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도 만나기 어려운 내밀한 독립영화 이야기
[김성호 기자]
놓치지 않고 참여하려는 행사가 있다. 매달이었으면 좋겠지만 어쩌다 한 번씩 열리는 독립영화 상영회, 독립영화 쇼케이스다.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주목할 만한 한국 독립영화를 무료로 선보이는 행사로, 서울 홍대 인디스페이스에서 이달 상영된 양주연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 <양양>으로 224회째를 맞았다. 독립영화 쇼케이스를 통해 만난 귀중한 작품이 적지 않아서 나는 이 자리를 무척 귀하고 고맙게 여긴다.
독립영화 쇼케이스에선 그저 상영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 작지만 주목할 만한 영화를 찾아 발품을 팔아온 영화팬들이 한 데 자리한 만큼, 감독이며 배우들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듣는 관객과의 대화 행사가 함께 열린다. 평론가며 동료 감독 진행으로 이뤄지는 관객과의 대화에선 영화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는 작가의 생각과 흥미로운 뒷얘기들을 들을 수가 있다. 주최 측이 따로 마련한 작품 소개며 비평도 매 행사마다 준비돼 참석자에게 제공된다. 독립영화 쇼케이스를 빠뜨리지 않고 찾으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상업 투자자본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독립영화의 열악한 현실 가운데, 이를 진흥하려는 이들의 수고가 깃든 행사다. 자본이, 때로는 제도가 외면한 창작자와 작품에도 존재의 의의와 가치가 있으리란 기대를 이 행사를 아끼는 이들이 공유하고 있다 봐도 좋겠다. 상영작 하나하나가 오늘의 한국영화, 나아가 한국사회를 상대로 갖는 동시대적 의미가 있어 자리를 찾은 이들 사이에 동질감이 느껴지는 날도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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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독립영화 쇼케이스 책 표지 |
| ⓒ 한국독립영화협회 |
모두 12차례의 상영회에선 장·단편 14편의 작품이 상영됐다. 이원우의 <오색의 린>, 박홍준의 <해야 할 일>, 김경래의 <레슨>, 김이소의 <나선의 연대기>, 이강선의 <착륙>, 이주연의 <예언자>, 유철의 <비극을 찾아서>, 홍지영의 <이 파도를 이 물결을 돌려줄게>, 손구용의 <밤 산책>, 이하람의 <기행>, 구파수 륜호이의 <소리굴다리>, 남아름의 <애국소녀>, 최종호의 <오류시장>, 김솔의 <어텀 노트> 등이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대중적인 작품부터 실험적 성격이 강한 영화까지 그 구성에서부터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목록이다.
<해야 할 일> <레슨>처럼 개봉에 이른 영화도 있지만, 대부분은 개봉하지 못했거나 아직 조율 중이다. 독립영화 쇼케이스가 완성된 작품이 세상과 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창구로 역할을 해내고 있단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책은 각 작품마다 시놉시스와 연출의도, 수상이력 및 감독소개, 제작일정 및 제작일지, 리뷰와 관객과의 대화로 나누어 정리해 소개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제작 과정의 기록으로, 감독에 따라 서로 달리 정리해 제공한 제작 과정의 이야기가 하나 같이 이 책이 아니라면 따로 읽기 어려운 것들이다. 마치 학술연구에서의 연구노트를 보는 듯, 제작 과정에서의 크고 작은 고충이며 좌절과 극복의 이야기, 이 작업이 작가의 필모그래피서 차지하는 의미 등을 생각해볼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한다.
따로 마주하기 어려운 창작의 뒷얘기
김이소의 <나선의 연대기> 제작 일정에선 감독이 H라 불리는 이에게 제작을 맡기기 위한 메일을 보내고 받은 답, 그 뒤로부터 오고간 H와 감독 사이의 대화가 고스란히 실렸다. 이 메일들을 통하여 독자는 창작자가 자신의 작품을 알아주는 이와 맺는 관계의 의미를, 또 지지와 비판 사이로 작품을 다듬어가는 과정의 고단함을 간접적으로나마 체감할 수 있다.
H님의 답장이 좋아서 몇 번씩 반복해서 읽었어요. 단순히 제 영화에 대한 우호적인 감상이 쓰여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저는 비로소 그 답장을 보고서야 우리가 무언가를 교환했다고 느낀 것 같아요. 그게 어떤 효과로든 영화에 가닿았고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게 좋았어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H님이 알아주시면 그걸로 된 것 같아요. 저에게 필요했던 건 영화를 성공시키는 것보다 같이 만드는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희미한 의문을 공동의 질문으로 만드는 것, 비록 물음표의 형태라도 다른 이의 고민과 교차할 수 있다면, 손끝으로라도 건들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저에게는 큰 나아감이 아닐까, 하는 위로를 해봅니다. -82p
작품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주는 감독의 말 또한 찾아볼 수 있다. 홍지영의 <이 파도를 이 물결을 돌려줄게> 제작일정에 적힌 글이 좋은 사례다.
주인공(들)이 있고 그 인물(들)을 중심으로 관객이 몰입하고 이입하여 성공하거나 실패하여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구조의 서사에 저항하고 싶었다. (중략) 이런 장면을 통해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내러티브 안의 존재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밖이 아니라 안에서, 경계에서 보기, 듣기, 느끼기. 동시에 영화 만들기라는 행위에 대해 통찰하려고 했다. -135p
때로 창작자의 의도는 작품 그 자체보다 원대할 수 있다. 작품이 그를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다 하여 그 의도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란 것은 예술을 이해하는 과정 가운데 반드시 깨우치게 되는 진실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시대 관객, 특히 독립영화 관객은 매체 너머에 있는 창작자와 교류할 기회를 갖기 어려운 탓으로 그 귀한 가능성을 대면하지 못하기 십상이다. 이 책의 가치가 또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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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영화 쇼케이스 지난해 6월 제211회 독립영화 쇼케이스에서 관객과의 대화 모습. |
| ⓒ 김성호 |
창작자의 성장을 마주할 수 있는 대목도 있다. 최종호의 <오류시장> 제작일정 및 제작일지에 실린 고백적 글이 그러하다. 감독은 글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적는다.
첫 작업인 <자리>를 만들던 시기, 나는 다큐멘터리 작업을 온전히 내 것으로 생각했다. 학교의 퇴실 통보에 맞선 싸움이 패배로 끝나고 학교를 졸업한 뒤, 촬영한 장면들을 가지고 내 절망감과 무력감을 마음껏 드러내 작품을 만들었다. 오류시장을 만나며 내가 다닌 학교의 동아리 방들을 떠올리기도 했었지만, 삶의 터전인 오류시장을 지켜온 상인들의 이야기는 그전과 같이 내가 쉬이 읽어내고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대중에 보여주는 일의 무게를 절감했다. -234p
제작일지 외에도 감독과의 대화에 실린 생생한 감독의 목소리 또한 흥미롭다. <밤 산책>을 만든 손구용 감독은 백종관 감독과 진행한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선형적인 시간 구조를 따르잖아요. 영화는 시작하고 끝나기 마련이죠. 그런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 선형성을 부정하고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이 작업도 그렇고, 전에 했던 작업도, 새로 하는 작업도 항상 그렇더라고요. 시간성을 많이 고민했어요. a에서 b로 가는 서사성을 따라서 감상하기보다는, 비선형적으로 가다가 멈추기도 하고, 때로는 뒤로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시간성은 이어지는 게 아니라 머물거나, 느리게 가거나 빠르게 갔으면 했어요. 보통 영화를 감상하잖아요. <밤 산책>은 관조해 주셨으면 했어요. -163p
감상하는 게 아니라 관조하기를 바라는 감독의 마음, 그를 알고 작품을 보는 이의 영화세계는 분명히 다를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2024 독립영화 쇼케이스>는 활발하게 한국 독립영화의 오늘을 지탱하는 작가들과 새롭고 가치 있는 창작물을 갈망하는 관객 사이를 이으려 노력한 결과물이다. 그 노력은 결코 당연하거나 무용하지 않다. 적어도 나는 독립영화 쇼케이스가 있어 내가 사는 이 거대하고 삭막하며 얄팍한 도시를 조금쯤은 더 애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나뿐일까. 책은 그 서문에서 사업 취지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 마지막 문단은 다음과 같다.
본 상영회를 통해 관객에게 안정적으로 독립영화를 소개하고, 독립영화 제작 및 배급환경 개선을 위한 논의의 장을 확대하고자 합니다. 상업적인 배급 환경에서 접하기 힘든 독립영화들을 소개하여 영화 관계자와 평론가, 관객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유도하고 궁극적으로 독립영화 활성화 및 문화 다양성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겠습니다. -5p
지난해 모두 12차례 있었던 독립영화 쇼케이스는 벌써 8월이 다 지나간 올해 아직 3차례 밖에 열리지 않았다. 행사가 불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를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이 영향을 미친 때문임을 안다. 영화평론가이자 그 이전에 영화를 애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부디 이 노력이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 혼자만 알고픈 독립영화 쇼케이스를 더 많은 이들에게 구태여 알리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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