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인내'가 만드는 희망

김하진 2025. 8. 29.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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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함영기 소설집 <지훈이의 캔버스>

[김하진 기자]

<지훈이의 캔버스>(2025년 7월 출간)은 소설집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 책이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아니면 르포인지 잘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아마도 소설같지만 현실 속 이야기이고, 현실같지만 소설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오랜 시간 중학교와 대학교, 교육청과 교육부를 거치며 교육에 관한 글을 써 온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에는 교사의 고민과 갈등이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마치 현직 교사에게 직접 전해 듣는 이야기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작가 자신의 오랜 경험이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듯했다.
▲ 지훈이의 캔버스 책 사진
ⓒ 김하진
젊은 시절, 나는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7년 정도 근무한 적이 있었다. 순수하고 열정적이던 이십 대 때였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아이들과 함께 고군분투하면서 정말로 다양한 경험을 했다. 눈물 나게 애틋하고 가슴 찡하게 감동적인 일들도 있었지만, 때로는 교사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마음을 주저앉히는 일들도 있었다.

그때의 절망과 슬픔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온통 잿빛으로 물들어 버린다. 마주하기 힘들었던 기억과 내밀한 고통을 오랜 시간 비밀 상자 속에 꽁꽁 숨겨 둔 채로 살아왔다. 그런데 '지훈이의 캔버스'를 읽는 순간 그 상자가 나도 모르게 스르륵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교실 붕괴 담론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아이들 스스로 자기 문제나 가정 혹은 친구 간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경우 민 선생은 상담자이면서 중재자이자, 아이가 기댈 언덕이 되어 주고자 했다. 아이들에게만큼은 진정성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왔다 착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결과가 이런 거였나. 거울 속의 중년 교사는 무척이나 고단해 보였다. - '시발 롤 모델' 중에서

민 선생은 자신의 눈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욕설을 내뱉는 남학생 때문에 교사 생활에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그는 '평온한 인내'를 발휘하여 아이의 잘못을 그냥 덮어 주었다. 그리고 그 작은 사건은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이는 민 선생 주변을 계속해서 맴돌았고 민 선생이 지도하는 걷기 동아리에도 스스로 가입했다. 아이를 향한 크지도 작지도 않은 관심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배려가 아이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인 거였다. 결국, 아이는 민 선생에게 놀라운 고백을 했다.

"샘, 그거 몰랐죠? 샘은요, 내 롤 모델이에요. 아, 시발 말하고 보니 쪽팔리네."

아이가 졸업한 후, 연락은 끊겼다. 민 선생은 또다시 '평온한 인내'를 발휘하여 아이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 후로도 비슷한 아이들을 몇 명 더 만나게 되었다.

교사를 하면서 가슴속에 가장 많이 품었던 말이 '진심은 통한다'였다. 어쩌면 지푸라기처럼 쥐고 있던 간절한 바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교사가 진심을 다해 노력하면 아이들도 학부모도 그 마음을 알아주리라는 기대를 품었었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 그 진심은 너무도 쉽게 외면당하거나 짓밟히곤 하는 게 현실이었다. 다루기 힘든 아이들을 맞닥뜨렸을 때, 나는 혼자서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했었다. 교사 경험이 부족했기에 민 선생처럼 '평온한 인내'를 발휘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늘 아이들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거나 멀리 도망쳐 버리는 것 중 하나의 방식만을 선택했다.이 책을 읽으며 '그때 조금만 더 평온하게 인내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랬다면 나도 아이도 덜 상처받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학교를 나온 지 이제 이십 년 가까이 지났다. 여전히 학교 안에는 어둠과 절망이 도사리고 있고, 동시에 빛과 희망도 웅크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어둠보단 빛을, 절망보단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지훈이의 캔버스 지훈이의 캔버스 책 사진
ⓒ 김하진
지훈이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모든 수업 시간에 교과서에 낙서만 하는 아이였다. 담임은 그런 지훈이를 닦달하거나 몰아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도화지를 사 주며 그림을 마음껏 그리게 했다. 도화지에 그림을 다 그리면 새 도화지로 바꾸어 주기를 여러 번 하는 동안 지훈이의 그림은 달라졌다.

칭찬을 받자 더 신나게 그림을 그렸고 학교에서 늘 소외당하기만 했던 지훈이는 점점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이며 자기만의 꿈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선생님, 지훈이가요. 어렸을 때 귓병을 앓았어요. 언젠가 갑자기 들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먹고사느라 바빠 치료 시기를 놓쳐 결국 한쪽 귀를 못 듣게 됐어요. 지금 나머지 한쪽도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고 하네요. 애가 아주 어려서부터 집 안의 온 벽과 바닥에 낙서를 하곤 했어요. 그게 재주가 될 줄 모르고 많이 혼내기도 했지요. 제가 선생님이 써 주신 글을 몇 번이나 읽어 보았어요. 그거 읽고 많이 울었습니다." - '지훈이의 캔버스' 중에서

지훈이의 엄마가 선생님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고 보면 교사란 참으로 부담스러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아이들 각자가 처한 특수한 상황까지 일일이 들여다보고 교육적으로 배려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아주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스승의 날 선생님을 찾아온 지훈이가 한 말 속에 그 해답이 숨어 있었다.
"선생님은 저를 최초로 인정해 주신 분입니다. 선생님, 사랑해요."

인정해 준다는 것! 아이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고 인정해 주는 것이 어쩌면 가장 좋은 교육이고 교사와 아이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애나 약점을 꾸짖기보다 아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고 기다려 주는 것이야말로 교사의 올바른 역할인 것이다.

그리고 '평온한 인내'를 지니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것은 학교 안에서 만나는 모든 구성원에게 반드시 필요한 태도이다. 교사는 아이에게, 학부모는 교사에게, 또 아이는 교사에게 평온한 인내를 가지고 대할 수만 있다면 학교라는 공간도 더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이 책은 현재 학교에 있는 학생, 교사, 학부모에게는 다정한 공감과 위로가 되어 줄 것이고, 이미 학교를 떠난 이들에게는 교사와 학생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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