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생 동화작가의 당부 "다시는 꺾이지 말아요"
우수한 아동 문학을 소개합니다. 어른에게도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아동 문학을 통해 우리 아동 문학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문학 속에 깃든 아이들의 마음과 어른의 모습을 들여다 봅니다. <기자말>
[최혜정 기자]
8월이 간다.
매년 8월이면 우리는 늘 아픈 기억을 소환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되새긴다. 놓쳤던 것들을 다시 붙잡고,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AI 기술로 빛바랜 사진 속 영웅들을 되살려 독립 만세를 외치게 하고 함박 웃음을 웃게도 한다. 어느 기업은 매년 이맘때쯤이면 광복을 기억하는 영상을 만들어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전 국민에게 사랑을 받아온 아이스크림의 수익금 일부로 독립 유공자 자손을 위한 장학 사업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특별한 민족이다.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 국가에 살아가지만, 두려움으로 위축되어 살지 않는다. 음악으로 세계를 제패하고, 스포츠로 세계를 열광하게 한다. 불과 백 년도 안 된 과거에 그토록 잔인하게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이웃 나라를 곁에 두고도 단단하고 호기롭게 경제를 일으키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다.
때로는 우리의 미숙한 현실이 자존감의 발목을 잡기도 하지만, 괜찮다. 이만하면 잘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했던 실수들을 바로잡기 위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서는 의기가 있다면, 가슴 아픈 4월을 기억하며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켜나간다면, 우리의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단단하게 세워지고 이어질 것이다. 삐걱거리며 걷는다 할지라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에는 훌쩍 성장한 우리를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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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사코의 질문 - 개정판, 6학년 2학기 읽기 수록도서, 손연자 (지은이),김재홍 (그림) |
| ⓒ 푸른책들 |
<마사코의 질문>은 2009년에 초판을 찍은 책이다. 2025년인 오늘까지 묵묵히 살아남았다. 몇십만 부가 팔리는 기염을 토하지는 않았지만, 오래 살아 남았으니 가지고 있는 가치를 충분히 입증한 셈이다.
작가 손연자는 1944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해방 즈음에 태어났으니, 격동의 시대를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동화는 어둡지 않다. 같은 시대를 산 권정생의 동화가 아픔 속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삶을 보여주었다면, 손연자의 동화는 상처를 어루만지는 따뜻함을 담고 있다. <손연자 동화 선집>(손연자 글, 최지훈 해설,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스티븐 깅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좋은 글이란 사람을 취하게 하는 동사에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고 했다. 아동문학 작가는 어린이를 취하게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이 그들 눈높이에 합당하게 취하고 사려 깊은 생각에 잠겨야 한다는 요구를 받는다.
그의 글은 그의 생각처럼 반듯하고, 정갈하다. 바른 것을 배워야 할 아이들에게 바른 말과 바른 글, 바른 생각이 시나브로 생기게 한다. 가르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하는 그는 대부분 행복에 관해 이야기 한다. 삶이 그리 좋지 못한 상황일지라도 웃으며 행복을 찾아갈 힘을 준다.
입양아가 주인공인 <까망머리 주디>를 쓰기 전, 그는 주인공을 행복한 입양아로 할 것인지, 불행한 파양아로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결국 그의 결정은 행복한 입양아였다. 기억을 하든 못 하든 이미 생의 존엄을 훼손 당하고 상실의 고통을 겪었으므로 불빛이 따사로운 벽난로로 데려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동화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적당한 말이 될 것 같다. 손연자의 동화는 벽난로처럼 따듯하다. 기어이 자기 몸을 불태워 열기를 뿜어내는 벽난로의 숯처럼 매섭지만 가까이 오도록 곁을 주는 따스함이 있다.
<마사코의 질문>은 민족의 수난기였던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백성이 겪어야 했던 고난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말과 글을 빼앗겨야 했던 아픔을 다룬 '꽃잎으로 쓴 글자'로 시작하여, 해방이 한참 지난 오늘을 사는 세대에 문제 의식을 던져주는 '마사코의 질문'까지, 9편의 동화가 온전히 일제의 만행을 다룬다.
나라가 아니라 백성이 겪어냈을 사연들
작고 하신 나의 아버지는 1929년 생이다. '꽃잎으로 쓴 글자' 속 아픔을 고스란히 겪었다. 이야기 속 학교에서는 우리말을 쓰면 '위반패'를 받는다. 위반패는 하루 종일 아이들 사이를 돌고 마지막 받은 친구는 선생님께 몽둥이로 손바닥 열 대를 맞는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말을 쓰다 군복 입은 선생님의 군화발에 차여 쓰러졌다고 했다. 나의 어머니는 위반띠를 메고 있다가 일본 순사처럼 칼을 차고 있는 선생님께 위협적인 꾸지람을 들었다고 했다. 모두들 그렇게 살아야 했던 시대다. 아이들마저도 식민지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시대였다. 이야기 속 승우의 어머니는 팔각 소반 위에 복사꽃잎으로 '산, 별, 하늘'을 쓴다.
"승우야, 이담에 어른이 되거든 넌 시인이 되거라. 조선 말 조선 글로 가장 먼저 시를 쓴 시인이 되거라. 남을 밟고 올라서지 말고 남의 아픔을 잘 이해하는 시인이 되거라. 오늘부터 엄마가 글을 가르쳐 주마."
'방구 아저씨' 이야기는 시작부터 아프다.
"방구 아저씨가 돌아가셨다. 봄비가 부슬부슬 처량맞게 내리던 날이었다. 이 날은 방구 아저씨의 귀 빠진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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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구 아저씨' 김재홍 그림 |
| ⓒ 푸른책들 |
'꽃을 먹는 아이들'은 관동 대지진의 여파가 되었던 '조선인 대학살'을 보여준다. 그때, 그들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 그때 그들이 얼마나 미치광이 같았는지를 겐지라는 일본 소녀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린다. 소녀는 죽는다. 조선인들이 잘 발음하지 못하는 일본말을 소녀도 발음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혀가 짧은 그 일본인 소녀는 폭도들 앞에서 그저 죽어야 할 조선 아이였다.
'남작의 아들'은 일본인의 아이, 친일파의 아이, 그리고 창씨개명 하지 않은 조선 아이의 갈등을 그린다. 조선인이지만, 조선인일 수 없고, 일본인도 될 수 없었던 친일파 자손들의 아픔을 조명한다.
'잠들어야 새야'는 일본군 위안부의 이야기다. 열세 살 꽃 같은 어린 소녀의 독백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심장을 저리게 한다.
"아, 부끄러워라! 조선의 남자들은 어쩌다가 제 나라 하나 지켜 내지 못하고, 풀잎 같은 딸들을 이토록 더럽히는지. 어떻게 했기에 한 떨기 꽃 같은 제 누이들을 이렇듯 욕보이며 천덕꾸러기로 만드는지."
소녀의 쓰라린 한탄이 가슴을 울린다.
'잎새에 이는 바람'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해방을 눈앞에 둔 채 눈을 감아야 했던 윤동주의 모습을 상상한다. 여린 성정의 그가 조국의 아픔 앞에 어떻게 아파했는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긴 하루'는 해방된 조선에 남은 일본인을 바라보았다. 순이의 학교 선생님 데라우치는 천황의 항복 앞에 갈 길을 잃는다. 성난 조선인들을 피해 달아나는 데라우치를 챙기는 순이와 순이 엄마의 마음은 컸다. 덕분에 해방된 조선은 일본인 데라우치에게 큰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흙으로 빚은 고향'은 해방 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제일 조선인들이 어떻게 살았을지를 들여다본다. '조센징'으로 불리며 차별 받아야 했던 삶 속에서도 정체성을 지켜나간 수많은 이들의 삶을 그려보게 한다.
표제작이자, 마지막 작품인 '마사코의 질문'은 일본인 아이와 할머니의 대화로 이어진다. 할머니는 원자 폭탄이 떨어진 날에 관해 이야기하며 얼마나 잔인하고 나쁜 행동이었는지를 말한다. 그러나 손녀 마사코는 질문한다.
"왜 미국은 우리 일본에다가 꼬마를 떨어뜨렸어?"
마사코는 지구 위에 많은 나라 중에 왜 일본이었는지, 왜 전쟁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일본이 피해자란 말만 되풀이 했지만, 마사코가 정작 궁금한 건 전쟁의 이유였다.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그날의 일일 뿐 아니라, 오늘의 일이며, 내일의 일이 될 수 있다.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지 않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 우리의 국가가 힘을 잃을 때 국민이 어떤 아픔을 겪어야 하는지 과거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다.
역사의 아픔을 생생하게
<마사코의 질문>에 그려진 삽화는 그림책 <동강의 아이들>로 알려진 김재홍의 작품이다. 이 이야기의 삽화를 그가 맡은 것은 신의 한 수다. 그의 그림은 언제나 생생하고, 빛난다. 어두움 속에서도 빛이 보이고, 등장인물들의 표정이 살아있다. 그가 그린 눈빛들 덕분에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이 독자에게 와서 생생하게 살아난다.
어른 책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삽화가 어린이책에서는 꼭 등장한다. 어린 독자가 이야기의 상황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장치일 것이다. <마사코의 질문>에서는 그 장치를 잘 사용했다. 김재홍이 그린 그림들 속 배경과 빛, 그림자의 의미를 곱씹으며 동화를 읽어낼 수 있다면 이야기는 한층 더 생생해질 수 있을 것이다.
8월이 간다. 8월이 가도 언제든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책 속에,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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