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운동 초석 김진수 열사

김삼웅 2025. 8. 30.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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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열전 34] 그의 죽음을 통해서 최초로 학생, 종교인 등이 노동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노동자들과 함께 했다

[김삼웅 기자]

 한국교회도시산업문제협의회 등이 주관한 고 김진수 영결식 안내 자료(1971년 6월 21일)는 “고 김진수 군의 죽음은 오늘의 기업 풍토가 가져온 죽음이며 폭력의 난무가 가져온 죽음”이라고 알리고 있다. 윤조덕 원장은 김진수 열사의 장례식에서 집행위원회 부위원장과 호상을 각각 맡았다.
ⓒ 윤조덕
김진수 열사는 1949년 7월 8일 전북 임실군 성수면에서 가난한 농부에 아들로 태어났다. 지사초등학교에 이어 오수중학을 나와 서당에 다니며 한문공부를 하였다. 어머니의 남다른 학구열에 따라 1966년 경기도 안양으로 옮겨 안양공업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그는 낮에는 타일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소년공이 되었다.

진수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노동자를 하나의 부품처럼 취급하는 살벌한 공장 분위기였다. 기계가 돌아가는 한 개인의 시간은 바늘구멍만큼 낼 수 없었고 아무리 용변이 급해도 오전 오후의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잡담은 금지되었고, 자칫 관리자의 비위를 건드렸다가는 욕설은 물론 때로는 구타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데가 바로 공장이라는 곳이었다.(주석 1)

그는 타일공장을 그만두고 요꼬학원에 들어갔다. 1960년대 중후반 수출 붐을 타고 스웨터 보세가공업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다. 3개월 속성과정을 마치고 뚝섬에 있는 요꼬 하청 공장에 들어갔다. 하청에 재하청의 작은 공장이었다. 역시 열악하기 그지없는 곳이지만 기술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견디며 일하였다.

스무 살이 되어 한영섬유공업주식회사에 들어갔다. 하루 15시간 일하는 곳이어서 다니던 학교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이 잘리는 아픔을 겪었다. 이즈음, 그러니까 1970년 11월 13일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한 것이다. 그는 온 몸에 기름을 붓고 불타는 몸으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는 구호를 외치며 쓰러졌다. 그는 숨지면서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부르짖었다.

이 사건은 한국사회 특히 노동계에 큰 충격을 주고 노동자들의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김진수 열사에게도 충격이 컸다. 틈나는 대로 근로기준법과 노동법을 공부하고 관련 세미나와 집회에 참석했다. 1970년 12월 28일 회사에 전국섬유노동조합 서울의금지부 산하 한영섬유분회가 결성되었다. 그도 열심히 돕고 가입하였다.

그러나 회사 측의 대응은 노동자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하고도 치밀한 것이었다. 한영섬유사장 한익하는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공장 가동을 일시 중지하고 직장을 폐쇄하겠다는 위협으로 총 200명의 조합원을 12월 31일자로 강제 퇴사시켰다. 또 신정 연휴가 끝난 1월 4일에는 분회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분회장(김용욱) 등 4명의 분회 임원들을 취업 규칙위반이라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해고하였다. 그와 동시에 과거에 폭력 사건으로 해고되었던 최홍일·홍진기·정진헌 등 3명을 재입사시켜 조합원들을 위협하게 하고, 노조 탈퇴서를 받아오게 하였다. (주석 2)

김진수는 동료들과 함께 퇴사되었다가 재입사하여, 회사에 매수된 불량배들이 설치는 꼴을 지켜보며 대책을 준비하였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공장을 쏘다니며 사원들을 감시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노조에서 탈퇴할 것을 강요했다. 특히 사원들의 신임이 두터운 김진수를 집중적으로 겁박하고 조롱하였다.

김진수는 1969년 19세에 한영섬유에 입사했다. 1970년 조합원으로 가입하자마자 회사 측이 노조 파괴를 목적으로 폐업한다는 말을 듣고 사퇴했다가 다시 입사했다. 노조원에 대한 회사의 감시와 억압이 심해지자 가까운 동료들이 그만두고 같이 떠나자고 했으나 그는 해고된 조합 간부들이 안쓰러워 회사를 그만 둘 수 없었다. 재입사한 후 김진수는 해고된 노조 간부들의 제의로 조합을 탈퇴한 동료 노동자들에게 모종의 활동을 펼치던 중 1971년 3월 18일 스물네 살 나이에 회사가 고용한 조폭에게 드라이버로 머리가 찔려 5월 16일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노조들 사이의 갈등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며 회사 측은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이에 따라 심지어 30일 동안 장례도 치르지 못하게 되자 김진수의 모친이 광화문에서 "우리 아들 장례를 치러주십시오"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기도 했다. (주석 3)
 윤조덕 원장은 대학 3학년이던 1971년 6월 25일 김진수 열사의 장례식에서 인명진 위원장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참여, 부위원장과 호상을 각각 맡았다.
ⓒ 윤조덕
김진수, 그는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또 다른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의 죽음을 통해서 최초로 학생, 종교인 등이 노동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노동자들과 함께 했다는 점이다.

전태일의 비극적 죽음은 노동투쟁과 민주화투쟁 간에 조심스런 연대를 모색하는 계기를 부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진수 사건은 구체적으로 연대한 첫 번째 사례로서 좋은 선례를 남겼으며, 그 이후의 노동문제 해결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즉 김진수 사건을 통해 노동문제를 단순히 노동자와 사용자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와 관련이 있는 사회 문제화 하는 전통이 생겨났다. 또한 당시 사건 해결을 위해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함께 했던 사람들은 이후에도 지금까지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계속 해와, 건전한 지도력을 키워낸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다.(주석 4)

주석
1> 김기선 글, 박흥순 그림, <김진수>,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2002.
2> 앞의 책, 114쪽.
3> 임종권, <인명진, 시간의 기억>, 198~199쪽, 인문서원, 2025.
4> 인명진, '추천사', 앞의 책, <김진수>.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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