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차 노동자, 용석정씨

신정임 2025. 9. 5.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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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의 열전] 신문배달부터 봉제노동까지... 열 살부터 살기 위해 노동을 택할 수밖에 없던 삶

[신정임 기자]

 건설노동자 용석정(52)은 열 살부터 일을 해 벌써 42년차 노동자다.
ⓒ 용석정 제공
분명 마트 축산팀에서 일하는 거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의 페이스북에 안전모를 쓰고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찍은 '셀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선배가 언제 건설노동자가 됐지?' 궁금함만 품고 있다가 인터뷰를 핑계로 만났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마트에서 일하고 있단다. 손목이 아파서 건설 현장을 잠깐 떠나 있다고.

올해 쉰두 살인데 벌써 손목이 고장 났을 정도로 용석정의 노동 이력은 화려하다. '42년차 노동자'라고 하니 열 살부터 일을 했다는 이야기. "살아남기 위해" 일을 택할 수밖에 없던 한 노동자의 파란만장한 노동 연대기를 들었다. 그 속엔 다른 많은 노동자들의 닮은꼴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

공부보다 신문을 팔던 어린이

석정의 첫 직업은 '신문 배달원'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그의 하루는 한밤중에 시작됐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두 살 어린 동생과 함께 신문배급소로 가서 신문지 사이사이 광고전단지를 끼우고선 5시부터 신문을 돌렸다. 아침 배달을 끝내고 학교를 다녀와서도 친구들과 놀 시간이 없었다. 오후 3시 반이면 바로 석간신문을 돌리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놀다가 한 번 빠지잖아요. 그러면 모나미 볼펜을 이렇게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꽉 눌러요. 예전 고문 방식이라는데 엄청 아파요. 그 고통을 한번 당하면 빠질 생각을 못 하죠."

신문대금도 배달원들이 수금했다. 수금을 못하면 어김없이 '볼펜 고문'과 함께 신문지 체벌이 뒤따랐다. "사람들은 몽둥이로 맞으면 아프다고 하는데 신문지가 얼마나 아픈지 모를 걸요?" 신문지를 돌돌 말아서 때리면 상처는 안 나는데 충격이 엄청나다고. 그러하니 그의 초등 시절은 학교에서 공부한 것보다 길거리에서 신문을 돌리던 기억이 더 또렷하다.

신문을 판 적도 있다. 술만 마시면 큰소리로 엄마를 다그치던 아버지가 싫어서 4학년 때 가출을 했다. 공사장 모래를 덮어 놓은 비닐 밑에 들어가서 자다가 신문팔이 조직에 끌려갔다. '조직' 하면 무서운데 숙소를 제공하는 대신 버스에 올라타 신문을 팔아야 하는 곳이었다. 석정은 거기서 적성(?)을 찾았다. 신문팔이 50여 명 중 바로 판매왕이 됐던 것.

하루에 100원 짜리 신문 100부는 거뜬히 팔았다. 번 돈 1만 원 중 그에게 떨어지는 돈은 4000원. 신문을 못 판 친구들은 30분 씩 연설을 들어야만 얻어먹을 수 있던 라면을 석정은 분식집에 가서 사먹는 호사를 누렸다. 돈도 벌고 집에서보다 여유롭게 생활했지만 아직 어린아이였다. 가족이 그리울 수밖에. 가출 3개월여 만에 몰래 버스를 타고 집이 있는 구리읍(당시는 경기도 남양주군 구리읍이었고 1986년 구리시로 승격)으로 돌아왔다.

미움의 대상이자 세상을 알려준 아버지
 용석정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존경하는 마음을 품은 채 살아왔다.
ⓒ 작은책 제공
구리읍은 석정의 고향이 아니다. 태어난 곳은 경기도 양평군. 농사꾼이던 그의 아버지가 농사일을 하다가 다쳐 한 팔을 절단하게 되면서 온 가족의 삶이 뒤틀렸다. 지금도 그는 "그렇게 많이 다친 것도 아닌데 왜 절단까지 했는지 의문"이지만 당시엔 문제제기할 틈도 없었다. 가족에게 닥친 현실을 헤쳐 나가는 것도 버거웠으므로.

그의 나이 열 살 즈음, 농사가 힘들어진 아버지는 결국 도시로 변신 중이던 구리읍으로 이사를 감행한다. 하지만 장차 농부를 꿈꾸던 석정으로서는 이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구리로 온 뒤에도 양평으로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다. 학교 간다고 하고선 50~60km 거리를 걸어갔다가 잡혀오곤 했다. 6학년 땐 다시 예전의 신문팔이 조직을 찾아가기까지 한다.

"집을 나갔다가 들어가니 아버지가 술도 안 드시고 집이 평화로웠어요. 어린 마음에 나만 없으면 가정이 평화롭구나 싶더라고요."

아버지는 석정에게 미움의 대상이었지만 세상을 알려준 스승이기도 했다. 보수색이 짙은 양평에서부터 자신의 반골기질과 정치색을 숨기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 시절부터 야당의 당원이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뒤로는 평민당 활동을 했다. 1986년, 초등학교 6학년이던 석정도 아버지를 따라 야당 집회에 참여했다. 집회 끝나고 대학생 형들이 사주는 떡볶이나 라면 먹는 재미로 따라다녔지만 자연스럽게 사회를 보는 눈이 커졌다. 어느새 열세 살 석정도 '독재 타도!'를 외치고 있었다.

세상을 알수록 아버지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조금씩 이해해 가던 차였다. 그런데 너무도 빠른 이별을 맞았다. 총판에서 떼 온 화장지를 리어카에 싣고 다니며 팔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열다섯. 가장의 짐을 물려받기엔 너무도 어렸다. 하지만 소아마비를 앓아 불편한 다리로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던 어머니에게만 살림살이를 맡길 수는 없었다. 이미 중학생이 되고부터 방학 때면 봉제공장에서 일을 해오던 석정은 아예 중학 생활을 작파하고 본격적인 노동자의 길로 들어선다.

봉제공장 다니며 새벽엔 검정고시학원으로

열다섯에 집을 떠나 봉제노동자가 됐다. 완성반에서 다 만들어진 옷의 실밥 정리, 단추와 스냅달기, 아이론으로 다림질하기 같은 일들을 했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봉제업계는 최고의 호황기를 맞은 참이었다. 밤을 꼬박 새는 철야작업을 밥 먹듯이 했다. 소년 석정도 예외 없었다.

"작업한 옷들을 천장에 쭉 걸어놔요. 몇 천 벌은 되니까 그 밑은 완전 깜깜해요. 점심을 5분 만에 후루룩 먹고선 거기로 들어가서 잠깐씩 자는 거죠."

눈치가 보여 화장실도 밥 먹는 시간에만 가던, 쉼이 없는 일상이 그렇게 흘러갔다. 버텨내기 힘든 노동이었는데 '다행히도' 몇 달 만에 공장이 문을 닫았다. 곧바로 세차장에 들어갔다. 몇 달 동안 차를 닦던 중 한 약국에서 심부름꾼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숙식 제공'이란 소리에 일자리를 옮겼다. 가난한 집에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서.

당시 '남대문 3대 약국' 중 하나로 불리던 구세약국이었다. 커다란 매장을 오가며 약사들이 부르는 약들을 계속 찾아주는 일을 했다. 아침 일찍 약 배달을 가기도 했다.

"기자들이 밤새 술 마시고 아침이면 두통약 같은 걸 배달시켰어요. 약을 들고선 언론사 앞까지 갔죠."

약국의 불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꺼지질 않았다.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는 건 봉제공장과 마찬가지였지만 철야도 없고 옷 먼지도 뒤집어쓰지 않았다. 좋았지만 반년 만에 그만뒀다. "발전성이 없어서." 몸이 고되더라도 돈을 많이 버는 기술자가 되고 싶었다. 다시, 봉제공장의 숨 막히는 노동 속으로 되돌아갔다. 그나마 남녀 숙소가 따로 있는 공장이어서 안도했다.

"처음 일했던 봉제공장은 남녀 열댓 명씩 숙식을 했는데 숙소랄 게 없었어요. 공장 한 쪽에 합판으로 칸막이 하나 해놓고 남녀로 나눠서 잤죠. 출입문도 없어서 성추행 같은 일도 많았고요."

다행히 두 번째 공장에선 작은 방을 얻어줬다. 형들 서넛과 같이 지내며 만년 막내 생활을 이어갔다. 청소, 빨래 같은 살림을 도맡아하고 형들의 술주정도 다 받아냈다. 그러한 뒤치다꺼리보다 힘든 건 일이었다. 겨우 40kg 남짓한 석정에게 힘을 많이 써야 하는 완성반 일은 버겁기만 했다.

"원단을 세 덩어리씩 지고 5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갔어요. 옷에 들어가는 솜은 옥상에서 줄을 내려서 올렸죠. 얼마나 무거운지 몰라요. 줄을 놓치면 대형사고가 나니까 엄청 긴장하죠."

잠깐만 한눈을 팔면 언제든 다칠 수 있는, 선배가 짜증난다고 가위를 던지는 정글 같은 일터였다. 그곳에서 석정은 살아남는 법을 깨우치며 스스로 자랐다. 그렇다고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학교 밖 학교를 만났기에.

신설동 2대 명문 검정고시학원 중 하나인 수도학원을 다녔다. 새벽 3시까지 일하다가 학원에 가서 새벽 5시 반부터 7시까지 수업을 듣고 다시 공장에 가곤 했다. 쪽잠으로 버티는 생활이 피곤은 했지만 재미있었다. "검정고시학원이 학교처럼 운영됐거든요."

30여 명이 한 반으로 묶여 수업을 듣고 급우들과 소풍도 갔다. 선생님들도 좋았다. 개척교회 목사,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해직 교사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사회문제에 대해 이야기도 나눴다. 국어 선생님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재미있었다고 공부를 소홀히 한 건 아니다. 3년여 만에 중·고등과정 검정고시를 통과했으니까.

설악산을 뛰어다니던 산장지기
 어린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내려놓고 떠났던 설악산에서 갑자기 산장지기가 됐다.
ⓒ 용석정 제공
"아홉수마다 새로운 일에 도전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 석정은 자신의 인생은 10년 주기로 바뀌어왔다고 설명했다. 신문배달을 시작한 만 9세를 지나 열아홉 살엔 산장지기가 된다. 학교보다는 일터에서 보낸, 고단했던 10대 시절을 보상받고 싶었을까. 석정은 열아홉 설 연휴를 며칠 앞두고 별안간 설악산으로 떠난다. "그냥 가고 싶더라고요." 본래 산과 들을 가슴에 품고 살던 그가 처음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한 순간이었다. 무작정 직행버스를 타고 가 대청봉에 올랐다가 소청산장에서 하룻밤 묵었다. 아침에 다시 길을 떠나려는데 산장 주인이 말을 걸었다.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여기서 일하는 건 어때요?"

전망이 좋아 '소청호텔'로 불리는 유명한 산장이었다. 사장 가족에 더해 산장지기도 서넛 있었다. 갑작스런 제안이었지만 덥석 받아들였다. 막내 산장지기가 돼 등산객들에게 간식을 팔고, 쓰레기를 치우고, 겨울이면 불을 땠다. 하루에 많으면 150명이 넘게 드나드는 등산객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맑은 공기를 마시며 일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물론 낭만만 있지는 않았다. 산장지기도 노동자였다. 쓸 물자들을 산장까지 옮겨오는 일이 고됐다. 30리터짜리 물통 2개를 지게에 지고 산길 수백 미터를 오갔다. 초코파이 10박스, 감자 1박스 들을 지게에 올리고 걸으면 자연스럽게 묘기가 됐다. 여름이면 비선대까지 음료수, 미숫가루, 사발면 들을 지고 가서 팔기도 했다. 산장에서 비선대까지 족히 6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회식 하면 양양까지 겁나 뛰어 내려가서 삼겹살을 사오고 그랬어요. 거길 어떻게 3시간 만에 주파했는지 몰라요."

일의 고단함은 흐릿하고 신나게 그때를 떠올릴 만큼 즐거운 시절이었다. 그 즐거움이 계속되면 좋았겠지만 3년 만에 끝이 난다. 개인이 운영하던 산장들을 국립공원에서 관리하게 된 것. 설악산을 내려와야 했던 석정은 바로 집에 가지 않았다. 다시 배낭을 메고 전국일주를 떠난다. "지금 아니면 못할 것 같아서"라는 마음이 그를 자극했고,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세상이 무섭지 않은 스물한 살이었다. 기차 역사나 마을 공터에 텐트를 치고 자면서 서울에서 제주까지를 여행했다. 의족을 한 베트남 참전 용사, 대학 교수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월드컵대회가 열린 1994년이었다. 한 대학의 조교실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축구경기를 보기도 했다. 뭔가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 같은 45일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 법. 그가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는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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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작은책>에도 실립니다. 땀의 열전은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아온 이들이 땀으로 엮어온 인생을 풀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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