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출근, 새벽 4시 퇴근... 스스로를 증명해온 인생

신정임 2025. 9. 5.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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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의 열전] 아홉수마다 도전해온 노동자, 용석정씨

[신정임 기자]

 윤숙이 밝아서 좋았다는 석정. 두 사람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결혼이 아닌 보통 부부로서 30년 가까이 살아왔다. 화가이자 배우 정은혜씨의 결혼식에서.
ⓒ 용석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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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차 노동자, 용석정씨 https://omn.kr/2f7jy

여행의 종착지인 서울에 와서 인사동에 갔다. 우연히 들어간 찻집, 다경향실에서 차향에 빠져들었다. '알바'를 자처하면서 다도교육을 함께 들었다. 계속 있고 싶었지만 다시 봉제공장으로 돌아갔다. 돈을 벌기 위해서. 열다섯 때 9만 원이던 봉제노동자 월급이 6년이 흘러 30만 원으로 올라 있었다. 돈은 벌어도 갑갑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설악산에서, 또 자전거여행으로 자유를 맛본 뒤여서 더욱 더 공장생활이 답답하게 느껴지던 차. <한겨레> 구석에 있는 작은 광고가 석정의 눈에 들어왔다. 뇌성마비복지관 청년모임인 '어우러기'의 자원봉사자 모집광고였다. 평소 화내는 일이 별로 없는 그가 욱하는 때가 있다. 바로 장애인을 비하하거나 놀리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다.

"부모님 두 분이 장애인이어서 그런지 그런 이야기는 못 참겠더라고요. 어려서는 그런 사람들한테 덤벼들다가 맞은 적도 많아요."

그런 그여서 어우러기 광고가 더 크게 보였나 보다. 바로 연락을 해 회원이 됐다. 어우러기에선 두 달에 한 번씩 뇌성마비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야구장, 놀이공원 등으로 나들이를 갔다. 그곳에서 스물셋 동갑인 조윤숙을 만났다. 어떤 모습에 반했냐고 물으니 석정이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톤을 올렸다.

"다른 뇌성마비 장애인들과 달리 그 사람은 되게 밝았어요. 장모님이 한때 전국 보험왕이셨대요. 장애인학교 중 제일 좋은 데로 보내고 장인어른이 공주처럼 키웠대요. 그래서인지 엄청 밝고 똑똑해요. 책도 많이 읽어서 언어수준도 남달랐고요."

어려서는 유복했지만 10대를 거치면서 여인숙을 전전할 정도로 살림이 어려워졌다는데도 윤숙은 특유의 낙천성을 잃지 않았다. 석정은 그 모습에 끌렸고 어느 순간 둘은 연애를 하고 있었다. 둘이 함께 간 첫 여행을 잊을 수 없다. 1996년 9월이었다. 강릉으로 바다를 보러가기로 했는데 북에서 무장공비 20여 명이 내려왔던 것. 군과 경이 길목마다 막아서는 바람에 당일치기가 갑자기 1박2일 여행이 돼 버렸다. 여행을 다녀오고 얼마 뒤부터 두 사람은 한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여 뒤 아들, 지호가 부부에게 찾아왔다.

동경하던 정치인을 돕기도 했지만...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석정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난다. 정치계였다. 다경향실에서 알게 된 지인으로부터 서울 종로구로 출마한 노무현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석정에게 노무현은 연예인과 같은 존재였다. 열다섯 살이던 1988년 12월, TV뉴스에 초선 국회의원 노무현이 나왔다. 현대중공업 파업현장에서 "파업은 정당하다"고 연설하는 모습을 보고선 "저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런 정치인을 돕는 일이니 흔쾌히 응했다.

자원봉사를 하며 열심히 도왔지만 결과는 낙선. 이명박에게 진 노무현은 부산으로 내려가고 그를 따르던 참모진은 남았다. 석정도 함께. 서갑원, 이광재, 안희정이 창신동 골목에 '소꿉동무와 친구들'이란 카페를 열었고, 석정은 주방보조가 됐다. 김치볶음밥에 들어갈 양파를 썰면서 요리를 배웠다. 하지만 주방 보조 월급으론 생활을 꾸리기 힘들었다. 그가 좋아하는 정치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오가는 공간에 계속 함께하고 싶었지만 그에겐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었다. 윤숙이 임신까지 하면서 일을 그만뒀다.

식도 못 올리고 동거부터 시작한 윤숙과 석정의 신혼생활은 사랑만 가득했다. 물질은 부족한 것투성이.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50만 원인 방을 얻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연립주택의 2층이어서 윤숙은 외출도 쉽지 않았다. 석정이 휠체어를 먼저 내리고 윤숙을 안아서 계단을 내려와 휠체어에 앉힌 뒤에야 외출을 할 수 있었다.

지호가 태어난 뒤론 석정이 할 일이 더 늘었다. 지호도 윤숙과 같은 뇌성마비를 안고 태어났기 때문. 둘을 함께 돌보면서 일을 할 수 없으니 모아둔 생활비가 점점 줄어들었다. 쌀값을 걱정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사정을 알게 된 '밥퍼 목사'의 도움으로 성금모금프로그램에 나갈 수 있었다. 가까스로 삶의 위기를 벗어난 뒤로 아내와 아들의 돌봄은 복지관과 장인의 도움을 받았다. 석정은 다시 생활전선으로 나갔다.

대형마트에서 하루 2톤씩 고기를 썰던 날
 첫째아이를 낳고 쌀값을 걱정하던 때, 농협 하나로마트 축산팀에서 일을 시작해 직업인으로서 자부심도 많이 느꼈다.
ⓒ 용석정 제공
새 일터는 바로 농협하나로마트 한 지점의 축산팀이었다. 축산팀 작업장만 200평이 넘고 건물은 1만 평은 됨직한 대형마트였다. 연중무휴로 24시간 영업을 했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새벽 4시까지 일하다가 집에 가서 잠깐 눈 붙이고 다시 아침에 출근했어요. 뒷다리 행사 하면 하루에 고기를 2톤씩 썰었죠."

축산팀 일은 고됐지만 직업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낀 적도 많다. 1999년에 들어가 몇 년 만에 돈육반 반장이 됐다. 15개 업체 20명이 넘는 직원들을 관리했다. 새로운 상품도 개발했다. 냉동고기 일색이던 마트 정육코너에 냉장 대패삼겹살과 차돌박이를 넣은 것. 홍보도 직접 했다. '이주의 특별 기획 상품' 소개 플랜카드를 만들어서 요리방법까지 덧붙였다.

냉장 대패삼겹살 아이디어는 농성장에서 얻었다. 여기서 스물아홉 살 석정의 새로운 도전을 소개한다. 바로 노동조합 조합원이 된 것이다. 아는 선배로부터 개별로도 가입할 수 있는 노조라는 소개를 듣고 냉큼 서울일반노조 가입서를 썼다. 2002년이었다. 창립한 지 몇 년 안 돼 활동가가 필요했던 서울일반노조에게 석정은 귀한 인재였다. 조합에 가입한 지 1년여 만에 조직국장과 직가입분회장을 맡아 마트 일과 활동을 함께했다. 틈만 나면 투쟁현장을 찾았고, 특히 신발을 만드는 제화노동자들의 투쟁에 적극 결합했다.

"겨울에 농성장에 갔더니 제화지부 조합원들이 드럼통에 솥을 걸고 샤부샤부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육수에 들어가는 고기가 소고기가 아니에요. 한 조합원이 일본에서 일할 때 샤부샤부에 삼겹살을 넣어먹었다고 하더라고요."

축산 전문가인 그가 매의 눈으로 이를 포착했고 그렇게 냉장 대패삼겹살이 탄생했다. 석정은 지금도 농협 하나로마트 매장에서 냉장 대패삼겹살과 차돌박이를 볼 때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던 시절도 있었지만...

2002년 조합원이 300명도 안 되는 작은 노동조합이던 서울일반노조는 그로부터 10년 뒤 조합원수가 3000명이 넘는 제법 큰 조직으로 성장했다. 석정도 함께. 그 헌신을 인정받아 2013년 서울일반노조 수석부위원장이 된다. 하지만 개인으로서는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은 시기이기도 하다. 비정규직이던 보건복지정보개발원 콜센터 상담원들의 무기계약직 전환 투쟁 등 제대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사업장들이 눈에 밟혀서이다.

"제대로 방향도 제시 못하고 여러 가지로 많이 부족했죠."

다시 수석부위원장 시절로 돌아가면 어떻게 돕고 싶은지 물으니 그는 단호하게 그 직을 맡지 않을 거라고 답했다.

"내가 이 정도이구나. 내 능력치의 한계를 봤으니까 맡지 말아야죠."

2012년은 다시 맞은 아홉수였다. 수석부위원장직을 맡기 전 먼저 한 도전이 있었다. 바로 인권운동이었다. 인권단체인 인권연대에 수습 활동가로 들어갔다가 세 달 만에 나왔다. 낯선 영역이어서인지 그곳에서도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렇게 마흔앓이를 심하게 했고, 수석부위원장 임기가 끝나갈 무렵 지친 심신을 치유할 곳을 찾았다.

어린 시절부터 늘 가슴 깊숙이 담아뒀던 농촌을 향한 그리움을 풀어낼 수 있는 곳. 부여군농민회와 인연을 맺었다. 한두 달에 한 번씩 내려가 농사일을 돕고 서울에서 농민집회가 열리면 부여군농민회 깃발 밑으로 찾아갔다. 농민회 형들은 그를 '부여군농민회 서울지부장'이라고 불렀다. 다시 마트 축산일을 하면서 틈날 때마다 부여로 내려가 농사를 거들면서 몇 년을 보냈다. 매일 차를 마시며 명상을 하고, 책을 읽고, 시간만 나면 어디든 거니는 일상도 구축했다.
 2013년 서울일반노조 수석부위원장을 맡았지만 투쟁 사업장 문제를 해결 못했던 당시를 떠올리면 괴롭다.
ⓒ 용석정 제공
오십을 앞두고 형틀목수가 되다

그렇게 마음의 평안을 되찾고 지천명을 앞둔 마흔아홉 살을 맞았다. 이제 무슨 일에 도전할까 고민하던 중 친한 노래패 가수를 만났다. 건설현장에서 6개월 동안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관심이 갔다. 사람들은 위험하고 힘들다고 엄두를 못 낼 일이겠지만 석정은 달랐다. 열 살부터 노동으로 단련해온 자신의 손발을 믿었다.

50~60kg 되는 냉동고기를 번쩍 들어 선반 위에 올리기 일쑤고,
하루에 100박스씩
고기를 썰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건설노조가 운영하는 기능학교에서 기술을 배우고, 형틀목수가 됐다.

첫 출근 날을 기억한다. 2022년 9월 20일. 스스로가 자만했음을 깨우친 날이기도 하다.

"10kg이 넘는 철근을 들고 평평하지도 않은 곳을 막 걸어가야 하잖아요. 게다가 발 아래는 낭떠러지이고. 3층 발판을 걸어야 하는데 발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리프트카 타는 것도 무섭고..."

이랬던 그가 지금은 15층 발판 위에서 저 멀리 북한산 봉우리를 바라보는 여유가 생겼다. 벌써 3년차 건설노동자이다. 그 사이 3000세대가 넘는 대단지 아파트 공사를 마쳤다. 그가 작업한 지하공간 위로 1년 8개월 뒤 고층아파트가 번듯하게 올라간 걸 보고 뿌듯했다. 건설노조 조합원들로 묶인 노조팀이어서 휴식시간도 잘 지켜 그나마 수월하게 일했다. 중간에 총무를 맡아 형님들에게 예쁨도 많이 받았다.

뿌듯함도 잠시, 공사가 끝나고 팀이 해체됐다. 팀장이 은퇴를 선언한 것. 또, 윤석열 정부의 건설노조 탄압으로 노조팀을 받아주는 건설현장을 찾기도 힘들었다. 뿔뿔이 흩어져 각자 살길을 찾아야 했고, 석정도 새 팀에 들어가 2000세대 아파트 건설현장에 투입됐다.

하지만 불운은 함께 찾아온다고 했던가. 올해 초부터 몸 곳곳에서 이상신호를 보내왔다. 녹내장이 생기더니 현장에서 유리조각이 발에 박히는 일까지 겪었다. 한참 고생했는데 이번엔 손목이 말썽을 부렸다. 선천적으로 손목뼈가 길어서 손을 조심히 써야 하는 그였지만 인생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10대 때부터 마구 부려먹었더니 연골이 다 닿았단다. 병원에선 수술을 권했지만 우선 건설 일을 쉬는 걸로 타협을 봤다.

물론 완전한 쉼은 아니다. 다시 마트에서 축산팀 일을 하고 있으니까. 임시직이다. 손목 통증이 줄어들어 다시 건설현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다.

평생 스스로를 증명해온 사람

"인생 어떻게 될지 몰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쉰아홉 살이 되면 새로운 직업을 찾아 또 다른 도전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하루하루를 살아내는데 바빴을 뿐 삶에 큰 애착은 없었다. 지금도 길가에 핀 꽃을 보면서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서대문산책자'(석정의 SNS 애착 태그)로 사는데 만족한다.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바람은 있다. "아내보다 하루라도 오래 사는 것." 결혼생활 30년이 다 되는 지금도 새벽까지 대화를 나누는 금슬 좋은 부부이지만 이제는 윤숙의 휠체어를 번쩍번쩍 들기가 버거운 나이가 됐다. "내가 못하면 다영이한테 부담이 갈까봐" 걱정이 된다.

네 살 때 원인도 모른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난 지호를 가슴에 묻고 자유롭게 커가길 바라면서 공부하라는 말 한 마디 않고 키운 딸이다. 그 딸이 부모 때문에 자기 인생을 살아가지 못할까봐 염려가 된다. 윤숙과의 만남을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석정이 노파심에 덧붙였다.

"사람들이 장애인과 함께 사는 비장애인을 엄청 착하게 생각하는데 그렇게 바라보지 않으면 좋겠어요. 우리도 똑같이 욕구를 갖고 사는 사람일 뿐이니까요."
 이제 일과 삶을 조금 떨어뜨려놓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틈날 때마다 전국에 있는 동네책방을 돌아다녔고, 한 책방의 라이브 방송에서 이를 소개하기도 했다.
ⓒ 용석정 제공
하고 싶은 건 하고야 마는 삶을 살아왔다. 삶의 욕구가 있었기에 묵묵히 노동을 이어올 수도 있었다. 42년차 노동자로서 꼭 지키는 노동의 원칙이 있을까?

"정리정돈을 철두철미하게 해요. 정리정돈은 나와 동료의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이니까요. 저는 정리정돈 안 되는 사람은 경력이 20년, 30년 됐어도 인정 안 해요."

역시 모든 일은 기본을 지키는 것부터인가 보다. "일은 생존"이던 석정이 지금은 일을 바라보는 시선이 좀 달라졌단다.

"일을 하는 데는 쉼도, 주변과 사람을 돌아볼 여유도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또, 불합리한 점이 없나 살피는 눈도 생겼고요."

요즘 석정은 잠깐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일부러 버스에서 몇 정거장 전에 내려 걸어가고, 점심시간에 일터 주변을 산책한다. 쉬는 날이면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과 유적지를 찾아가고, 전국에 있는 동네책방을 탐방하기도 했다.

"일과 상관없는 나만의 영역을 가지려고 해요. 새로운 영역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으니까요. 그런 공간에서 차를 마실 때면 안정도 되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죠."

석정의 동갑내기 친구는 그를 "평생 스스로를 증명해보여야 했던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배우지 못한 걸 채우기 위해, 장애인과 비장애인 부부도 특별한 게 아님을 보이기 위해 애써온 그는 이미 많은 걸 증명했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몇 년 뒤 쉰아홉 살의 용석정은 어떤 도전을 하고 있을지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작은책>에도 실립니다.'땀의 열전'은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아온 이들이 땀으로 엮어온 인생을 풀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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