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이 행차를 멈춘 폭포, 점심 먹다 용까지 봤다네요

정명조 2025. 8. 2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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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림 탐방] 경주 '왕의 길'부터 감은사지까지... 그 속에 숨은 만파식적 전설

[정명조 기자]

서기 681년, 문무왕이 죽었다. 그의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동쪽 바닷가에 감은사를 세웠다. 섬돌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뚫어 용이 된 문무왕이 바닷물을 따라 금당에 드나들게 했다. 이듬해 작은 산 하나가 바다에 떠다닌다는 말을 듣고 신문왕이 바닷가로 행차했다. 산은 거북 머리 같이 생겼고, 위에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왕이 감은사에 머무르는 동안 천지가 흔들리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이 잦아들자 왕이 배를 타고 산에 들어갔다. 용이 검은 옥대를 바쳤다. 또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이라고 말했다. 왕은 기뻐하며 비단과 금과 옥으로 보답하고, 사자가 베어 온 대나무를 가지고 바다에서 나오자 산과 용이 사라졌다.

왕이 옥대와 대나무를 가지고 궁으로 돌아오던 길에, 기림사 서쪽 냇가에서 점심을 들었다. 그때 마중 나온 태자가 옥대 한쪽을 떼어 시냇물에 넣으니,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이 부분을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편 만파식적(萬波息笛)조는 이렇게 전한다.

왕이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17일에 지림사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 즉 효소 대왕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 천천히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 옥대의 여러 쪽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라고 하셨다. 태자가 아뢰기를, "쪽 하나를 떼어서 물에 넣어보면 아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왼쪽의 둘째 쪽을 떼어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곳은 못이 되었다. 이에 따라 그 못을 용연으로 불렀다. <국사편찬위원회>

지난 22일 경주에 갔다. 30년 전에 다녔던 곳들을 다시 보고 싶었다. 곳곳에 쭉 뻗은 새 길이 생겼지만, 일부러 꼬불꼬불한 옛길을 달렸다. 옛 이야기는 옛 길을 따라가야 잘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없던 '왕의 길'을 걷고, 토함산 자연휴양림에서 하룻밤 묵고 장항리 절터와 감은사지를 찾았다.

문무왕 장례 행렬이 지나던 길

'왕의 길'은 경주 시내권에서 동쪽 바닷가로 갈 때 지나던 길이다. 지자체에서 2011년 옛길을 복원해 탐방길을 만들었다. 특히 모차골에서 수렛재와 용연폭포를 지나 기림사에 이르는 7km 구간은 '신문왕 호국행차길'이라고도 부른다.

용성국의 왕자 석탈해가 토함산으로 몰래 들어오고,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려는 문무왕의 장례 행렬이 지나던 길이다. 또 신문왕은 이 길을 통해 용이 바친 옥대와 대나무를 가지고 월성으로 돌아왔다.

경주 시내에서 감포로 가는 '경감로'를 따라가면 중간 쯤 추령터널이 있다. 터널로 들어가기 전 왼쪽으로 난 추원길에 들어서서 1.5km 오르면 왕의 길 주차장이 나온다. 모차골에 있다. 마차가 다니던 곳이라 하여 마차골로 불리다가 이름이 바뀌었다. 걷기 좋은 흙길이 수렛재까지 이어진다. 수레가 넘던 고개다. 경주에서 바닷가를 오가기 위해 마차를 몰고 수레를 끌고 고개를 넘어야 했던 옛 사람들을 생각하니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 불령봉표 조선 순조가 효명세자의 무덤에 쓰려고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했다.
ⓒ 정명조
'연경묘 향탄산인 계하 불령봉표'라는 글귀가 새겨진 돌도 있다. 연경묘는 조선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난 뒤 임금으로 받들어지기 전 부르던 무덤 이름이다. '연경묘에 쓸 향탄을 생산하기 위한 산이므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임금의 명을 받아 불령에 봉표를 세운다'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봉표는 이곳 뿐 아니라 가까운 감재계곡의 시령(枾嶺)과 양남의 수렴(水念)에도 있다. 또 대구와 의성에서도 발견된다.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순조는 곳곳에 봉표를 세우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세자가 죽고 4년 뒤 순조는 승하하고,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7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효명세자가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다고 널리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다.
▲ 용연폭포 신문왕의 아들이 옥대 장식 하나를 떼어 물에 담그니,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 정명조
불령을 지나면 물이 흐르는 계곡을 만난다. 나무 계단이 조금 있지만 곧 흙길로 바뀌고, 그늘이 드리우고 길도 널찍해 걷기 좋다. 작은 물소리가 점점 커지는 곳에 낭떠러지가 있다. 굽이진 길을 따라 계곡에 들어서면 폭포가 눈앞에 펼쳐진다. 절벽이 폭포를 항아리처럼 감싸고 있다.
파인 바위 틈 사이로 하얀 물보라가 인다. 마치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하다. <삼국유사>에 나온 용연이다. 옥대와 대나무를 가지고 월성으로 돌아가던 신문왕이 행차를 멈추고 점심을 먹은 곳이다. 1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수렛재를 오가는 이들이 이곳에서 발길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 기림사 삼천불전 삼천불이 모셔져 있다. 건물 앞에 서면, 웅장함에 압도되어 숨이 멎는다.
ⓒ 정명조
폭포에서 나와 10분쯤 걸어가면 기림사다. <삼국유사>에는 지림사로 나온다. 선덕여왕 때 천축 승려 광유가 세워 임정사라고 했는데, 뒤에 원효가 다시 지어 기림사로 이름을 바꿨다. 왕의 길은 여기서 끝난다. 이 길을 따라 신문왕은 동쪽 바닷가를 오갔다. 신문왕은 감은사에 머무르다 대왕암이 훤히 보이는 이견대에서 바다로 나갔고, 문무왕은 용이 되어 옥대와 대나무를 그에게 주었다.
토함산자연휴양림에 짐을 풀었다. 토함산 남쪽 기슭에 있다. 문무대왕릉이 있는 바닷가까지 20여 분이면 갈 수 있다. 경주 바닷가를 여행할 때 알맞은 숙소다.
▲ 경주풍력발전단지 풍력발전기 7대가 돌아가고 있다.
ⓒ 정명조
숙소에서 쉬는 동안 소나기가 지나갔다. 땅이 젖었다. '바람의 언덕'을 찾았다. 경주풍력발전단지가 있는 곳이다. 휴양림에서 차로 5분 남짓이면 닿는다. 주차장 한쪽에 있는 정자 경풍루에 올라서면, 굽이진 토함산 능선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정자 아래쪽은 토함산 수목경관숲이다. 산책로가 만들어져서 걷기 좋다.
▲ 경주 바람의 언덕 멀리 토함산 너머로 해가 넘어간다.
ⓒ 정명조
안개가 살포시 내려왔다가 사라졌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해 질 무렵이 가까워지자, 차들이 몰려왔다. 이곳은 나름 노을 맛집이다. 노을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시원한 바람에 다들 즐거워했다. 해가 잠깐 나왔다가 토함산 너머로 넘어가고, 수목경관 숲도 어둠에 잠겼다. 멀리 불국사 아랫마을에 불이 켜졌다. 풀벌레도 더위에 지친 듯, 요란스레 울지 않았다. 풍력 발전기 날개만 윙윙거리며 세차게 돌아갔다.

신라 문화의 품격을 알려주는 절터

소불 정양모 선생은 경주박물관장을 두 번이나 지냈다. 그는 장항리사지를 '신라 문화의 품격을 알려주는 세 가지'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절터는 토함산 동남쪽 기슭에 있다. 절 이름을 알 수 없어 마을 이름인 '장항리'를 따서 장항리사지라고 부른다. 토함산자연휴양림에서 시작된 탑정천이 절터 앞을 흐르고, 3km쯤 떨어진 한수원 본사 앞에서 대종천과 합해져 감은사지 앞을 지난다.

예전에는 장항리사지에 가기가 쉽지 않았다. 안내 표시도 없었다. 계곡을 건너 풀숲을 헤치고 비탈을 올라가야 했다. 비 오는 날에는 계곡을 건너지 못하고, 큰 길가에 서서 바라만 보았다. 지금은 길가에 주차장이 생기고,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놓이고, 절터로 올라가는 비탈에 계단도 만들어졌다.

토함산자연휴양림에서 감포로 가는 옛길 '불국로'를 따라 5분쯤 달렸다. 세 면이 계곡으로 둘러싸인 좁은 절터에 오르면 서오층석탑과 동오층석탑과 석불대좌가 있다.
▲ 장항리사지 오층석탑 부서진 탑을 모아 쌓아놓았다.
ⓒ 정명조
▲ 동오층석탑 몸돌 1층 몸돌에 새겨진 문짝과 문고리와 금강역사상이 살아 숨 쉬는 듯하다.
ⓒ 정명조
일제강점기 때, 도굴범이 사리 장치를 노리고 서탑을 폭파했으나 9년 뒤 복원되었다. 1층 몸돌 네 면에는 문짝이 파여 있고, 문짝 양쪽에는 금강역사상이 새겨져 있다. 금강역사상은 연꽃무늬 위에 서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뛰어나올 것 같은 표정이다.

문짝 한가운데에 있는 문고리 한 쌍이 눈길을 끈다. 커다란 눈, 두툼한 코, 꽉 다문 입이 도깨비 얼굴을 닮았다. 입에 물고 있는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문이 열릴 것 같다.

동탑은 절터가 무너져 내리며,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져 있었다. 1966년에 이르러 흩어진 조각들을 거두어, 기단부 없이 1층 몸돌 위에 지붕돌만 5개 쌓아놨다. 서탑과 마찬가지로 1층 몸돌에 문짝과 문고리와 금강역사상이 새겨져 있다. 금강역사상 일부가 깨졌지만, 남은 것은 서탑보다 오히려 더 결이 곱고 부드러워 살아 숨 쉬는 듯하다.
▲ 석불대좌 아랫단에 생떼를 쓰는 아기 사자상을 새겼다.
ⓒ 정명조
동탑 오른쪽에 불상은 없고, 지름 2.4m쯤 되는 석불대좌만 남아있다. 윗부분은 원형으로 연꽃무늬를 새기고, 아랫부분은 팔각형으로 장수상과 사자상을 새겼다.

사자상은 앙증맞고 익살스럽다. 눈은 부릅뜨고, 두 손은 주먹을 꼭 쥔 채 치켜 들었다. 이빨 사이로 두툼한 혀를 내밀고, 배는 홀쭉하며, 가슴은 힘을 주어 불룩하게 부풀렸다. 땅에 앉은 채 왼발은 바닥을 딛고, 오른발은 배를 차 올리듯 하고 있다. 꼭 아기 사자가 무엇인가를 해달라며 투정을 부리는 모양새다.

대좌 위에 모셨던 석불은 서탑이 폭파될 때 부서져 계곡에 흩어져 있었다. 이들 조각을 모아 복원하고 수리하여 국립경주박물관 옥외 전시장에 두었으나, 지금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만파식적 뒷이야기

만파식적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 <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간직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이를 만파식적으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국사편찬위원회>

100년쯤 지나, 만파식적 이야기는 <삼국유사> 원성대왕조에 다음과 같이 한 번 더 나오고, 그 뒤로는 기록에서 자취를 감춘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 효양이 대대로 전해져 오는 만파식적을 왕에게 전했다. 786년, 일본 왕 문경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고 했으나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돌렸다. 금 50냥을 사신에게 주어 보내 만파식적을 청했다. 왕이 사신에게 말하기를 "내 듣건대 상대의 진평왕 때에 그것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듬해 다시 사신을 보내어 금 1천 냥으로 그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사양하였고, 그 피리를 내황전에 보관했다.

한편, 김부식은 <삼국사기> 제32권 잡지 제1편에서 만파식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언급했는데, 이는 <삼국유사>보다 약 140년 앞선 기록이다.

옛 기록에는 "신문왕 때 동해 가운데에 홀연히 작은 산이 나타났는데… 왕이 사람을 시켜 베어다가 피리를 만들고 이름하여 만파식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비록 이러한 이야기가 있으나, 괴이하여 가히 믿을 수 없다(雖有此說, 怪不可信).

따라서, 만파식적 이야기는 <삼국사기>가 편찬되기 훨씬 전부터 여러 문헌에 실렸고, 사람들 입에도 널리 오르내렸던 듯하다. <논어> 술이편에 "공자께서 괴이한 힘과 어지러운 귀신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라고 했는데, 이에 따라 김부식은 만파식적에 관한 기록을 <삼국사기>에 자세히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감은사지 장항리 절터에서 15km 떨어져 있다. 들판 너머에 대종천이 흐른다. 몽골군이 황룡사 대종을 가져가려다 물에 빠뜨렸다고 하여,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하지만 이는 일제가 억지로 꾸며내서 퍼뜨렸다는 말도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동해천(東海川)으로 실렸다.
ⓒ 정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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