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봉지' 들고 출근한 3년차 기관사, 아파도 못 쉬는 이유

예진 2025. 9. 1. 16:3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례기고 ①] 열차 안에서 구토 참아야 했던 A씨... '아프면 쉴 권리'가 필요하다

이재명정부의 국정계획이 발표되었다. 상병수당 확대, 제도화, 본 제도 시행 등의 단어가 포함되었지만,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하다. 앞으로 제도의 논의 과정에 시민의 참여와 소통이 얼마나 다루어질지도 알기 어렵다. ‘아프면 쉴 권리 공동행동’은 사례공모전을 통해 ‘아프면 쉴 권리’가 필요했던 순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체인력이 없어 쉬지 못하는 노동자, 생활비 걱정에 출근할 수밖에 없는 특수고용노동자, 그래도 병가가 있어 건강을 지킬 수 있었던 노동자까지, 여러 경험을 확인했다. 이중 수상작 6편을 바탕으로 세 차례 글을 싣는다. <기자말>

[예진]

 자료사진
ⓒ lifeinkorea on Unsplash
3년 차 기관사 A씨는 비닐봉지를 들고 출근했다. 전날부터 노로바이러스 증상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며, 제대로 누워있지도 못한 채 밤을 보냈다. 일하기 어려울 만큼 괴로운 상태였지만 쉴 수 없었다. 병가를 신청하는 건 망설여졌다. 대체인력이 부족해 연차를 사용해도 반려되는 경우가 있는데, 병가를 승인해 줄리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A씨는 아픈 몸을 이끌고 전동차 운전석에 올랐다.

기관사의 하루는 시간표에 맞춰 움직인다. 보통 12시간 정도 회사에 있고, 배치된 시간표에 따라 5시간에서 6시간 운전을 한다. 운전 중에는 화장실을 갈 수가 없다. 역에 정차하는 시간은 30초 남짓, 한번 늦어지면 다음 차, 다음 차까지 연쇄적으로 지연되기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부분은 중간 대기 시간이나 휴게시간을 활용하고, 수분 섭취를 제한하기도 한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오는 생리현상을 막기란 쉽지 않다. 특히 아플 때는 더욱 문제가 된다.

그날 A씨는 운전석에 앉았을 때부터 머리가 지끈거렸고, 배가 꼬이듯 아팠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도 편치 않았다. "혹시라도 열차 안에서 토하면 어쩌나, 운전에 지장이 생기면 어쩌나"하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결국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A씨는 역과 역 사이, 달리는 열차 안에서 비닐봉지를 붙들고 구토를 했다. 창밖을 보며 애써 정신을 붙잡았지만, 상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겨우 운전을 마친 A씨는 이대로 업무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병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사람이 없으니 조금만 버텨보라"는 말뿐이었다.

대체인력 없어 병가제도 있어도 못 씁니다

직장갑질119가 2025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 38.4%는 유급병가를 사용할 수 없다고 답했다. 여성, 비정규직, 비사무직, 저임금 불안정노동자일수록 병가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제도가 있어도 사용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무급병가의 경우 임금이 감소하기 때문에 생계에 지장을 준다. 당장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노동자들은 아파도 참을 수밖에 없다.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을 통해 유급병가를 마련한 사업장도 있지만, 사용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대체인력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쉬면 동료가 더 일해야 하는 상황, 그마저도 충분하지 않으면 공석이 되어버리니 병가를 쓸 수가 없다.

몸이 회복되지 않은 A씨는 힘겹게 하루를 견뎌내고 이튿날 다시 병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대체인력이 없으니 경과를 보고 내일 다시 전화해라." 서러움에 눈물이 흘렀다. 아파서 쉰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데,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도 외면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아픔을 증명하고, 설득하고, 애원해야 한다. A씨는 "아픈 것도 고통이지만 아픔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하는 구조가 더 괴로웠다"고 말했다.

기관사의 건강은 승객의 안전
▲ 자료사진 
ⓒ sametomorrow on Unsplash
A씨 외에도 병가 거부 사례가 있었다. 한 승무사업소는 새벽에 응급실을 다녀온 기관사가 병가를 신청했는데도 출근을 강요했다. 한두 번의 일이 아니었다. 이에 노동자들은 병가를 통제하는 건 철도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라며 비판하고, 인력을 이유로 연차·병가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인력 충원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기관사 업무의 특성상, 이들의 건강은 승객의 안전과 이어진다. 2024년을 기준으로 서울(1~8호선)에서만 하루 660만 5천 명이 지하철을 이용한다. 바쁜 출퇴근길, 사람이 몰리는 시간에는 출입문 끼임 등 안전사고에도 더욱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 이때 기관사가 아프다면, 모두의 안전에도 위협이 될 것이다.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할 수 있어야 시민도 안전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프면 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이재명 정부는 상병수당 시범사업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본사업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 시점에서 상병수당 시범사업의 평가를 다시 되짚어보아야 한다. 상병수당은 아플 때 쉬고, 치료받을 수 있도록 급여를 지원하는 제도다. 그런데 시범사업에서는 나이를 제한하고, 수입을 기준으로 신청 자격을 나누고, 심지어 최저임금의 60%라는 낮은 수준의 급여를 설정했다.

시범사업 수준의 제도로는 아프면 쉴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쉬고 치료받을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 상병수당 제도가 필요하다. 또 법정유급병가도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근로기준법에서 예외가 되는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가사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 등 모두를 포괄하는 유급병가 법제화가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아플 수 있다. 아플 때 쉬는 건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최소한의 권리다. 그래야 내일이 있다. 상병수당 도입과 유급병가 법제화는 '아프면 쉴 수 있는 사회'를 위한 시작이 될 것이다.

병가가 있는데도 쓸 수 없는 A씨의 이야기처럼, 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이를 이용할 수 있도록 인식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한다. 모두의 건강과 지속가능성을 위해 휴식과 회복이 가능한, 당연한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김용균재단 상임활동가입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