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보고 부끄러웠다"... '텀블러를 집어 던지자'
기후위기와 생태학살로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부정의. 하루하루 현실로 다가오는 생존의 위기 앞에서 과연 다른 세계는 가능할 것인가를 묻는다. 다른 세계는 물론 가능하다고 믿는다. 다만 다른 행성이 아니라 바로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땅과 아직 푸른 하늘과 바다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나무와 새들, 함께 호흡하는 뭇생명들이 공존하는 세계를 함께 상상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용우 기자]
"집주인이 절대 물막이판 설치 못 해주겠대. 뻔하지 뭐. 집값 떨어진다고 그러지. 어제도 손전등 들고 밤새 배수구만 보고 다녔어. 재작년 폭우 때 반지하 살던 일가족이 돌아가셨잖아. 그날 우리 집은 물에 안 잠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죄책감이 들더라. 그 뒤로 폭우만 오면 악몽을 꾸거나 잠을 설쳐."
서울 신림동 반지하 집에 사는 C가 흥분한 채 말을 쏟아냈다. 가만히 듣던 J는 C가 누그러지자, 조심스레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2024.9.7.(토) @서울도심 907 기후정의행진'이 적힌 포스터가 떠 있었다.
"우리 여기 가볼까? 서울에서 한대. 작년에도 몇 만 명씩 모였다는데."
"그렇게 많이 모여? 재밌겠네. 그런데 이렇게 큰 집회는 누가 처음 하자고 했을까?"
"…글쎄?"
포스터 하단에는 행진 슬로건이 큰 글씨로 적혀 있었다.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세계 곳곳에서 모인 활동가들이 같은 구호를 외쳐댔다. 그곳은 2009년 덴마크 코펜하겐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회의장 앞이었다. 1990년대부터 불거진 '기후정의'는 "불평등이 기후위기 원인이자 결과"라 주장하는 정치적 요구다. 미국 환경정의 운동과 남반구 시민사회는 2000년대부터 '기후정의 연대'를 시작했다. 기후변화협약이 북반구 선진국 중심 기술과 시장 논리에 치우쳤다고 보았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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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7월 28일, 영등포역 근처에 자리한 노동자 마을카페 ‘카페봄봄’에서 한재각 기후정의동맹 집행위원을 만났다. |
| ⓒ 용우 |
2019년 3월 15일, 100여 개 국가에서 청소년과 시민 100만여 명이 첫 '기후파업'에 나섰다. 한 해 전부터 스웨덴에서 이어진 '기후를 위한 등교 거부' 시위가 발단이었다. 당시에 15살이던 그레타 툰베리가 시작한 날갯짓이 태풍으로 변해버렸다. 이날 서울 광화문에서도 청소년들이 '기후를 위한 결석 시위'를 주도했다. 한재각은 한국에서도 기후파업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광화문을 찾아갔다. 몇몇 아는 얼굴들도 있었지만, 쭈뼛거리며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다.
"시위를 지켜보는데 부끄러움이 느껴졌어요. 에정연에서 기후변화 강의도 많이 했어요. 정부와 지자체하고 직간접적인 작업도 하고요. 보고서도 내고 토론회도 가서 얘기하는데 진전이 잘 안되는 거예요. '기후 변화 중요하지!'하면서도 결국 '경제 성장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면 기업에 부담이고…' 이런 얘기를 수백 번 반복하는 거죠.
답답한데 나도 타성에 젖어갔어요. 정부가 말 안 듣는다고 풀 죽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랬죠. 사회운동이라는 게 대화가 안 되면 '데모'해야 되잖아요. 그때부터 '청소년들이 데모하네. 우리도 해야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한재각 역시 청소년들을 따라 일사천리로 기후행동에 나섰다. 그해 7월, 그와 동료들은 '기후위기 비상행동(아래 비상행동)'을 결성했다. 두 달 뒤인 9월 21일, 비상행동은 전국 13개 도시에서 '921 기후대중행동'을 동시에 진행했다. 참가자가 7500명에 이르렀다. 100명 이상 모인 적이 없는 기후운동 집회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 해가 지났다. 정부와 국회는 '921 기후대중행동'의 요구안들을 수용하는 듯했지만, 시늉에 불과했다.
2020년 9월, 국회는 '기후위기 비상 상황 대응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고 반년도 지나지 않아 '가덕도신공항 건설을 위한 특별법(아래 가덕도신공항 특별법)'을 가결했다(2021.2.26.). '기후위기 비상 상황'을 선포해 놓고 온실가스를 펑펑 쓰는 신공항 건설을 밀어붙이는 법을 만든 셈이었다. (관련 기사 : 이런 곳에 '공항'이라니... 주민들이 경고하는 까닭 https://omn.kr/2axpu )
2021년, 대통령은 탄소중립을 선언했다. 대통령 직속 '2050 탄소중립위원회(아래 탄중위)'도 구성했다. 탄중위는 목적도 방법도 불분명한 '2030 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 상향안(아래 NDC 상향안)'과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결의하였다(2021.10.18.).
그 무렵, 한재각은 한계와 버거움을 느끼고 에정연 활동을 그만두었다. 연구소를 나와서는 온갖 현장을 찾아다니며 '전문 데모꾼'으로 거듭났다. 시민불복종 네트워크 '멸종저항 한국(현 멸종반란)'에도 가입했다. 멸종저항 동료들과 가덕도신공항 특별법 통과를 주도한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를 점거했다(2021.3.18.). ( 관련 기사: "우리는 왜 민주당사를 봉쇄했는가?" 한재각, 프레시안)
탄중위가 NDC 상향안과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결의한 날, 회의장 건너편에서 한재각은 동료들과 기습 규탄시위를 벌였다(2021.10.18.). 정부는 시민사회의 요구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획들을 원래대로 밀어붙였다.
2021년 연말, 탄중위 해체를 요구하던 '탄소중립위원회 해체 공동대책위원회(아래 공대위)'가 공식적으로 해소를 선언했다. 한재각은 공대위 참여자들과 이듬해 4월, '체제전환을 위한 기후정의동맹(아래 기후정의동맹)'을 출범했다. 기후정의 기치 아래, 자본주의 성장체제에 맞서는 강력한 사회적 연대를 조직하기 위해서였다. '기업 환경주의'나 '부자들의 환경주의'로 기운 주류 기후·환경운동 그룹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기도 했다.
기후정의동맹은 곧바로 대규모 '기후정의' 시위를 비상행동에 제안했다. 2022년 가을, 924기후정의행진이 서울 광화문에서 열렸다. 행진 참가자가 무려 3만 5000명에 달했다. 무리지만 1만 명이라도 모아보자는 바람을 가뿐히 넘은 숫자였다. 그 뒤로 해마다 시민 수천에서 수만 명이 참가하는 '기후정의파업'과 '기후정의행진'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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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년 3월 15일, 한재각은 멸종저항(현 멸종반란) 회원들과 가덕도 신공항 철회를 요구하며 더불어 민주당 중앙당사를 점거했다. 농성에 참가한 활동가 6명 모두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날은 한재각이 2019년 315 기후결석시위에 참석한지 만 2년이 되는 날이었다. |
| ⓒ 한재각 |
'정의로운 전환'은 에너지 체제 전환 과정에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노동자, 지역사회, 취약계층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한재각은 에정연 초기부터 정의로운 전환 관련 연구와 활동을 이어왔다. 폐쇄를 앞둔 석탄발전소 노동자들을 만나러 다니기도 했다. 김영훈 공공운수노조 한전KPS비정규직지회장은 태안 석탄발전소 하청업체 노동자였다. 그는 조합원들도 잘 챙기고, 노조 활동에 열심이었다. 한재각은 언젠가 김영훈 지회장에게 '왜 이렇게 열심히 하냐?'고 물어보았다.
"'억울해서요'라고 하더라고요. 자기는 가족들도 다 태안에 있어서 태안이 편하대요. 입사할 때는 잘하면 정규직 전환도 된다고 들었다고. 막상 들어갔더니 같은 일을 하는데도 자기들은 물건 같이 취급하더래요. 오랫동안 억울함이 계속 쌓여 왔겠죠. 노동 문제, 지역 소외, 발전소 폐쇄라는 이 상황들이… 열심히 일했는데 갑자기 발전소가 없어지고, 이제부터 나오지 말라고 하니까. 그렇다고 대책을 세워주지도 않았잖아요."
지난 7월 28일, 영등포역 근처 한 카페에서 그와 두 번째 인터뷰를 가졌다. 그날은 '공공재생에너지법 제정에 관한 청원'을 국회로 회부한 날이었다(51431명 동의,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한재각은 공공재생에너지법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3가지로 꼽았다.
"첫째, 기후위기 빨리 막기 위해서 재생에너지 비율을 늘려야 한다. 둘째, 재생에너지 늘리되 민영화를 막고 공공화해야 한다. 셋째, 그래야 발전 노동자들 일자리를 지킬 수 있다."
텀블러를 집어 던져라
"…상위 부자 1%가 하위 10%보다 평균적으로 175배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하고 있다. […] 화석연료와 자동차 기업을 비롯한 100개 대기업이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의 71%를 배출한다. […] 한국의 경우 10개의 대기업의 배출량이 무려 전체의 46%를 차지한다. […] 당연하게도 자본과 부자들에게 탄소 배출의 압도적 책임이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탄소중립을 위해 개인적 실천이 중요하다며 그 책임을 n분의 1로 배분한다. […] 이메일 지우기, 쓰레기 줍기, 재활용, 불 끄기, 텀블러 사용, 지구의 날 행사와 같은 실천들을 강조한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파종하고, '개인적 만족감'을 수확한다." -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이송희일, 도서출판 삼인, 2024.) 101쪽
"예전에 강의를 했는데, 오신 분들이 기후위기 교육을 꽤 많이 받으셨더라고요. 거기서 '그럼 우리는 뭘 해야 되느냐?'는 얘기가 나왔어요. 제가 '데모하고 행동해야 된다. 집에서 맨날 플러그 잘 뽑고 그런다고 될 문제는 아니다'고 했어요. 그때 어떤 분이 이랬어요. '이 텀블러 아무리 들고 다녀도 다 쓸모가 없어.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더라.' 그러니까 어떤 분이 이렇게 답을 했어요. '쓸모 있다. 이걸 집어 던지면 된다!' 그래서 제가 '어디다가요?' 하고 얘기했어요.(크게 웃음)"
한재각은 그동안 기후정의행진을 이어오며 성과도 있지만, 한계도 있다고 시인했다.
"기후운동이 현재의 불평등한 자본주의 성장 체계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명확하게 얘기하고, 누구나 기후정의, 기후 불평등, 기후부정의를 얘기하도록 사회적 흐름으로 만들었다는 게 성과라면 성과죠. 근데 '그 주장대로 이 사회 질서와 체제를 조금이라도 바꾸고 있느냐?' 이런 생각이 들면 갑갑하죠.
당장 올 12월에 태안 화력발전소 폐쇄를 앞두고 있는데 대책이 없거든요. 몇 년째 공공재생에너지법을 밀어붙이면서 싸우고 있지만 정부는 꼼짝도 안 하고 있어요. 얼마 전 김충현 노동자 사망에서도 보듯이 현장은 과거에 부정하고 불평등한 그 일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유지되고, 또 누군가 목숨들을 앗아가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그와 두 번째 만난 그 다음날, 30대 노동자가 동해석탄발전소에서 작업 중 8m 아래로 떨어져 숨졌다. 앞서 6월 2일에는 태안석탄발전소 하청노동자 김충현이 홀로 작업하다가 기계에 끼어 목숨을 잃었다. 김충현은 김영훈 지회장의 동료였다.
무수한 참가자들이 도로에서, 무대 위에서, 트럭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발언했다. 청소년 한 무리가 흰 티셔츠를 맞춰 입고 인도 위에서 경쾌한 율동을 선보였다. 길 한편에서 머리에 꽃을 꽂고 화려한 의상을 입은 이들이 훌라를 췄다. "수라 갯벌 지키자" "땅도 사람도 착취 말라. 주거권 쟁취!"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갖가지 구호와 요구가 피켓과 현수막, 유인물, 포스터 속에서 흘러넘쳤다.
고개를 돌리니 유명 야구선수 이름을 쓴 유니폼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천취소, 그다음엔? 폭염취소 그다음엔?" "지구 없이 야구 없다" 손팻말을 들고 야구 유니폼을 입은 이들은 크보플 회원이었다. 크보플은 '지속가능한 야구를 위해 행동하는 야구팬들의 모임(KBO fans 4 planet)'을 줄인 말이다. 작년 9월 7일, 서울 강남 한복판 4차선 도로 위에서 그들을 마주했다. 모두 '907기후정의행진'에 나선 이들이었다. 한재각은 그 행진에서 크보플 회원들을 본 일이 의외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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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년 9월 7일, ‘지속가능한 야구를 위해 행동하는 야구팬들의 모임’ 크보플(KBO FANS 4 PLANET) 회원들이 서울 강남대로에서 열린 ‘907 기후정의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
| ⓒ 용우 |
돌이켜보면 북반구 선진국, 자본가, 상류층 같은 '갑'들이 자연과 인간을 착취하고 온실가스를 압도적으로 배출해 왔다. 대신 그 피해는 책임이 적은 '을'들에게 더 먼저 크게 다가왔다. 그 '을'은 남반구 국가들, 노동자, 하층민은 물론 지구 생태계 전체를 포함한다. 한국에서도 폭우와 한파는 반지하, 고시원, 비닐하우스 숙소에 사는 세입자와 이주민들의 목숨부터 먼저 앗아갔다.
그다음은 누구 차례일까. 화성 기지나 초호화 벙커로 기후위기를 회피하려는 부자가 아니라면 대부분 '을'에 가까울 테다. 9월 27일은 서울 광화문에서 또다시 '927 기후정의행진'이 펼쳐지는 날이다. 억울한 '을'들이 거리에 나설 때가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거리에 나서는 데만 그치지 말자. '을'들의 요구가 잘 관철되는지, 실제로 세상이 바뀌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2023년에 발의한 탈석탄법(석탄발전 퇴출 및 공정전환 지원 특별법)은 아직도 국회에 계류 중이다. 공공재생에너지법(공공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기본법)은 이제야 국회에 회부했을 뿐이다. 두 법을 제대로 제정하고, 그 법을 제대로 시행하는지도 감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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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월 28일 927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 주최로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927기후정의행진 선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927기후정의행진 의미와 계획를 발표하고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
| ⓒ 이정민 |
덧붙이는 글 | - 국회전자청원 홈페이지 '공공재생에너지법 제정에 관한 청원' 링크 https://petitions.assembly.go.kr/proceed/onGoingAll/3791FDDC3FA4639BE064B49691C6967B - '927 기후정의행진' 안내 : 2025년 9월 27일(토) 서울 도심(동십자각) - 기획 공동진행 : (사)세상과함께,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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