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의 수락산에 이런 섬뜩한 뜻이 담겼다고?
[이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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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산 반곡리 들판. 황산벌 전투 현장으로 추측하고 있는 너른 들판이다. 왼쪽으로 백제군, 오른쪽으로 신라군의 진영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 ⓒ 이병철 |
서울과 남양주 사이에도 수락(水落)산이 있다. 물이 떨어지는 산, 즉 빼어난 풍광을 품고 있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름이다. 이에 반해 논산의 수락산은 섬뜩한 이름이다. 머리 수(首)에 떨어질 락(落). 이만큼 강렬한 이미지의 지명이 얼마나 될까? 그 머리의 주인이 계백 장군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도록 전해진 설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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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백장군 유적지 전경. 홍살문 너머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와 오른편 언덕 위 묘역이 보인다. |
| ⓒ 이병철 |
오후로 예보된 비와 교통 정체를 피해 하루를 서둘렀다. 논산에 접어드니 어느덧 해가 하늘에서 높다. 시내를 바로 앞에 두고 동쪽으로 크게 방향을 꺾는다. 너른 들과 야트막한 언덕 사이를 10여 분 정도 더 가서 유적지 주차장에 멈췄다.
그늘에 앉아 굳은 몸을 풀어준다. 좀 살 것 같았다. 급한 마음에 한 번을 쉬지 않았더니 몸이 벌써 힘든가 보다. 그런데 이리 바로 뵈어도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뭔가 나만의 의식이 필요했다. 유적지를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돌렸다.
황산벌이 현재의 연산면과 주변 일대였음은 기정사실인 듯하나, 전장에 대해선 주장이 엇갈린다. 나는 그곳을 반곡리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반곡리 들을 가운데로, 김유신의 신라군은 남동쪽 낮은 구릉을 따라 진을 쳤을 것이다. 이에 대해 백제군은 사비성 쪽을 등지며 북서쪽 수락산 바깥 구릉에 방어진을 구축하지 않았을까.
유적지 남쪽 모퉁이를 돌아 얼마 가지 않아 반곡리에 도착한다. 마을회관 앞에서 달리길 멈추고 너른 들녘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다행히 아침 안개는 걷혀, 막힘이 없다. 바로 저 들판에서 천수백 여 년 전, 오만오천의 군사들이 맹렬히 뒤엉켰으리라. 백제군이 네 번을 연이어 승리했으나, 신라가 마지막 한 번을 이겼다. 백제는 패하고 장군의 목은 잘렸다.
그 싸움을 그린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2003년)은 지금 봐도 잘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다. 보는 내내 폭소와 실소가 교차했다. 그러나 해년을 걸러 다시 보게 되는 그 영화는 내게 더 이상 웃음을 주지 않는다. 목이 잘리는 계백 장군의 붉어진 눈시울에서, 순간 느껴지는 큰 슬픔과 비애가 내 마음 속에 깊고 무겁게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눈앞에 펼쳐진 산과 들은 늘 그렇듯 무심히 평화롭다. 군데군데 시설농사를 위한 비닐하우스도 보인다. 그 싸움을 겪고도 사람들은, 삶이라는 것을 이렇듯 대대로 엮어 내고 있다. 선대의 기억 또한 무섭도록 끈질기게 후대에 전해졌다. 장군의 묘소를 찾아내는 가장 중요한 실마리였다.
마음속으로 잠시 고개를 숙인다. 이제 장군을 만나러 가야 한다. 영화에는 장군이 처와 자식의 목숨을 거두는 장면이 나온다. 장군의 처는 이렇게 외치며 저항했다.
"아가리는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씨부려야지. 호랭이는 가죽 땜시 뒤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뒤지는 거여! 이 인간아!"
관객들에겐 참으로 인상 깊었을 장면이다. 실로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을 법도 하다. 하지만, 장군은 현실을 정확히 직시한 끝에 그런 행동을 취했다. 싸움에 나서기도 전에 지는 것을 생각하는 군인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장군은 이미 그 전쟁의 향방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7세기 중반, 삼국은 모두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삼국 간 쟁투에 더해 당이라는 거대한 세력까지 밀려왔다. 백제 역시 잦은 전쟁으로 국력은 기울었고, 귀족들까지 발호하니 그 속은 곪아가고 있었다. 의자왕은 친위 쿠데타라는 승부수를 던진다. 일순 왕권은 강해졌다. 하지만 효과는 짧았다. 이어진 귀족들의 저항에 정국은 다시 혼란에 빠진다.
이런 지경에 13만 당군과 5만의 신라군이 침입한다. 장군은 조국의 최후를 미리 보았을 것이다. 영화에는 귀족들의 외면 속에, 의자왕과 계백 둘만이 조우하는 장면이 나온다. 술 한 잔을 건네며, 왕은 어렵게 결사대 지휘를 부탁한다. 두 배우의 명품 연기로 코믹하게 묘사됐지만, 실존했던 두 인물의 깊은 좌절감은 또렷하게 전달된다. 백제의 현실은 이미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음을, 둘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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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백장군 묘소. 주위를 둘러싼 울창한 송림과 어울려, 과거의 치열함은 다 잊은 듯 편안하게 들어앉아 있다. |
| ⓒ 이병철 |
묘역에 올라 사방을 둘러본다. 얼마나 깊은 곳에 장군의 무덤을 썼는지 알겠다. 신라군의 눈을 피해 암매장 하다시피 묻었을 것인데, 깊이 들어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장군의 시신을 욕보이지 않게 하려던 백제 유민의 마음이 생생히 느껴진다.
발견 당시 드러난 석실은 전형적인 백제 양식이었다. 장군의 묘로서 비정하는 근거의 하나다. 그 어지러운 시절, 석곽까지 준비할 여유가 있었을까 의문도 든다. 다만, 각지에서 일어난 백제 부흥군의 세력이 이곳에도 미쳤다면, 임시 매장한 그를 다시 격식에 맞춰 묻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지금의 봉분 크기가 당시에도 같았다면 충분히 위엄을 나타낼 수도 있었겠다.
그의 무덤임을 증명하는 실증적 근거는 아직 없다. 그래서 정확하게는 전(傳)이라는 글자가 앞서야 하나, 묘비에는 '百濟階伯將軍之墓(백제계백장군지묘)'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에 그리 중요할까? 천 년을 넘게 이어온 사람들의 기억이 있고, 이를 찾고자 하는 현대인의 노력이 갸륵했으며, 이렇게 기리고 찾는 오늘의 사람들이 있지 아니한가.
복구하고 정비한 까닭이겠지만, 고분과 주변 모습들이 참으로 순하다. 요란한 치장 없이 다소곳 들어앉은 모습 또한 정갈하다. 우리네 옛 무덤은 그 안에 든 사람의 생전 삶이 어떠했건, 지금은 모두 평안해 보이도록 만든다. 서두르는 기색이라도 보일까 두려워, 한참을 서성이다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지금 저곳에 장군의 육신 단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길 바란다. 진즉 영면에 드셨길 빌고 또 빌었다.
그와 그의 행동에 대해 평가할 마음이 내겐 없다. 찬양도 비난도 하고 싶지 않다. 단지, 홀로 어쩌지 못하는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사라진, 한 인간의 삶과 그 슬픔에 공명할 뿐이다. 이곳에 시신을 거둬 묻은 유민들도 또한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이제 묘소 아래로 내려가 홍살문을 지난다. 긴 진입로를 따라 중문을 넘었다. 네모지게 빙 두른 담장 안 마당 끝에 단층의 사당 건물이 있었다. 거기까진 신과 인간이 함께 걷도록 만든 삼도길이 이어져 있다. 가운데를 밟지 않으려 조심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반의 사당은 여러모로 의미 깊다. '가구식 기단', '배흘림기둥', '주심포 양식의 공포', '여러 층의 창방', '지붕 위의 치미' 등 고식을 애써 재현하고 있다. 처마를 길게 빼내기 위한 구조체인, 백제 특유의 '하앙' 역시 도드라진다. 지금의 한반도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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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장사. 계백장군 묘소 아래 세워진 그를 기리는 사당이다. 고식 건축양식을 성의껏 재현하고 있다. |
| ⓒ 이병철 |
계백 장군을 떠올리며 새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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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봉문환두대도와 복원품. 환두대도는 실전용의 무기라기 보단 지닌 이의 위세를 나타내는 물건이라고 한다. |
| ⓒ 이병철 |
시간이 지나니 다른 관람객들이 들어왔다. 전시물 가까이 몸을 기울여 집중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저 사람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될까? 참으로 다양한 생각들을 하겠지. 내 머릿속에도 지금 이 순간, 수많은 생각의 편린들이 떠돌고 있다.
박물관을 나와 잠시 멈춰 선다. 머릿속 그것들은 한 곳으로 모일 것 같다가도 끝내 그리되지 못한다. 그러다 일순 그 옛날의 황산벌로 치달렸다. 그곳 한복판에 서 있을 장군에게, 우리들 모두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노라 외치고 싶었다.
조망이 괜찮다는 황산루도 오르고 싶지만, 이쯤 해서 그만해야겠다. 전과 다름 없이 앞으로도, 나 스스로는 어쩌지 못하는 상황들을 맞게 될 것이다. 어쩌지 못함을 알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되,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용기가, 장군이 그랬던 것처럼 내게도 남길 바란다.
유적지 저 아랫녘, 탑정호라는 이름의 호수가 햇빛에 반짝인다. 순간 한 뼘 시원한 바람이 내 목덜미를 타고 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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