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쓸모 없는 사람'이란 인식, 질병으로 드러난 불평등"
진주여성민우회는 경상국립대학교 여성연구소, 사회학과, 사회과학연구원 젠더지역미래센터, 단디뉴스와 함께 ‘모두를 위한 성평등’ 강연을 공동 기획했다. 이번 강연은 질병, 과학, 미술, 대중문화 등 총 10개 분야를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다루며, 성평등의 가치를 다각적으로 탐구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기자말>
[김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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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조한진희 작가가 '질병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
| ⓒ 단디뉴스 |
지난 8월 29일 경상국립대 사회과학대학에서 열린 '모두를 위한 성평등' 강연에서 조한진희 작가는 강의를 열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픈 몸으로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질병과 페미니즘'을 풀어내며 청중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제가 페미니스트가 되기 전과 후를 비교해 보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진 걸 느낍니다. 예를 들어 화장실이 몇 개 있는지, 지하철 손잡이 높이, 버스 좌석 간격 등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던 것들이 달라 보이기 시작하죠.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이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불편함과 구조적인 문제들이 훤히 보입니다.
조금 다른 예를 들어볼게요. 혹시 다리를 골절한 적 있으신가요? 평소에는 내 다리로 걷고 뛰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다리를 다치고 나면 계단의 단차나 집 욕실의 높이 같은 것들이 훨씬 크게 느껴집니다. 욕실은 물 문제 때문에 5~10cm 정도 단차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건강할 땐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부상을 입고 깁스를 하거나 인대가 파열되면 생생하게 느껴지죠.
저 역시 몸이 아픈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서, 이전과 완전히 다른 세상을 경험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질병권', '돌봄권', '삶의 권리' 같은 주제들을 더 깊이 고민하게 되었죠.
강의를 시작할 때 저는 항상 '내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먼저 말씀드려요. 페미니즘에서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은 없다고 강조하거든요. 각자의 위치에서 보는 진실이 있을 뿐, 그것이 곧 보편적 사실이나 절대적 진리는 아니라는 거죠.
페미니즘은 우리가 익숙하게 믿어왔던 '진리'에 균열을 내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 왔습니다. 저도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할 때, 지금 제가 어떤 위치와 배경에서 이야기하는지 먼저 알려드리려고 해요. 제 주장들은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나온 것이고,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운동권에서 '아픈 몸'이 된 경험
조한진희 작가는 1990년대 학생운동과 한국여성민우회 노동팀에서 상근 활동을 시작으로 팔레스타인 연대, 장애인권 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의 현장에서 활동해왔다. 그는 팔레스타인연대 활동 과정에서 건강이 손상됐고, 아픈 몸으로 살다보니 세상을 완전히 다시 읽고 다르게 경험하게 됐다고 말했다.
"몸이 아프면 늘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어요. 동료들 사이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죠. 하지만 바로 그 경험 때문에 아픈 몸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다시 묻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지금은 점점 변화하고 있지만 15년 전만 해도 건강한 남성 노동자를 기준으로 짜인 운동 현장은 아픈 몸을 환영하지 않았다"며 "아픈 몸은 늘 '뒤처지는 존재', '열외된 사람'으로 여겨졌다"고 덧붙였다.
아픈 몸에 덧씌워진 '게으름'과 '꾀병'
강연에서 조한 작가는 가사노동, 돌봄, 의료 현장에서 여성과 아픈 몸이 어떤 차별을 겪는지 구체적으로 짚었다.
"여성은 아파도 집안일과 돌봄을 멈출 수 없다는 전제가 늘 따라붙습니다. 가사노동은 무급이고, 돌봄은 '의무'로 여겨지니 아프면 아플수록 죄책감이 쌓입니다."
그는 또 "여성이 겪는 통증이나 질병은 종종 '꾀병'으로 치부된다"며 "의료 연구 역시 남성을 표준으로 삼고 여성을 예외 취급해 왔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의학 연구에서 여성 환자는 임상시험 단계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고, 여성 특유의 증상은 '정신적 문제'로 치환되는 일이 빈번했다는 것이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그는 2019년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펴내며 질병을 사회적 문제로 바라보자는 문제의식을 확장했다. 책에는 투병 과정에서 겪은 차별뿐 아니라, 질병을 둘러싼 사회적 낙인, 불평등한 건강권 문제 등이 담겨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립니다. 하지만 질병의 상당 부분은 환경, 노동 조건, 사회적 불평등과 깊이 연결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병은 개인의 탓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문제입니다."
그는 질병을 겪는 사람들이 느끼는 고립과 자기책임론을 넘어, 사회적 연대와 제도적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픈 몸과 페미니즘의 만남
조한진희 작가는 강연을 마무리하며 페미니즘의 역할을 다시 강조했다.
"페미니즘은 나 자신을 지키는 힘이자, 차별과 억압을 바꾸는 사회적 힘입니다. 아픈 몸이 겪는 차별과 불평등을 드러내는 것은 결국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일입니다."
이날 강연은 단순히 '질병과 여성'의 문제를 넘어, 사회가 어떤 몸을 정상으로 여기고 어떤 몸을 배제해왔는지를 성찰하게 만들었다.
강연에 함께 한 김희경씨는 "내가 겪어온 아픔이 개인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일 수 있다는 말이 위로가 됐다"고 소감을 전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단디뉴스에도 실립니다. 진주시는 모두를 위한 성평등 강의 폐지 민원이 들어오자 강의 시작 하루 전 교부금 지원을 취소했습니다. 그럼에도 진주 민우회는 진주시의 교부금 없이 강연을 그대로 이어갑니다. 모두를 위한 성평등이 끝까지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ehCfO_Xzpu_KqNTWvnGtTXfp-wnLD1Xa6IBI4RFI5Fq7jhIw/view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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