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韓 경제 ‘피스메이커’ 될까

명순영 매경이코노미 기자(msy@mk.co.kr), 김경민 매경이코노미 기자(kmkim@mk.co.kr), 나건웅 매경이코노미 기자(wasabi@mk.co.kr), 반진욱 매경이코노미 기자(halfnuk@mk.co.kr) 2025. 9. 1.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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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정상회담 이후…
‘숙청이나 혁명(a Purge or Revolution).’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이 열리기 불과 몇 시간 전, 이런 강경한 단어들을 트루스소셜에 남겼다.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마치 숙청이나 혁명이 벌어지는 것 같다”며 “이런 상황에서는 그곳(한국)에서 사업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교회와 미국기지에 대한 압수수색을 지목한 것으로, 한국에서 진행 중인 특검 수사를 비판한 발언으로 추측됐다. 이때만 해도 한미정상회담은 가시밭길을 걸을 줄 알았다. 트럼프 특유의 기선제압용 발언인지, 아니면 한국의 이재명정부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한미정상회담에서 선방했다. 양 정상이 서로를 치켜세우며 내내 우호적인 분위기가 이어졌다. 무역협상, 북한, 주한미군 등 민감한 주제에 대해 폭넓게 얘기를 나누면서도 첨예한 대립은 없었다. 블룸버그통신은 “트럼프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은 북한, 국가안보, 조선업 분야에서 긴밀한 협력을 위한 낙관적인 입장을 표명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이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고 ‘우리는 당신과 100% 함께한다’고 말하기도 했다”며 “이는 그(트럼프 대통령)가 이날 오전 한국의 정치적 안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수십년 된 동맹국과의 긴장을 악화시켰던 발언과는 대조적”이라고 짚었다.

최고 관심사는 역시 경제였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이 나름 불확실성을 제거했다는 평가가 주류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 이후 백악관 집무실에서 한국과 무역합의에 도달했냐는 취재진 질문에 “그렇다 우리는 거래를 완료했다고 생각한다”며 “그들은 몇 가지 문제를 제기했지만, 우리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we stuck to our guns)”고 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은 (과거에) 합의했던 대로 거래를 마칠 것이다”며 “이것(한국과의 무역합의)은 유럽연합(EU)과 함께 역대 최대 규모의 합의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앞서 양국은 한국이 미국에 3500억달러 대미 투자 펀드를 구성하는 등의 조건으로 미국이 한국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기로 합의했다. 지난 7월 합의 이후에도 대미 투자 방식과 농산물 시장 개방 등에 대해서는 이견이 남은 것으로 보였는데, 트럼프 발언은 ‘한국 정부가 문제제기를 했지만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간다’는 얘기로 들린다.

‘과거 합의대로’ 하기로 한 것은 어느 정도는 한국이 바라던 일이다. 한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운 요구 사항을 내놓을까 노심초사했기 때문이다. 농산물 추가 개방이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감축 등의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는 점은 안도할 만한 대목이다.

무역합의 깨는 트럼프 발언 없어

이 대통령 “마스가, 기적 현실로”

이번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은 경제협력의 큰 틀을 매듭지었다.

이미 알려진 대로 한국의 핵심 카드는 조선이었다. 한국은 무너진 미국 조선업을 재건시키고자 하는 트럼프 대통령 의중을 정확하게 찔렀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과의 협력을 통해 미국에서 선박이 다시 건조되길 바란다”며 “미국 조선업을 한국과 협력해 부흥시키는 기회를 얻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조선 분야뿐만 아니라 제조업 분야에서도 르네상스가 이뤄지고 있다”고 화답했다. 정상회담을 계기로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 재건)’ 기조가 정례 의제로 올라섰다는 평가다.

한화는 ‘마스가’ 프로젝트를 현실화하기 위해 미국 필라델피아 필리조선소 현대화에 50억달러(약 7조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이번 투자로 연간 한 척 수준인 선박 건조 능력을 스무 척까지 늘린다는 계획이다. 한화그룹은 8월 26일(현지시간) 필리조선소(한화필리쉽야드)에서 미국 해사청이 발주한 ‘국가안보 다목적 선박’ 3호선 ‘스테이트 오브 메인(State of Maine)’호 명명식에서 이 같은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번 투자에 활용되는 50억달러는 한미 상호관세 협상이 타결될 때 지렛대 역할을 한 조선산업 협력 투자펀드 1500억달러가 그 재원이다.

단일 조선소 기준 수주량 세계 1위 HD현대중공업, 중형 선박 점유율 세계 1위 HD현대미포가 합병을 발표했다. 방산 사업을 확대하고 한미 조선 협력 사업인 ‘마스가’에도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HD현대는 현지 조선소 인수 등의 방안을 추진할 듯 보인다. HD현대는 서버러스캐피탈, 한국산업은행과 ‘한미 조선 산업 공동 투자 프로그램 조성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주요 투자 분야는 미국 조선소 인수·현대화와 공급망 강화를 위한 기자재 업체 투자, 자율운항·인공지능 등 첨단조선기술 개발 등이다.

원자력 분야에서는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두산에너빌리티, 엑스에너지(X-energy), 아마존웹서비스가 소형모듈원자로(SMR) 설계, 건설, 운영, 공급망 구축, 투자 및 시장 확대 협력에 관한 4자간 MOU를 맺었다. 엑스에너지는 뉴스케일, 테라파워와 더불어 미국의 3대 SMR 개발사로 손꼽힌다. 두산에너빌리티와 미국 민간 에너지 개발 사업자인 페르미아메리카는 미국 텍사스주에 추진 중인 ‘AI 캠퍼스 프로젝트’에 공급할 대형 원전과 SMR 기자재 관련 포괄적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MOU를 체결했다. 이와 관련 한수원, 삼성물산과 페르미아메리카는 ‘AI 캠퍼스 프로젝트’ 건설 등 원활한 사업 추진을 위한 협력 MOU에 서명했다.

대한항공도 시원하게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보잉사로부터 약 50조원 규모, 항공기 103대를 구매하는 대형 계약을 체결했다. 대한항공 항공기 구매 계약 중 역대 최대 금액이다. 이와 더불어 GE에어로스페이스와 1조원 규모 예비 엔진 구매 및 18조2000억원 규모의 엔진 정비 서비스도 추진한다. 고려아연은 글로벌 방산 기업인 록히드마틴과 게르마늄 공급 구매 및 핵심 광물 공급망 협력을 위한 MOU를 맺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AI·반도체·조선·원전·콘텐츠 등 거의 전 산업 분야에서 협력 방안이 논의됐다”며 “이번 회담을 계기로 총 11건의 계약과 MOU가 체결됐다”고 성과를 설명했다.

산업별 기상도

이번 회담은 시작 전부터 엄청난 관심이 쏠렸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발언 하나에 조선·반도체·자동차·철강 등 국내 주요 산업 ‘향방’이 갈릴 수 있어서다. 특히 정책 일관성이 떨어지고, 때에 따라 약속도 쉽게 뒤집는 트럼프 대통령 특성상 어렵게 합의한 관세 협상안이 파기될 가능성도 흘러나왔다.

국내 산업계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예상을 깨는 ‘돌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조선업처럼, 회담이 오히려 호재로 작용한 업종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언급한 덕에 한·미 조선업 협력 상징인 ‘마스가’ 프로젝트가 탄력을 받게 됐다. 원전·방위 산업 등 업종은 트럼프 대통령 언급은 없었지만 실무자급 회담에서 여러 협력 방안이 쏟아지며 성과를 얻게 됐다. 다만, 철강·바이오·농식품 등은 이번 회담에서 반전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매우 맑음 | 조선업

트럼프가 직접 협력 재확인

한미정상회담 최고 수혜 업종은 단연 조선업이다. 한미 양 정상이 유일하게 직접 언급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여타 산업과 달리 “무조건 미국에서 생산하라”는 트럼프 대통령 압박도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조선사의 대미 투자를 강조하면서도, 필요하면 한국에서 건조한 선박을 사겠다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회담 후 이어진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에서는 국내 조선사들과 미국 업체 간 MOU가 연이어 성사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조선 업계에 강한 ‘러브콜’을 보냈다. 그는 “한국은 선박을 매우 잘 만들며, 우리는 한국 선박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어 “2차 세계대전 때 하루에 한 척을 건조했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선박을 건조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선박을 살 것이지만, 한국이 여기(미국)에서 우리 노동자들을 통해 선박을 만들게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조선업에 대한 투자를 요구하는 동시에 한국산 선박 구매 의지도 동시에 드러낸 셈이다.

미국 선박 시장 진출을 타진해온 조선 업계는 트럼프 발언에 반색했다. 미국은 사실상 조선업이 붕괴된 상태지만, 자국 해양 산업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시장을 다른 나라에 완전히 개방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존스법과 반스-톨레프슨 수정법이다. 존스법은 미국 내 항구를 항행하는 배는 미국산 선박만 가능하다는 내용이 골자다. 반스-톨레프슨 수정법은 미국 해군 함정 건조에 타국 회사의 참여를 막는 법이다. 두 법에 따라 타국 조선사가 미국에 상선과 군함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미국 내 조선소를 보유해야만 한다.

현지 조선 업계 반발로 두 법이 좀처럼 개정·폐지되지 않으면서 한국 조선업 염원인 ‘미국 시장 직진출’은 오랜 기간 이뤄지지 않았다. 한화오션처럼 현지 조선소를 인수하는 방식 외에는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회담 결과로 판이 바뀌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목표 달성을 위해 기존 정책 고려나 관행을 완전히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인물이 직접 한국산 선박을 구매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만큼, 확고한 변화가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커졌다. 행정 권한을 활용해 한국산 선박 구매를 허용하거나 의회 다수당인 공화당을 설득해 법 개정을 추진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 국내 조선 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현재 해군 군함만 부족한 게 아니다. 상선부터 북극항로 개척에 필요한 쇄빙선 등의 수요도 상당하다”며 “시장만 개방되면 한국 업체에는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국 정부도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다. 회담이 끝난 8월 26일 이재명 대통령은 한화 필리조선소를 방문해 국가안보다목적선 ‘스테이트 오브 메인호’ 명명식에 참석했다. 이날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동석한 미 정부 인사들에게 한국 기업 투자의 원활한 진행, 또 미국에서 사업 운영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제도적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회담 이후 마스가(MASGA) 프로젝트의 상징인 한화 필리조선소를 방문했다. 조선업은 이번 회담에서 계속 화두로 떠오르며 최대 수혜주로 뽑혔다. (매경DB)
맑음 | 원전·에너지·방산

미국 시장 진출 교두보 마련

조선업 다음 수혜주로 꼽히는 분야는 ‘원전 산업’이다. 양국 정상은 조선 협력 다음으로 원전 협력과 관련된 논의를 이어갔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양국은) 원자력 협력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논의를 했다. 앞으로도 원자력 협력과 관련한 양국의 추가적인 협의가 이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회담 이후 후속 조치가 즉각 이어졌다. 한수원, 두산에너빌리티 등 한국 기업은 미국 기업들과 MOU를 맺으며 미국 소형모듈원자로(SMR)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한수원은 미국 우라늄 농축 공급사인 센트러스와 우라늄 농축설비 구축 투자 협력을 위한 MOU도 체결하고 농축우라늄 공급 물량 확대 계약을 맺었다. 두산에너빌리티 역시 미국 민간 에너지 개발사업자인 페르미아메리카와 미국 텍사스주 ‘AI 캠퍼스 프로젝트’에 공급할 대형 원전과 SMR 기자재 관련 포괄적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양해각서를 교환했다. 이들 MOU는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체결됐다.

여타 에너지 산업도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다. 한국은 원유는 사우디(36%), 액화천연가스(LNG)는 호주(23.6%)와 카타르(19.5%) 등 특정 국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다. 지난 관세협정과 이번 정상회담 결과, 알래스카 석유와 미국산 LNG 관련 계약이 체결됐고 도입선 다변화 가능성을 열었다. 알래스카 석유 개발 사업 수익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한전·한수원을 비롯해 정유 업계 원가가 안정될 것이라는 기대는 커졌다.

회담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방위 산업에도 기회가 열릴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양국이 ‘동맹 현대화’라는 틀에서 실질적 협력 강화에 뜻을 모은 덕이다. 방산 업계는 내수와 수출 모두 수혜를 기대하는 눈치다. 이 대통령은 동맹 강화를 선언하며, 국방비 인상을 공식화했다. 국방비 증대는 국내 방산 업체 주요 고객인 한국군 씀씀이가 커진다는 뜻이다. 내수 시장에서 매출 확대를 기대해볼 만한 대목이다. 미국 방산 업체를 대상으로 한 수출 확대 기대 역시 커지는 분위기다. 트럼프 대통령이 보잉과 GE 등 미국 기업 협력 강화를 강조하며 한국 방산·항공·우주 기업과 부품사 수혜가 전망된다.

방산과 연관이 깊은 광물도 반사이익을 볼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게르마늄과 갈륨 등 방위 산업과 항공우주 산업에 필수인 희소금속 수출 제한 조치를 시행 중이다. 미국 기업은 중국을 대체할 새로운 공급처를 희망했고, 이번 회담을 통해 한국 기업 고려아연을 공급처 중 하나로 선정했다.

고려아연은 워싱턴에서 록히드마틴과 ‘게르마늄 공급·구매와 핵심 광물 공급망’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민간 차원 전략 광물 협력을 강화하는 첫 사례다. 게르마늄은 야간투시경·열화상카메라·태양전지·고성능 반도체 소자 제조 등에 필수적인 전략 광물로 방위·우주·반도체 산업 핵심 소재다. 특히 적외선 광학 장비와 위성통신 시스템에 사용되는 소재라 록히드마틴 같은 글로벌 방산 업체에는 필수 원료다.

살짝 흐림 | 반도체·자동차·바이오

이재용·젠슨 황 포옹했지만…

반도체와 자동차 등 기존 한국 주력 산업은 선방했다는 평가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들 산업을 겨냥한 ‘새로운 과한 요구’를 따로 말하지 않아서다. 단 말 그대로 ‘선방’일 뿐, 새로운 호재나 개선 방향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반도체 업계 화색이 돌 만한 풍경이 펼쳐졌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서로 포옹하며 인사한 것. 한국과 미국 반도체 기업 간 협업 분위기를 달구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해당 사진이 공개된 후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고대역폭메모리(HBM) 납품하는 날이 머지않았다는 기대가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포옹 이후 별다른 희소식은 아직 없다. 삼성전자의 텍사스주 테일러 반도체 공장에 대한 추가 투자 소식 등 양국 간 반도체 기업 협력의 구체적인 계획이 제시되진 않았다. 기존 협력 방안에 대한 추가 논의만 진행됐다.

가장 뜨거운 화두인 ‘보조금 지급’ 이슈도 해결하지 못했다. 미국 정부는 6월 미국 내 투자하는 반도체 업체에 지급하기로 한 보조금과 관련, 재협상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8월에는 보조금을 현금 공여가 아닌 주식 매입 형태로 전환할 계획을 공개했다. 미국 정부가 보조금 지급 대가로 회사 지분을 요구하면, 반도체 기업 보조금 셈법은 복잡해진다. 또 앞선 실무 협상에서 확인한 ‘최혜국대우’ 합의에 대한 문서화도 이뤄지지 않았다.

자동차는 ‘관세 15% 명문화’가 불발되며 아쉬움을 삼켰다. 양국은 무역 합의를 통해 15%로 자동차 관세율을 낮추기로 했지만, 기업들은 여전히 25%의 관세를 부담하고 있다. 미국 세관이 적용할 수 있는 명문화된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관세 부담 속, 자동차 대미 수출은 급감하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 7월 대미 자동차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4.6% 감소했다. 특히 한국이 미국에 수출한 전기차 신차 대수는 164대로, 전년 같은 달(6209대) 대비 97.4% 급감했다. 미국 현지 생산이 늘고, 판매가 줄어든 결과다. 현대자동차, 기아와 같은 개별 기업은 미국 내 생산을 증가시켜 피해를 최소화했다. 하지만 이들 기업 국내 공장에 납품하는 여타 협력사들은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바이오 업계는 긴장감 해소에 실패했다. 미국은 현재 수입 의약품에 고율 관세 부과를 검토 중이다. 이번 회담에서 의약품 관련 관세 이야기는 별도로 논의가 없었다. 국내 의약품 수출 물량 중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가 미국이다. 의약품에 고율 관세가 부과되면 한국 바이오 업체엔 타격이 크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젠슨 황 엔비디아 CEO의 포옹 장면은 반도체 업계서 화색이 돌 만한 명장면이었다. 그러나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서 반도체 관련 추가 MOU는 따로 나오지 않았다. (매경DB)
흐림 | 철강·농식품

철강, 관세 이야기도 못 꺼내

관세협정서 50% 관세 폭탄을 맞으며 가장 큰 직격탄을 맞았다고 평가받는 철강·알루미늄 업계는 이번 회담에서 역시 웃지 못했다. 관세 인하 대상에서 빠진 두 품목은 정상회담에서도 찬바람 신세였다.

철강과 알루미늄 관세 분야는 아예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당초 장인화 포스코그룹 회장이 경제사절단에 포함되는 방안이 거론됐으나, 미국 측에서 ‘철강·알루미늄 관세는 협상 여지가 없다’고 밝힘에 따라 동행이 불발됐다. 관세 관련 발언 기회조차 뺏긴 철강 업계는 황망한 분위기다. 현대차그룹과 포스코가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270만t 규모 일관제철소 건설 투자 계획까지 세웠지만 미국은 요지부동이다.

관세 폭탄을 맞은 철강·알루미늄 업계는 최대 위기를 겪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7월 한국의 대미 철강 수출액은 2억8341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3억8255만달러)보다 25.9% 감소했다. 이 같은 감소폭은 2023년 1월 이후 2년 6개월 만에 가장 큰 낙폭이다. 수출액 기준으로는 2021년 3월 이후 4년 4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물량 기준으로 보면 7월 대미 철강 수출은 19만4000t으로 작년 동월과 비교해 24% 줄었다. 이 같은 수출량은 2023년 1월(17만4000t) 이후 2년 6개월 만에 가장 적다.

농식품 산업을 둘러싼 분위기도 좋지 않다. 정상회담에서는 언급을 피했지만, 이어진 실무 회의에서 미국은 노골적으로 농축산물 시장 개방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회담 후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서 “미국은 시장 개방을 원하고 있다. 우리 농민과 제조업자, 혁신가를 위해 시장을 계속 개척해나갈 것”이라고 발언했다. 향후 지속적으로 한국 농축수산물 시장 개방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반면, 한국산 농식품에 부가된 15% 추가 관세는 철폐되지 않았다. 농식품 관련 추가 논의 없이 기존 내용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최근 미국 수출이 늘고 있는 라면 등 K푸드 산업에는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특히 불닭볶음면을 앞세운 삼양식품 대미 수출은 빠르게 증가 중이지만, 모든 생산공장이 국내에 위치한 만큼 가격 인상과 그에 따른 타격이 불가피하다.

당장 7월 성적부터 저조하다. 라면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17%, 과자는 25% 급감했다. 관세 인상 리스크를 고려, 올해 상반기에 수출을 앞당기며 나타난 결과라고는 하지만 그만큼 향후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근 미국 내 GMO·안전성 규제 강화 흐름은 한국 농식품 수출 추가 진입 장벽으로도 작용하는 분위기다. 식품 업계 관계자는 “관세 인상으로 인한 원가, 마진 압박은 한국 농식품 기업 가격 경쟁력 저하를 불러올 것이다. 또 세금으로 빠져나가는 비용 상승으로 기업 수익성이 악화될 우려가 크다”고 설명했다.

남은 과제는

한미정상회담이 막을 내렸지만 국내 기업들 속내는 복잡하기만 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구미에 맞추려 대규모 투자 보따리를 풀었음에도, 정작 기대했던 철강 관세 인하는 회담 화두조차 오르지 못했다.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사업 참여 압박이 거세진 데다, 농축산물 시장 개방 요구도 한층 강화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일단 조선업 협력펀드를 포함한 3500억달러 대미 투자 펀드 조성 방안과 집행 방식도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대미 투자 펀드는 조선 분야에 1500억달러, 에너지·배터리·반도체·의약품·인공지능(AI) 등 전략 산업 분야에 2000억달러 규모로 조성된다.

미국은 대미 투자 펀드 이행 계획과 투자 분야 선정, 수익 배분 등을 두고 한국에 추가 요구를 쏟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 직접 투자액 5% 외에 투자 펀드 대부분을 대출과 보증 중심 ‘금융패키지’로 구성하겠다는 입장인 반면, 미국은 직접 투자를 늘리고 구체적 이행 계획도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미국 측은 대미 투자 펀드가 트럼프 대통령 지시를 받아 투자되고, 향후 이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간다는 입장이라 양측 이해관계가 확연히 엇갈린다는 의미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미국 측은 자국이 구상하는 방향으로 양해각서(MOU)가 빨리 마무리되길 희망하지만, 우리는 국익을 지키는 차원에서 여러 사항을 문제 제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알래스카 LNG 개발 사업 압박 우려

수익성 확보 가능할지 의문

트럼프 행정부 숙원 사업인 알래스카 LNG 개발 사업 참여 압박이 거세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향후 한미 에너지 분야 협력이 가능하다고 발언하던 중 돌연 “현재 알래스카 에너지와 관련해 한국과 협력하고 있으며, 곧 한국과 합작 투자(조인트벤처) 형태로 합의를 맺게 될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알래스카 LNG 개발 사업은 알래스카 북부 가스전에서 추출한 천연가스를 남부 니키스키까지 수송하기 위해 1300㎞에 달하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로, 사업 규모만 440억달러(약 60조원)에 달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핵심 공약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8년 전인 2017년 첫 집권 당시부터 주변국에 이 사업 참여를 촉구해왔다.

지난 7월 무역 합의 때 한국은 알래스카 개발 사업 투자 대신 LNG·원유 등 미국산 에너지를 1000억달러어치만 구매하기로 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재차 압박에 나서면서 한국 부담이 커졌다.

알래스카 LNG 개발 사업은 10여년 전인 2014년 미국 알래스카가스라인개발(AGDC) 주도로 글로벌 석유 기업 엑손모빌, BP 등이 참여했다. 지금은 AGDC만 남고 업체들은 모두 떠난 상태다. 수익성이 불확실한 탓이다. 이렇다 보니 국내 에너지 기업들이 투자 압박을 받을 경우 고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농축산물 추가 개방도 변수

국방비, GDP 5% 수준 인상 압박

양국 최대 쟁점 중 하나인 쌀,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추가 개방 여부도 변수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농축산물 개방과 관련해 양국 정상 간 어떠한 논의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 속내는 다르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서 “미국은 시장 개방을 원한다. 미국 농민, 제조업자, 혁신가를 위해 시장을 계속 개척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농민을 언급해 사실상 농축산물 시장 개방 의지를 밝힌 것이란 해석이다. 조성대 한국무역협회 통상연구실장은 “농산물 시장 개방은 실무 협상 단계에서 언제든 다시 논의될 수 있는 쟁점”이라고 짚었다.

향후 한미 양국의 핵심 의제가 될 문제는 또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 ‘주한미군 부지 소유권 이전’도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기지를 건설하는 데 엄청난 돈을 썼고, 한국이 기여한 게 있지만 난 그걸(소유권을) 원한다”며 “우리는 임대차 계약을 없애고, 우리가 엄청난 군을 두고 있는 땅의 소유권을 확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규모의 해외 미군 기지로 꼽히는 경기 평택 캠프 험프리스의 소유권을 원한다는 말로 해석된다.

대통령실은 즉각 해명에 나섰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소파(SOFA, 한미주둔군지위협정) 협정에 따라 주한미군이 그 부지를 쓰는 동안 우리가 공여(무상 제공)를 하는 것”이라며 “소유권을 주고받는 개념이 아니다”라고 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제4조와 소파 제2조에 따르면, 한국은 주한미군에 시설과 부지를 공여하고 있다. 시설과 부지는 한국 소유 재산이다. 트럼프 대통령 발언대로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면, 미국은 주한미군 시설과 부지 사용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미군은 한국 부동산을 무상으로 사용해왔다. 운영, 유지비 등도 한국과 미국 양국이 나눠서 부담한다. 소유권을 미국으로 넘기려면 국회 비준 등 절차를 거쳐 소파의 해당 조항을 고쳐야 한다. 미 의회조사국(CRS)의 ‘미국 해외 주둔 기지’ 보고서에도 “토지에 대한 권리는 주둔지 국가가 유지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부지 소유권 이전을 계속 주장할 경우 ‘맞대응’ 카드가 필요하다. 대표적인 것이 국방비 인상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미국 우선주의’ 기조 아래 자국 안보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며 동맹국에 국방비 인상을 압박해왔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 직후 연설에서 “한국은 한반도 안보를 지키는 데 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며 “국방비를 증액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들에 내민 이른바 ‘안보 청구서’를 사실상 받아들였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인상폭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5%’의 국방비 지출 기준을 제시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은 트럼프 압박에 못 이겨 2035년까지 국방비를 GDP의 5%까지 인상하기로 약속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올해 한국 국방 예산은 61조2469억원으로 GDP 대비 비중은 2.32% 수준에 그친다. 트럼프 행정부 기준인 ‘GDP 대비 5%’ 선에 맞추려면 국방비를 132조원까지 늘려야 한다. 지난해 말 마련된 ‘2025∼2029년 국방중기계획’을 보면 우리나라 국방 예산은 2026년 66조7000억원에서 2029년 84조7000억원 수준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국방 관련 사회간접자본(SOC), 연구개발(R&D) 등 간접비를 포함해도 GDP의 5%까지 국방비를 늘리는 것은 재정 여건을 고려할 때 쉽지 않다는 우려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철강 50% 관세를 인하하는 방안은 끝내 논의되지 않았다는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기대를 걸었던 한국 철강 업계는 이제 고율 관세를 ‘뉴노멀’로 받아들여야 할 처지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재계에서는 일본제철의 미국 US스틸 인수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면, 한국산 철강이 미국 시장에서 설 자리가 좁아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일본제철은 US스틸 인수를 추진하면서 자사의 고급 판재 기술력과 US스틸의 현지 생산, 유통망을 결합해 고율의 관세 장벽을 정면 돌파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철강 50% 관세 인하 논의 못해

회담 결과 명문화 못한 점 아쉬워

부랴부랴 포스코, 현대제철도 8조5000억원을 투자해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연간 270만t 생산 규모 일관제철소를 건설하기로 하면서 관세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상업 생산 개시 목표 시점이 2029년이라 향후 4~5년간은 관세 직격탄을 맞아야 하는 형편이다. 철강 업계 관계자는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철강 관세 인하가 논의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어 실망”이라며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철강 업체 실적이 악화된 데다 노란봉투법 여파로 노조 리스크까지 더해져 답답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한국 정부가 지난 7월 타결된 한미무역합의를 문서화하려 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한 점도 문제다. 한미 양국은 이번 정상회담 이후 공동성명과 참고자료인 ‘팩트시트’ 발표를 위해 10여차례 회의를 진행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자동차 관세율 인하와 반도체, 의약품에 대한 최혜국대우 등 앞선 무역합의에서 미국 측이 약속한 사항을 문서화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 측은 신중한 입장을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세부 논의가 길어질수록 우리 기업들에 대한 관세 장벽 완화는 늦춰질 수밖에 없다.

[명순영·김경민·나건웅·반진욱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25호 (2025.09.03~09.0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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