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인으로 산, '문형배'라는 상식의 이정표

박정훈 2025. 9. 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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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이 박정훈에게] 내란을 넘어 새 시대로 가는 길

흔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과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 박정훈',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를 모색해 나갑니다. <편집자말>

[박정훈 기자]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지난 6월 18일 오전 경남도교육청 별관 공감홀에서 강연하는 모습.
ⓒ 윤성효
"판사가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멀쩡한 사람을 죽일 수는 있다. 선고 전날 아파트 단지 내 공원을 산책한다. 내일의 판결을 머리로 그려보고, 결론에 자신 있는지를 검증한다." (<호의에 대하여> 80p)

지난주,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대행의 에세이집 <호의에 대하여>가 출간됐습니다. 그가 오랜 시간 블로그에 쓴 글이 엮여 있습니다. 먼 과거에 썼거나 일기 같은 글이 많아 아쉽기도 했지만,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그가 판사로 재직하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았는지 잘 알게 됐습니다. 책 홍보 겸 이뤄진 언론 인터뷰 등에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도 많이 발견할 수 있었고요.

정훈님, 저는 그의 책을 보면서 '이런 판사만 있다면 시민들의 사법부 불신이 해소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선고 전날 '결론에 자신 있는지' 스스로 검증하는 판사. "판사에게 성공이란 단 한 사람의 당사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 판사, "다수의 삶에 무지하고 무감각한 것이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는 판사라면, 적어도 사건을 허투루 다루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좌파가 아닌 상식파
 <호의에 대하여> 겉표지
ⓒ 김영사
그는 2006년 창원지법 재직 당시 '화이트칼라 범죄 양형기준'을 마련하면서 소위 '유전무죄 무전유죄' 처벌이 이뤄지는 것을 막고자 했습니다. 반면 일반 형사 사건의 경우 가난하거나 성장 환경이 좋지 않았던 피고인의 사정을 고려해서 판결을 내렸던 적도 많습니다. 2007년의 일명 '살자' 판결도 유명합니다. 신용카드 빚을 지고 여관방에서 불을 붙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다가 '현주건조물 방화미수죄'로 구속기소된 피고인에게, '자살'을 되풀이하면 '살자'로 들린다고 말하며 책을 선물한 일입니다(형량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선고).

부산고법 부장판사 시절에는 1심을 깨고 회사가 주장하는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를 엄격하게 판단하면서 정리해고를 무효화하거나, 산업재해의 인정 범위를 넓히는 판결을 했습니다. 또한 '진보 성향 판사 학술 모임'으로 불리던 우리법연구회 회장까지 맡으면서, 그에겐 '좌파' 혹은 '진보'라는 말이 붙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나 지금이나 '좌파'라는 말에는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우리법연구회'가 비난받을 때, 그는 2009년 <주간조선> 인터뷰에서 "저는 한나라당 후보를 찍었던 사람입니다. 제가 이 모임의 회장입니다. 우리 모임의 회원 성향은 다양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윤석열 탄핵 심판을 앞두고 그의 '성향'을 문제 삼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손석희 일본 리쓰메이칸대학교 객원교수는 지난달 27일 방송된 MBC <손석희의 질문들>에서 짓궃게도 그에게 "좌파십니까?"라고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자 그는 답합니다.

"제 주관적으로 느낄 때 저는 헌법과 법률에 충실했다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이거는 '우파'거든요. 헌법과 법률에 충실한 사람은 우파입니다. 우파의 가장 기본은 '법치주의'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좌파와 진보 등의 용어에 대한) 개념 정리가 좀 돼야 한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입니다.

"상식파라고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날 <손석희의 질문들>에서 그는 '상식'이라는 말을 또 한 번 썼습니다. 윤석열 탄핵 심판 당시 헌법재판관들의 성향과 평결 과정에 관해 이야기할 때였습니다.

"'보수'라 하면 그 이념이 자유민주주의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한 것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 그런 자유민주주의가 개념상 있을 수 있나. 따라서 이건 보수·진보 이런 문제가 저는 아니라고 봤습니다. 상식이냐, 비상식이냐 이런 문제로 봤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상식'이라는 것은 아마 국민의 눈높이일 것입니다. 이날 인터뷰에서 그는 "제가 많이 이야기하는 게. 판사의 세계하고 국민의 세계가 불일치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서 시대정신에 대해서 판사들이 좀 고민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투사가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윤리
 지난 4월 4일 당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에 입장해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정훈님, 문 전 재판관은 일반적으로 '진보'나 '좌파'로 분류되는 이들처럼 살아오진 않았습니다. '운동권' 학생도 아니었고, 인권변호사로 살지도 않았습니다. 33년간 법복만을 입고 살았습니다. 화려하거나 부유하진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안락한 삶을 산 사람이죠.

법원 내부의 투사도 아니었습니다. 문 전 재판관이 지난달 28일 MBC 라디오 <뉴스 하이킥> 인터뷰에서 "적을 만들지 않는다"라고 말한 부분은, 그의 성격과 생활 철학을 보여줍니다.

"살아가는데 저는 생존이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생존이 보장이 되어야 저는 싸울 수 있다고 봐요. 생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을 안 만드는 겁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화하는 거죠.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제 역량을 보이는 거죠. 근데 이른바 진보 진영에 속하는 분들 중에는 그냥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쓰러진 분이 제법 있습니다. 그게 저는 적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그렇다고 보고..."

그러면서 사법개혁에 관해 쓴소리하는 글을 (내부 게시판에) 썼지만, 그 글을 쓰고 바로 법원장실에 가서 글 쓴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는 일화를 덧붙입니다. 그렇게 적을 안 만들어서 승진도 했다면서요.

또 본인을 '보수'라고 규정하면서도, '진보'라고 말하면 어떻냐는 식으로 말합니다. '사람'을 생각하고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 판결, 그리고 이를 위한 법원의 성찰과 변화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을 무엇으로 규정하는지는 그에게 중요한 것 같진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법치주의는 보수의 핵심 가치죠. 그러니까 저는 보수입니다. 근데 보수라는 게 따뜻해야만 이 사회가 지탱이 됩니다. 따뜻한 건 결국 사회의 가장 힘없는 사람에게 희망이 될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 진보라면 진보인 거죠. "

문 전 재판관이 스스로 '좌파'가 아니라 '상식파'라고 불러달라고 했던 말이 와닿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이념형 인간'이 아니라 판사로서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자 했을 뿐이었으니까요.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애썼던 것도, 판사로서 무지·무경험·무소신을 극복하기 위해 독서를 즐겨 했던 모습도, "퇴임 후 영리 목적의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한 것도 철저하게 자신의 직업윤리에 기반한 행동이었습니다. 무엇이 더 좋은 판결인지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법이 사람들을 구하고 감동을 줄 수 있을지 생각했기에 '귀족 판사'의 길을 가지 않았던 것일 뿐이죠.

그는 개혁가이거나 시대를 앞서 나간 사람도 아닙니다. 특별히 자신의 삶을 희생해서 대의를 이루고자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독지가인 김장하 선생이 자신에게 장학금을 주며 호의를 베풀었으니까, 자신도 이 사회에 호의를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부단히 고민하고 노력하면서 법관 생활을 했습니다.

'판사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세상을 바라봤으며, 판결이 타인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겸손'과 '성실'을 강조했습니다(시사IN 인터뷰 중). 그런데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아니 넘쳤습니다.

그는 '어른'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길을 먼저 간 사람, 뒤따라오는 사람에게 이쪽으로 가면 어디가 나오고, 10km 가면 또 어디가 나오고 하는(알려주는) 이정표(한국일보 인터뷰)"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사회는 '문형배'라는 하나의 이정표를 갖게 된 것이 아닐까요? 권력이나 부를 탐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존경받는 이가 됐다는 것.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라는 김장하 선생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데서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올리는 문 전 재판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뒤따라오는 사람들'을 안도하게 합니다.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고,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고 여겨지는 지금과 같은 때엔 더더욱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위에 불행한 사람이 있는 이상 내가 행복할 수 없다고 느낄 수는 없을까? 성공이 클수록 행복한 것이 아니라 욕망이 덜 생겨야 행복한 것은 아닐까? 내 재산이 많아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가난한 사람이 덜 생겨야 행복한 것은 아닐까?"( <호의에 대하여>, 90p)

문형배가 필요하다고 믿는 세 가지
 지난 5월 2일 이른바 '김장하 장학생'으로 알려진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경남 진주를 찾아 김장하(81) 선생을 만났다.
ⓒ 김보성
최근 문 전 재판관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지금 한국 사회가 해야 할 과제 세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기후 위기 대응 ▲ 헌법에 '주거권' 명시 ▲생활동반자법 도입입니다.

문 전 재판관은 지난 1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헌법재판관 6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결정을 탄소중립기본법 8조 1항의 헌법불합치 결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정말 공들였다"면서 말입니다. 동시에 기후 위기 사건 주문을 바꿔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당장은 위헌이 아니다(헌법불합치)'라고 한 게 아쉽다면서요. 그러면서 아직도 법 개정에 나서지 않는 국회에 대해 이례적으로 강하게 말했습니다. "국회는 왜 헌법을 안 보세요? 헌법에 위헌 결정이 나면 법률을 고치라고 돼 있지, 위헌이 나더라도 고쳐도 되고 안 고쳐도 되고 그런 문구가 어디 있습니까?"

그는 지난 6월 대구대 강연에서도 "기후위기 감축 속도를 늦추면 자원을 기성세대가 다 써버리고 청년 세대에게는 쓸 수 없게 만드는 것"이라며 하루빨리 감축 목표를 법에 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문 전 재판관은 <시사IN>과 <한겨레> 인터뷰를 통해 '주거권'을 헌법에 명시하자고 강조합니다. '개헌'에서 권력구조 개편이 주된 쟁점이 되는 것과 달리, 그는 사회적 기본권을 확대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합니다. 그중에서도 '주거권'이 '기본권'으로서 명시되고 보장받아야 한다고요. 그는 부의 양극화 문제의 핵심에 '집'이 있다고 꼬집으며, "집을 투자의 대상이 아니라 기본권의 목적물로 만드는 게 필요하다"라고 밝혔습니다.

문 전 재판관이 최근 새롭게 이야기한 것은 생활동반자법의 필요성입니다. <손석희의 질문들>에서 그는 "동성혼에 대해서는 생각을 굳히지 못했다"라면서도 "생활동반자 관계 정도는 인정할 때가 됐다. 생활동반자 관계를 인정하면 의료보험이 되고, 연금도 되고 인정되는 게 많다"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3일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낸 생활동반자법에 따르면 "성년인 두 사람이 합의에 따라 생활을 공유하고 서로를 돌보는 관계"를 생활동반자 관계로 규정합니다. 사회보험·공공부조·사회서비스·출산휴가·인적공제 등에서도 기존 가족관계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는다고 합니다. 동성 커플뿐만 아니라 친구나 이성 커플 사이, 혼자 살고 있던 노년층 등이 '혼인'을 하지 않고도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가 제도적으로 보호해 주는 법입니다.

정훈님, 저는 내란을 넘어 새 시대로 가는 길을 문 전 재판관이 어느 정도는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판사로서 항상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고민해 왔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그는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국민들과 발맞춰가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과제를 추진하기에, 때가 무르익은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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