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가 철거는 안 돼" 정조의 뚝심이 만든 뭉클한 결과물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왕의 원대한 구상을 속속들이 알고 싶다. 톱니바퀴처럼 실행에 거침이 없어서다. 아버지 능을 옛 수원부 뒷산으로 이장한다. 관청을 옮기고 민가엔 보상비와 이주비를 지급하며 팔달산 아래 수원부로 이주를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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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전도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된, 버들잎 모양의 화성을 세세하게 묘사한 채색화. 동문인 창룡문 쪽에서 행궁과 팔달산 정상의 화성장대, 장안문과 팔달문, 화서문, 팔달산 남쪽의 용도, 봉돈과 공심돈 등을 빠뜨리지 않고 표현하였다. 그림 속 계절은 꽃 피고 새 우짖는 춘삼월이다. |
| ⓒ 이영천(현지 안내판) |
이듬해 겨울 다산이 왕에게 성설(城設)을 올린다. 성의 규모와 형태, 축성 재료의 출처와 시공 방법, 소요 인원 및 예산까지 낱낱이 명기했다. 다산이 제시한 둘레는 4.24km 남짓이다. 이외에도 각종 도설(圖說)로 성곽의 세부 설계도를 제시한다. 다산의 설계는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 왕이 저술한 화성 축조 기본방안)'이란 이름으로 <화성성역의궤>에 오롯이 수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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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원 화성(1872년 지방지도_부분) 화성을 간략하게 표현한 지도. 장안문 위에 북쪽 저수지인 '만석거'가 작고 둥글게, 왼쪽에 서호인 '축만제'가 크고 둥글게 표현 되었다. 지도 속 남문인 팔달문 옆에 작게 그려진 문루가 무언지 의문을 자아 내게 한다. 도로 표현이 도드라져 보인다. |
|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버들잎 닮은 성곽
화서문 쪽 팔달산 경사가 완만하다. 숨이 가빠지자 나타난 장대가 웅장하다. 왕이 이곳에서 성벽 쌓을 자리를 따라 꽂아 둔 깃발을 살폈다. 실록을 보면, 다산이 설계한 성곽이 이 자리에서 더 넓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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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장대 팔달산 정상의 화성장대. 이곳에서 정조가 1894년 1월 15일, 성 쌓을 가장자리를 살폈다. 민가가 이미 들어선 곳을 허물지 말고 성안으로 넣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뒤 쪽 네모난 건축물은, 전투를 지휘하는 '노대'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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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 장대가 있는 팔달산 꼭대기에서 바라 본 모습. 우측으로 팔달문이 보이고, 맞은 편 녹색의 띠가 동쪽 성벽이 지나는 구릉이다. 1894년 1월 당시, 정조가 바라 본 시선의 일부다. |
| ⓒ 이영천 |
화성이 남북으로 길어지고, 동쪽으로 뻗은 형상을 갖게 된 건 순전히 정조의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용도가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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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남각루 길이 200여m인 용도의 끝이다. 용도를 살짝 넓혀 서남각루인 '화양루'를 앉혔다. |
| ⓒ 이영천 |
용도만 뻗으면 방비에 취약하다. 가까운 남쪽 성벽에 남포루를, 서쪽 성벽에 치성을 두어 호응하게 했다. 화성 설계의 제1은 뭐니뭐니 해도 방어다. 예전처럼 활과 창, 칼로 싸우던 공성전이 아니다.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갖춘 총포와 대포의 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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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 용도(甬道) 용도가 시작하는 '서남암문' 바깥에서 바라 본 용도의 모습. 양쪽으로 성가퀴를 쌓은 이런 성벽이 200여m 이어진다. |
| ⓒ 이영천 |
팔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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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달문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 주변이 시가화 하면서 일제 강점기 성벽이 잘려 나간다. 수원 화성에서 유일하게 성벽이 끊긴 구간이다. 남문시장 등 주변은 여전히 상업이 활발하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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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문 성벽 화성의 '동남각루'에서 바라 본 팔달문과 주변 성곽. 남수문의 좌우에서 성벽이 직각으로 꺾인다. 공심돈이 있었던 자리를 시장이 차지했고, 팔달산을 오르는 하얀 성벽이 긴 줄처럼 선명하다. |
| ⓒ 이영천 |
이처럼 화성은 치밀한 설계를 바탕으로 축조했다. 동쪽으로 잇닿은 성벽은 낮은 구릉성 산지를 적절히 이용했다. 덕분에 '동남각루'에 오르면 남문인 팔달문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여기에 화포를 두어 남포루와 더불어 능히 팔달문 방어를 가능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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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돈 화성의 동쪽 성벽 중간 쯤에 자리한 봉돈. 봉화는 물론 성벽 밖으로 돌출된 시설물 내부에 군사시설인 돈대를 두어 복합기능을 수행케 하였다. |
| ⓒ 이영천 |
*후속 기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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