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늘 우리 곁에 있다, 그래서 중요한 두 글자
[김신태 기자]
재난이나 인류멸망 같은 것을 다루는 아포칼립스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면 어김없이 드는 의문이 있다. 인간은 왜 위기 상황마다 분열되고 편을 가르며 서로를 공격하는 걸까.
특히 좀비 영화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더 두드러진다. 사건 초반 주인공들은 정신없이 좀비를 피해 다니지만, 시간이 지나며 더 경계해야 할 것은 좀비가 아닌 인간이다. 인간은 무리를 형성하고 자신의 무리에 속하지 않은 이들을 적대시하며 공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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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대왕 파리대왕 표지 |
| ⓒ 민음사 |
핵전쟁이 일어난 미래 세계, 전쟁을 피해 피난을 가던 비행기가 추락해 무인도로 떨어진다. 낯선 무인도에서 랠프와 돼지의 만남을 시작으로 아이들은 서로 만나게 되지만, 어른은 없었다. 이후 랠프가 리더로 선출되고, 소라 껍데기를 가진 자가 발언권을 갖는 등, 나름의 규칙과 질서를 유지하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 규칙과 질서는 무너진다.
사냥 욕심이 앞섰던 잭은 구조를 위해 봉화를 피우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되고 결국 구조될 기회를 놓치고 만다. 이에 잭과 랠프는 다투게 되고, 결국 랠프와 잭은 서로의 무리를 형성하며 결별하게 된다. 리더가 된 잭은 더욱 사냥에 집착하며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한다. 또한 섬에 무서운 짐승이 있다는 공포를 억누르기 위해 아이들은 잭과 같이 폭력적으로 변하며 광기에 휩싸이게 된다.
이 소설에서도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손쉽게 무너지는 인간 세상의 규칙과 규율이 드러난다. 소설 초반 커다란 역할을 했던 소라 껍데기는 소설 후반엔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힘의 논리였다. 아이들은 생각 없이 잭의 말을 따랐고, 급기야 사이먼을 짐승으로 오인해 그를 죽이기까지 한다.
잭의 무리는 점차 문명과 동떨어진 야만인이 되고,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강압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광기에서 저항하고자 한 랠프는 결국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집단의 광기는 이 같은 일에 아무런 의심 없이 동조한다.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한 작품 속에는 늘 리더에 따라 그룹의 성격도 변한다. 또한 힘 있는 자에게 자신을 의탁한다. 그렇기에 평범한 이들도 악에 물들고 악인이 된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아돌프 아이히만은 자신은 단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호소한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강제 이송계획의 책임자였지만, 유대인에 대한 증오나, 폭력적 즐거움을 느끼기보다 어떤 때는 동정심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철저히 상부의 명령을 따랐다는 논리로 일관했고, 이 재판을 지켜본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한다.
즉, 스스로 악한 의도를 품지 않더라도 비판적 사고를 잃고 사유하지 않을 때, 악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집단의 광기에 취해 의심하지 않았고, 잭에게 충성하며 스스로 야만인이 되어간다. 끝까지 민주적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고자 한 랠프는 악에 대항할 수 없었고, 사유를 잃은 그들은 이 소설이 의미하는 파리대왕, 즉, 악마가 된다.
문명을 위협할 만한 혼란이 찾아올 때 언제든 인간에게 숨겨진 악의 본성이 깨어나는 것일까?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며 행동하기보다 누군가를 따르는 일에 더 편안함을 느낀다. 문명사회에서도 리더의 성격에 따라 그룹의 성격이 달라지며, 리더에게 반기를 들기보다 따르는 일에 익숙한 이상, 악의 평범성은 언제든 내재되어 있다.
아이들을 악으로 물들인 것은 악한 마음이라기보다 질서와 규율이 무너진 곳에서의 본능과 공포, 그리고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사유'란 얼마나 중요한가. 세상 사는 이치에 대해 의심하고 비판하고 탐구하는 일이야말로, 문명 세상의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악은 언제든 깨어날 수 있다. 생각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김없이 악에 지배당한다.
파리대왕은 늘 우리 곁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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