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이 '걱정 말라' 말해... 납치된 김대중 구한 미국, 이유 있었다"
[장신기 연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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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를 하고 있는 권노갑 김대중재단 이사장 |
|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 관련해 권노갑 이사장만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이 많으며, 여기에는 '김대중 1차망명(1972년 10월 17일~1973년 8월 8일)'과 '김대중납치사건(1973년 8월 8일~1973년 8월 13일)'도 포함된다. 그와 같은 배경에서 지난 26일 권노갑 이사장을 인터뷰했다. 인터뷰는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진행했으며 질문은 필자가 했다. 다음은 주요 내용이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선포됐을 당시 동교동 상황
-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국회는 해산되고 정치활동이 금지되는 등 유신독재가 시작됐는데요,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때 이사장님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때 이희호 여사께서 연세대학교에서 박사 과정 공부를 하셨어요. 10월 17일 오후에 이희호 여사님과 내가 함께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서 연세대학교로 차를 타고 가고 있는데 여사님께서 '노갑씨, 아무리 봐도 이상해요. 다시 쿠테타가 날 것 같아요'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때 내가 '여사님, 저들이 아무리 독재를 한다고 해도 쿠데타를 다시 일으키는 것은 어렵지 않겠습니까'라고 답을 했어요.
그렇게 하고 나는 차에서 여사님을 기다리면서 라디오를 들었는데 비상계엄이 선포된 거예요. 여사님께서 공부를 끝내시고 나오셔서 내가 '비상계엄이 선포됐다'고 말씀드렸더니 여사님께서는 크게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시면서 '결국 내 말이 맞았네요'라고 하셨어요.
-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들으셨을 때 상당히 혼란스러우셨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참 혼란스럽고 모든 것이 불안한 상황이었어요. 박정희 정권이 동교동을 향해 여러 탄압을 할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어요. 여사님도 이 부분을 걱정했고 나도 그랬어요. 국회가 해산됐으니 김대중 선배는 국회의원 직을 강제로 박탈당했고 김대중 의원의 비서관이었던 나도 비서관 직을 잃게 됐어요. 그리고 도청당하는 상황에서 일본에 계신 김대중 대통령님과 연락해 긴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모든 것이 암울했어요."
- 워낙 긴급한 상황이다 보니 이희호 여사님과 향후 대책을 논의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때 이희호 여사님께서 나를 포함해 동교동 비서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일본에 계신 홍걸이 아빠(김대중 대통령을 의미)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고, 박정희 정권이 우리를 향해서 어떻게 할지 알 수 없으니 피해 있으세요.' 그러면서 나를 포함한 비서들에게 개별적으로 5만 원씩을 주셨어요. 그때 여사님께서 참 절박한 심정으로 말씀하셨고 지금도 그 모습이 기억에 생생해요.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희호 여사님은 비서들을 먼저 챙겨주셨어요. 참으로 인품이 훌륭한 분입니다."
- 일본에 계신 김대중 대통령님과는 연락이 안 됐습니까?
"김대중 대통령께서 인편을 통해서 어렵게 연락을 주셨어요. 지금 상황에서 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일본과 미국에서 유신반대와 민주회복 운동을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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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년 8월 14일 김대중씨가 동교동 자택에서 친지들의 전화를 받고 있다. |
| ⓒ 연합뉴스 |
"유신 선포 이후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에게 큰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김대중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가혹한 탄압을 했습니다. 그래서 국회의원 중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형님으로 모시며 활동한 김상현 의원과 동교동 비서 중에서는 나와 김옥두 의원(당시 비서)이 제일 많이 고생했어요."
- 이사장님께서는 어떤 고초를 겪으셨습니까?
"10월 21일 새벽에 중앙정보부 요원이 우리 집으로 와서 나를 중정으로 데려갔어요. 거기서 물고문부터 해서 3일 동안 온갖 고문을 당했어요. 아주 지독하게 고문했어요. '이제 김대중은 끝났다, 이제는 우리 세상이다' 하면서 고문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중간 중간에 회유도 해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가면 모든 경비를 다 지원해주겠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3천 만원을 주겠다고도 했어요. 싫다고 하니깐 정신 못차렸다고 하면서 바로 또 고문해요. 그렇게 하다가 다시 또 회유하고 싫다고 말을 하면 또 고문하고... 그렇게 고문과 회유를 3일 동안 밤낮없이 계속해서 한 것입니다. 아주 지독했어요."
- 이사장님을 상대로 왜 그렇게까지 한 것입니까?
"김대중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끝장내기 위해 그런 것입니다. 저들은 나한테 3가지 사항에 대해 답을 하라고 했어요. '김대중의 사생활을 밝혀라', '김대중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사람을 밝혀라', '김대중의 군내 인맥에 대해서 밝혀라' 이 3가지를 계속 물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답을 했어요. 먼저 '김대중 선배의 사생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말할 내용이 없다'라고 했고, 정치자금을 도와준 사람과 군내 인맥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했어요. 이렇게 내가 중정에서 원하는 답을 하지 않으니깐 더 심하게 고문을 해요. 그럼에도 끝까지 나는 굴복하지 않았어요. 김상현 의원과 김옥두 비서도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중정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았어요."
- 고문과 회유를 이겨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김대중 선배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국가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도자라고 생각했고 이렇게 훌륭한 지도자를 위해 나의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굳은 신념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어려운 시기를 버텨낼 수 있었어요. 동교동의 여러 정치인, 비서들이 모두 이러한 각오로 김대중 대통령을 모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저쪽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간 참모와 비서도 있었어요. 그렇게 된 사람이 3명 정도 됩니다. 그래도 훨씬 더 많은 동지들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이 땅의 민주주의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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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김대중 망명일기> 앞표지 |
| ⓒ 한길사 |
"나는 그때 그 소식을 듣자마자 조봉암 선생이 생각났어요. 이것은 정치테러 사건이고 저들이 김대중 선배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절망적이었어요. 이희호 여사님께서도 충격을 받으셔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고 기도만 하셨습니다."
- 김대중 대통령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때 여러 일을 했는데,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주한 미국대사관 관계자가 내게 전해준 말이었어요. 1973년 8월 11일 정도로 기억합니다. 내가 김대중 의원 비서관을 할 때 주한 미국대사관과 일본대사관 담당을 했어요. 내가 영어 교사를 했기 때문에 영어를 할 줄 알고 일제 시대에 교육을 받았으니 일본어도 잘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죠. 그래서 알고 지내던 외교관들이 있었어요.
그때 평소 알고 지내던 미국의 외교관 한 명이 내게 '김대중은 죽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말을 전해주었어요. 미국 외교관의 말이니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해 바로 이희호 여사님께 보고드렸어요. 그래도 여전히 김대중 대통령의 행방을 알 수가 없으니 굉장히 초조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3일 밤에 동교동으로 돌아오시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어요."
- 미국이 김대중 대통령 구명에 나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미국은 김대중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할 때부터 주목을 했어요. 내가 김대중 의원 비서관을 하면서 미국 외교관들을 많이 만나봤기 때문에 아주 잘 알아요. 미국 외교관들은 김대중 의원의 식견과 인물됨을 높이 평가해 향후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한미관계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납치사건 당시 김대중 대통령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입니다."
- 이번에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전후 시기에 작성된 김대중 대통령의 일기 6권이 새롭게 발견돼 <김대중 망명일기>(한길사)가 출간됐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1차 망명투쟁의 의미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이번에 이 일기가 발견돼 책으로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정말 뜻깊은 일입니다. 유신 독재 정권 시절은 암흑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목숨을 건 망명투쟁을 전개한 김대중 대통령의 생각과 활동을 알 수 있는 <김대중 망명일기>는 역사적으로, 학문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 연구자입니다. <김대중 망명일기>(한길사, 2025)의 판독, 해제, 편집 작업을 맡았습니다. 김대중 재평가를 위한 김대중연구서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으며 <김대중육성회고록>(한길사, 2024) 편집과 윤문 작업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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