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 티셔츠는 좀처럼 말이 없다

티셔츠의 세계는 실로 복잡하다. 물론 대충 고를 수도 있다. 하지만 매일 피부에 닿는 만큼 가장 으뜸인 걸 고르는 편이 현명하다. 그런 점에서 티셔츠는 쌀밥과 무척 닮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챙겨 먹는 끼니처럼, 티셔츠는 가장 쉽고 정직하게 나를 돌보는 방식이다. 화려한 럭셔리 라이프를 즐기기로 정평이 난 모 패션 유튜버는 이렇게 말했다. “제게 진정한 명품은 이 티셔츠예요.” 며칠 뒤 다른 유튜버는 불평했다. “아무리 명품이라도 티셔츠는 다 거기서 거기예요.” 남자는 다 똑같다는 말처럼 정말 티셔츠도 그럴까?

오래전부터 홍진경의 SNS에는 먹색 티셔츠가 수없이 등장한다. 기장이나 디테일이 조금씩 달라질 뿐, 자연스럽게 빛바랜 티셔츠는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뉴욕에서도, 딸과의 드라이브에서도 함께했던 티셔츠의 정체는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프리미엄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제임스 펄스’다. 그는 “다른 면 티셔츠는 못 입겠다”며 브랜드를 향해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제임스 펄스는 슬러브 코튼과 슈렁큰 기법으로 완성한 특유의 자연스러운 실루엣과 로고리스 디자인으로 탄탄한 팬층을 구축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그의 담백한 글도 먹색 티셔츠와 지독히 닮았다. “소박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살아도 초라해지는 건 싫다.”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한 시대를 풍미하던 그 시절, 담담한 필치로 써 내려간 그의 글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몸과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질 때마다 나는 그의 글을 조용히 꺼내 읽는다. 20년도 넘은 미니홈피 속 소박한 글이 세대를 넘어 지금의 20대에게 닿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한때 화려한 슈퍼 모델로 패션계를 누비던 그는 시간이 흘러 이제 무지 티셔츠를 입는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무지 티셔츠 같은 공백에 목말라 있는지도 모른다.


시끌벅적해진 거리 위를 달랑 무지 티셔츠만 걸친 채 거닌다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적어도 당신이 패션 피플이라면 말이다. 티셔츠 애호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백 장에 이르는 방대한 아카이브 사이에서도 무지 티셔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무’는 말이 없는 법이다. 조용히 여백의 무게를 견딘다. 매일 아침 옷을 고를 때면 내 심심한 맨얼굴을 닮은 무지 티셔츠는 늘 화려한 티셔츠에 맥없이 지고 만다. 무지 티셔츠는 오직 내가 나로 충분할 때만 선택할 수 있는 사치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건 무지 티셔츠일지 모른다. 그 침묵이 모든 걸 드러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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