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과 파멸을 모두 경험하는 인물이 되다! 여성 1인극 [프리마 파시]의 주인공 김신록의 연기론은?


Q : 오늘 대화는 ‘I am here’ 이 구절에서 시작하고 싶어요. 스스로를 정의하는 단어를 보내달라고 사전에 요청드렸죠. ‘here’라는 단어를 선택한 까닭은요?
A : 요즘 연습하는 〈프리마 파시〉라는 연극의 영문 대본에 “I am here”라는 대사가 있어요. 극에서 어떤 큰일을 겪은 주인공이 그 일에 대하여 침묵할 것인가, 맞설 것인가를 고민하며 내뱉는 말이죠. 그러고는 행동을 해나가기 시작해요. 저는 이 말이 어떠한 마음가짐과 행동을 하는 데 있어 주요한 발화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은 공연을 한 달 정도 앞둔 시기기도 한데요, 마치 수능 시험을 한 달 앞둔 수험생처럼,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지금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합니다.(웃음)
Q : 아무래도 한 달 전이면 연습하느라 한창 바쁘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오가는 때죠?
A : 맞아요. 잘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드는 한편, ‘어떻게 하지? 망하는 것인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거든요.(웃음) 지금은 그저 답을 열심히 찾아가고 있어요.
Q : 연극 무대에 많이 오른 배우에게도 어렵고 헤매는 순간이 있네요.
A : 그럼요. 이 작품은 인터미션 없이 1막과 2막으로 나눠져 있어요. 성공을 좇던 변호사 ‘테사’의 삶을 흔드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이후의 삶인데, 그 두 세계관이 완전히 달라요. 1막의 ‘테사’는 이성 중심적이고 세상을 야심만만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그 이후엔 성폭행 피해자가 되어 완전한 멸망과 파멸을 경험하죠. 몸으로 표현하는 것도 1막보다 훨씬 감각적이고 울퉁불퉁한 움직임을 보여줘야 하고요. 그래서 1막과 2막을 한 번에 거쳐야 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져요.

Q : 1인극이자 인물의 양극화된 삶과 감정을 표현하는 만큼 연기적인 스킬부터 감정의 표현까지, 굉장히 치밀한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A : 일단 대본이 90페이지예요. 그 분량을 외우는 것 자체부터 너무나 큰일이죠.(웃음) 전 연습실에서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하는데, 그 시간 안에는 연습실에 미리 가서 누워 있고,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잠시 휴대폰도 보는 것까지 포함돼 있어요. 연습에도 예열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저와 연습실의 이 관계부터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전까지는 연습실이 너무나 편안하고 놀기도 하는, 제게 일종의 해방감을 주는 공간이었다면 이제는 바로 연습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아요. 더 치열하게 몰입할 수 있게요.
Q : ‘테사’로 몰입해가는 과정에 있는 김신록의 순간도 궁금한데요.
A :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는 단순히 연기가 좋아서 그 인물 같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테사’의 삶이, 그가 던지는 화두가 진실성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어요. 이건 분명 다른 종류의 진실감인 것 같거든요. 〈프리마 파시〉라는 연극이 1인극이다 보니 ‘테사’라는 인물을 굉장히 치열하게 다루고 있고, 결국 ‘테사’를 통해 한 세계를 대변하는 것과 같아요. 그 힘이 어떻게 하면 이야기 속에 파묻히지 않으면서, 또 너무 계몽적이지 않으면서도 진실하게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싶죠.
Q : 〈프리마 파시〉는 한 인물의 삶을 그리지만 관객들은 이 이야기의 단면을 통해 우리가 처한 현실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A : 맞아요. 굉장히 정교하게 쓰인 작품이에요. ‘테사’를 함께 연기하는 이자람·차지연 배우도 굉장히 훌륭하고요. 각자 이 작품을 뚫어내는 방식이 너무 달라 연습하면서 매일 경탄과 좌절을 느끼고 있어요.(웃음) 그만큼 멋진 여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쁘고, 빌빌대지 말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느껴요.
Q : 김신록, 이자람, 차지연. 세 배우 사이에 얼마나 강렬한 힘이 오갈까 싶어요.(웃음)
A : 힘도 힘이지만, 위기감도 있어요.(웃음) 그렇다고 비교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위기감이 아니라, 이 배우들 사이에서 나도 관객들에게 좋은 퀄리티의 작품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기분 좋은 자극이죠. 연습 초반에 이자람 배우가 자신이 알고 있는 좋은 것들은 모두 다 나눠주겠다고 말해준 적 있는데, 너무 고마웠어요. 저도 그런 존재가 돼주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저희가 서로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게 참 좋더라고요.
Q : I am here. 스스로 이 감각을 가장 크게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A : 연기하는 순간, 그 자체가 아닐까 싶어요. 연극을 앞두고 있으니 여기에 빗대어 이야기한다면, 암전하고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의 순간. 조명이 켜지고, 다시 암전되기 전까지는 오로지 제가 다 해내야 하는 거예요. 중간에 헤매든, 대사를 까먹든, 그래서 공연을 망치든 책임감을 가지고 온전히 제 몫을 해내야 하죠. 그러니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는 감각을 가지고 연기에 임해요. 이 태도는 삶에 있어서도 좋은 훈련인 것 같아요. 어렵고 혼란스러운 일이 있을 때, ‘지금 내가 여기에서 뭘 해야 하지?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하고 하나씩 자각하면서 정신을 차리는 거죠.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은 차분하게 제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요.

Q : 연기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가르침도 주는군요.
A : 결국 연기도 인간의 삶을, 그러니까 한 세계를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그리는 일이잖아요. 덕분에 살아가는 데 있어 좋은 훈련을 하는 셈이죠.
Q : 연극 무대로 향하기 직전까지 영화와 드라마에서 수많은 인물로 분했어요. 〈스위트홈 시즌2·3〉의 ‘지반장’부터 〈지옥〉의 ‘박정자’, 〈설계자〉의 ‘양경진’, 올해 〈언더커버 하이스쿨〉의 ‘서명주’와 〈당신의 맛〉의 ‘진명숙’까지, 모두가 다른 색인데 하나같이 짙은 채도를 지녔죠.
A : 돌이켜보면 얼~마나 행운이에요? 정말 감사하죠. 쉬지 않고 작업을 해왔는데, 다 재미있는 역할들을 한 것 같아요. 힘 있고 극단적인 인물이 많기도 했는데 그래서 기억에 많이 남기도 해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힘과 연극을 할 때 쓰는 힘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그 다름과 일상의 리듬을 이리저리 오가며 밸런스를 지키고, 안정적으로 스스로를 이끌고 버티는 법을 배울 수 있었어요.



Q : 그 밸런스 사이에서 영화 〈프로젝트 Y〉에선 또 어떤 색을 보여줄지 무척 기대돼요. ‘미선(한소희)’과 ‘도경(전종서)’의 선배 ‘가영’을 연기하죠?
A : 〈프로젝트 Y〉는 두 여성이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주체적으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예요. 이 시대의 아이코닉한 두 배우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 굉장한 쾌감을 주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요. 이 영화는 장면의 구성이나 이야기의 구조를 보면 거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소희, 전종서 이 두 배우와 함께 기존에 봐왔던 작품들의 인상을 어떻게 전복시킬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작업했어요. 새로움을 보여주고자 노력한 여자 배우들의 기세를 기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웃음)
Q : 김신록은 2004년 연극 〈서바이벌 캘린더〉를 시작으로 차근차근 영화와 드라마라는 매체 연기까지 스스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온 배우예요. 꾸준함과 지구력이 굉장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A : 전 ‘혼밥’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일을 가는 와중에 잠시 김밥집에 들러서 혼자 후루룩 먹는 걸 즐기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밥만 먹으라고 하면 그건 지루해서 절대 다 먹지 못할 거예요. 김밥을 먹으면서 메시지도 보내고, 다이어리도 정리하고, 아이패드를 켜서 메일도 확인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런 제 모습을 보면 어쩜 이렇게 참을성이 없을까 싶어요.(웃음) 그런데 연기는 20년 동안 해오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아마 연기는 스스로 스테디하게 같은 일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큰 바운더리에 두고 봤을 때 그걸 ‘연기’라고 부르는 것뿐이지, 저는 매 작품 다른 인물을 연기하면서 계속 한눈을 팔며 다양한 일을 해왔다고 느끼는 거죠. 이런 작품 해보고 싶다, 저 희곡이 궁금하다, 저런 인물도 연기해보고 싶다. 이런 작은 마음들의 연결이 결국 연기라는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Q : 연기를 시작했을 무렵, 스물다섯의 김신록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마침 〈코스모폴리탄〉도 올해 스물다섯 번째 해를 맞이하거든요.
A : 대학교를 졸업하고 이런저런 인턴을 하다가 대학로에서 연극으로 데뷔했어요. 연극영화과 출신이 아니었고, 연극 경력도 없었지만 운 좋게 주인공으로 바로 연기를 할 수 있었죠. 그러니 결과가 뭐 얼마나 좋았겠어요.(웃음) 당시 연출가님이 이 일을 꾸준히 하고 싶다면 연극에 대해 공부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해줬어요. 그 말을 듣고 바로 연극영화과 석사 시험을 준비해, 가을 학기에 한양대를 갔어요. 그렇게 연극과 학업을 동시에 병행하면서 치열한 하루하루를 보냈죠. 연기도 해야 하고, 학교도 다녀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는데 뭐 하나 흔쾌히 되는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시켜만 주면 나 잘할 수 있는데!’ 하는 무모하고 막연한 욕심에 휩싸여서 고통스럽기도 했고요. 불운하고 불행하다는 감정에 빠져 있던 시기였죠.

Q : 그 시기를 어떻게 통과해온 것 같나요? 스물다섯 김신록이 했던 고민을 이 세대의 누군가가 또 하고 있을 거란 말이죠.
A : 제 안의 취약성이 극복되기 시작한 건 30대부터인 것 같아요. 아까 저희가 이야기 나누었던 ‘I am here’처럼 스스로 치열하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시간을 그때부터 갖게 됐어요. 무작정 ‘시켜주면 잘할 수 있는데!’의 마음이 아니라, ‘뭘 잘할 수 있는데?’, ‘주인공을 시켜주면!’, ‘주인공이 뭔데?’, ‘작품 안에서 대사가 제일 많고, 가장 중심이 되는 것’, ‘그렇다면 주인공이 되기 위해 무얼 해야 하고, 뭘 더 공부해야 할까?’, ‘화술, 발성, 노래?’ 이런 식으로 질문을 촘촘하게 던지고 즐겁게 천착해서 들어갔던 것이 되레 저에게 자유를 준 것 같아요. 뭐랄까 좀 더 코어가 있는 욕망을 갖게 되고, 그걸 성취하기 위한 힘을 쓰기 시작하니까 헛힘을 덜 쓰게 된 거죠. 자연스럽게 자신감도 생겼고요.
Q : 〈코스모폴리탄〉이 지향하는 여성, ‘FUN FEARLESS FEMALE’ 그 자체의 마인드네요. 김신록의 언어로 ‘FUN FEARLESS FEMALE’을 정의해본다면요?
A : ‘Unanswerable’, 답을 내릴 수 없는 존재라 말하고 싶어요. ‘FUN’하다는 건 옳고 그름, 맞고 틀리고를 따지는 시선에서 자유로울 때 ‘FUN’한 감각이 비롯되는 것 같아요. ‘FEARLESS’도 자신이 이렇게 단죄될 거라는 시선에서 자유로울 때 비로소 가능한 상태고요. 쉽게 판단하고 답을 내릴 수 없는 것을 믿는 힘이 ‘FEARLESS’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정해진 답이 없는 세계에 저는 더 발을 내딛고 싶고, 그 안에서 무한한 자유와 위로가 있다는 걸 느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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