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애들이 영어를 얼마나 잘 하는데"
사교육 걱정 없이 가정에서 학습이 가능할지 궁금해 엄마가 직접 실험에 나섰습니다. 중등 과학교사인 엄마가 초등학교 4학년 아이를 직접 가르치며 겪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이번 글은 '8일째' 이야기입니다. <기자말>
[윤송미 기자]
Day-8
오늘도 늦잠을 잤다. 다행이 어제의 침잠이 오늘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아침 공부는 시원하게 포기하고, 새 날을 열어본다.
오늘은 한시간 정도 떨어진 도심으로 합창을 배우러 간다. 일주일에 두 번, 이 길을 오갈 때마다 '라이딩 맘'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또 터진 갈등
담이가 배우는 노래는 대부분 라틴어라 내가 도와줄 수 없다. 무슨 뜻인지 몰라도 "마니-이 피-캇 아니마 메아 도미눔" 몇 절까지 있는 노래를 곧잘 외고 부르는 모습은 늘 감동적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앞서 열고 나가는 아이를 지켜보는 경이로움이 있다.
그에 비하면 국어, 영어, 수학를 함께 앉아 공부할 때면 늘 부족한 부분이 먼저 눈에 든다. 아이를 못마땅하게 보는 내 앎의 얄팍함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한 발 뒤에서 아이의 성장을 놀랍게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을 자주 잊는다.
오늘은 영어 노래를 부른다. 악보에 쓰인 영어 가사를 읽고, 음까지 붙여야 한다. 가사를 미리 읽어 오는 것이 숙제라고 했다. 담이가 얼추 읽으면 내가 다시 읽어주고, 담이는 한글로 받아적었다.
"m. a. y."
"may 메이, -하기를 이란 말이야."
"my song 마이 쏭"
"my song 맞아, 마이 나의, 쏭 노래, 나의 노래란 뜻이야."
"a. r. i. s. e."
"arise 어롸이즈, 일어나다 란 뜻인데 일어나 거기 가 닿기를, 이런 의미야."
"to you 투 유"
"to you 맞아 투유, 너에게, 여기서는 당신에게, May my song arise to you는 내 노래가 당신께 가 닿기를."
...
"엄마, 그냥 뜻 설명하지 말고 읽기만 해줘."
"그래? 알겠어. 난 더 잘 기억하라고 알려줬지."
하지만 나는 수시로 단어 뜻을 덧붙였고, 도착이 가까워질수록 초조해진 담이는 결국 폭발했다.
"아니 엄마! 나 진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라. 머리 터질 것 같으니까 그런 거 설명 좀 하지마! 그냥 읽는 것만 가르쳐 달라니까?!"
나는 이해로부터 오는 배움의 즐거움을 주고 싶었던 것인데, 결국 아이를 화나게 했다. 아이 눈높이에 맞추는 일이 늘 어렵다.
갈등의 여파는 동생에게도
요즘 담이 공부를 봐주며, '1학년 때부터 이렇게 했다면 어땠을까' 종종 생각한다. 마침 솔이가 1학년이니 잘 해보자 싶지만, 솔이는 공부라면 질색팔색을 한다. '쟤는 공부를 시킨 적도 없는데 왜 저럴까?' 했지만 사실 알 것 같다.
담이와의 공부가 늘 화로 끝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궁금한 솔이는 질문이 많은데 형과 공부하는 시간에는 엄마를 빼앗긴다. 그것만 해도 답답한데 우리 사이에 터져나오는 이 따가운 긴장까지 뒤집어 써야 한다. 담이도 담이지만, 이런 날이면 솔이한테 더 미안하다.
줄타기 같은 공부
여하간 공부하러 가는 길인데 심통 나지 않게, 기쁜 마음으로 노래할 수 있게 담이에게 거듭 사과했다. 솔이에게 중고 서점에 들르자고 했더니, 수업에 들어가려던 담이가 밝게 한마디 했다.
"엄마, 실력이랑 최상위 문제집도 사와."
지난 여름방학 끝에 나는 담이에게 모질게 말한 적이 있다.
"열심히 하겠다면서 한 학기동안 문제집 한 권을 못 풀었어. 정말 잘 하려면, 이런 '기본'은 당연하고, '실력', '최상위'까지 몇 권씩 풀어야 해."
지난 학기를 보내면서, 나는 담이의 학습 특성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헐렁해 보이는 겉과 달리 잘하고 싶은 욕심이 크다. 우수한 성취로 인정받길 원한다. 문제집을 펼치면, "오늘 이 단원 다 끝내겠어.", "오늘은 5장 풀거야." 신나게 말하지만 막상 몇 장 하다 틀리면 금새 기가 꺾인다. 자존심이 강해 틀린 것을 지적하면 기분이 상하고, 그때부터는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 공부는 늘 아스라한 줄타기 같았다. 꼭 내가 '귀명창'이 못 되어서라기 보다, 우리 사이엔 그렇게 늘 긴장이 있었다.
그럼에도 좀 전의 분노는 사라지고, 담이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씩씩하게 수업에 뛰어든다. 담이의 회복탄력성은 늘 놀랍다.
솔이와 서점에 들렀지만, 문제집은 못 샀다. 대신 요즘 국어 교사들 사이에서 수업에 많이 활용한다는 <긴긴밤>을 골랐다.
"이 책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50만 권이나 팔렸대. 엄청 감동적이어서 형, 누나들이 많이 울었대. 엄마가 매일 조금씩 읽어 줄게. 방학 때 책 한권 못 읽어줘서 아쉬웠거든."
솔이 얼굴이 반짝인다. 기분 전환은 성공이다.
불안과 믿음사이
수업이 끝날 즈음, 아이들이 오늘 배운 노래를 불렀다. 수녀님이 다가오시며 "애들 목소리가 참 예쁜데 너무 자신감이 없네. 얘들아, 자신있게 불러봐." 하셨다. 옆에 있던 엄마가 영어라 자신이 없나보다며 웃으니 눈을 흘기며 말씀하셨다.
"요즘 애들이 어릴 때부터 얼마나 영어를 잘 하는데? 영어라서 못하긴요."
별 것 아닌 말인데, 또 움찔했다.
나는 초등 5학년에야 알파벳을 알았다. 30년 전 그때도, 늦은 시작이었지만 갈증이 있었는지 빠르게 따라잡았다. 그 경험이 있기에 담이도 때가 되면 잘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 아이의 성장이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고른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부모의 몫이라 생각한다.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균형있게 중심잡으려 애써왔다. 오늘같은 날 움찔 하지만, 거기까지. 잘 하고 있음을 믿으며 또 다독인다.
이미 영어 책을 줄줄 읽는 친구들 속에서, 한 마디씩 따라 읽기도 노래 부르기는 더욱 버거울텐데 오늘도 담이는 씩씩하다. 참 고맙다.
돌아오는 차 안.
솔이는 새로 산 책을 펴고 작은 손가락으로 글씨를 짚었다.
"코.끼.리.고.아.원."
담이는 오늘 배운 노래를 듣고 또 듣고 따라 부르다, 눈시울을 붉히며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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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동의 희망의 순례자 chatGPT의 공간지각능력을 보여주는 사진 |
| ⓒ 조금말잘듣는GPT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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