순한 살림살이가 아니라 부모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선물이었다. 포근하고 따뜻하면서도 숨이 잘 통해 답답하지 않았다. 몇 해를 덮어도 그 포근함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이처럼 목화는 어린 날의 추억이자 집안의 삶을 지탱해 주는 고마운 작물이지만, 그 시작은 아주 먼 옛날 한 사람의 손끝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의 기억 속 목화밭이 사적인 추억이라면, 씨앗을 들여와 나라의 의생활을 바꾼 일은 공동체의 역사다. 그 뿌리를 더듬어 목화시배지를 찾는다.
▲ 문익점 유허비 작은 씨앗이 한 나라의 의생활을 바꾼 역사의 출발을 전하는 기념비
ⓒ 문운주
▲ 베짜기 목화시배지 전시관에 설치된 조형물
ⓒ 문운주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문익점 유허비다. 원나라 사행길에서 돌아오며 목화씨를 가져와 고향에 심은 그의 업적을 전하는 비석이다. 겉으로는 소박한 돌비지만, 작은 씨앗 하나가 한 사회의 의생활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이어 제1·제2 전시관을 둘러본다. 씨앗에서 솜, 실, 천으로 이어지는 목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물레(가락바퀴)와 베틀은 이제 낯선 물건이 되었지만,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전시는 단순한 관람을 넘어 생활사를 몸소 체험하는 자리처럼 다가온다.
▲ 문익점문익점효자비 모친을 잃은 뒤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지내던 효성이 전해져 세워진 기념비다
ⓒ 문운주
▲ '효자리' 비석 고려 1383년(우왕 9년)에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면서 비를 세우고, 마을 이름을 효자리라 하였다.
ⓒ 문운주
▲ 도천서원 조선 세조 7년(1461)에 세워져 정조 11년(1787)에 ‘도천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았다.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75년에 삼우사가 세워지며 복원되었다. 서원은 앞쪽에 강당과 동·서재, 뒤쪽에 사당이 있는 전학후묘 구조이며, 내·외삼문과 제사 때 관리들의 숙소로 쓰인 신안사재가 함께 남아 있다.
ⓒ 문운주
조금 더 걸으면 문익점 효자비가 나온다. 목화를 들여온 인물로 잘 알려진 문익점은 효심 또한 깊어 시묘살이를 했다고 전한다. 그의 효행은 왜구들조차 감탄해 범하지 않았다고 한다. 왕의 명으로 효자비가 세워졌다. 배양마을이 '효자리'라 불리기도 한다.

이후 만나는 목화밭은 한때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여름에는 푸른 잎이, 가을에는 하얀 솜송이가 터져 나와 사라진 기억을 되살린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목화밭은 세대의 기억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마지막은 문익점 생가 복원 예정지다. 아직은 안내 표지만 서 있지만, 복원이 이루어지면 그의 삶의 터전을 직접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한 건물 복원을 넘어, 후대에 그의 정신을 전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발걸음은 도천서원으로 이어진다. 문익점과 후손들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고즈넉한 마당과 오래된 기와 아래 서 있으니, 목화시배지에서 느낀 생활 혁신의 의미가 학문적 전통과 겹쳐진다. 문익점은 단순히 목화씨를 들여온 사람이 아니라 학문과 도덕을 겸비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그의 묘지는 산자락에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다. 백성들의 생활을 바꾼 인물답게 화려하지 않고 담백한 기품을 지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풀꽃이 묘비를 감싸며 고요한 울림을 전한다.

문익점 유허비에서 시작해 전시관, 효자비, 목화밭, 생가 예정지, 도천서원, 그리고 묘지까지 이어지는 이번 탐방은 씨앗 하나가 한 나라의 의생활을 어떻게 바꾸는지 확인하는 길이다. 동시에 효심과 학문, 그리고 민본의 정신을 실천한 한 인물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