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교육 실천가 윤영규 열사
[김삼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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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 윤영규 위원장 전교조 초대 위원장인 고 윤영규 위원장의 하관식을 가족들이 지켜보고 있다. |
| ⓒ 윤근혁 |
전교조는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한국교원노조'가 붕괴된 지 28년 만에 참교육을 바라는 국민의 기대와 교사들의 노력으로 결성된 것이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이 전교조 결성을 탄압하면서 교사들은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연세대학에서 어렵게 창립대회를 갖게 되었다.
전교조가 내건 참교육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인간화 교육
1. 사랑과 믿음과 나눔의 생활
2. 더불어 사는 즐거운 삶
3. 점수보다 사람됨을 중시
4. 인간을 존중하는 생활
민주교육
1. 민주주의 올바로 알기
2. 민주적 생활태도 실천하기
3. 민주적인 학교생활, 학생회 활동
4. 자율적으로 생각, 행동하기
민족교육
1. 우리나라 우리민족 사랑하기
2. 민족적 자부심과 주체성 갖기
3.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노력
4. 우리 역사 바로 알기
전교조의 조직과 운영 그리고 참교육 실천의 맨 앞장에 선 인물이 윤영규였다. 그는 1935년 10월 10일 광주광역시 금동시장 입구에서 태어났다.
취학연령이 되자 윤영규는 광주 학강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가 일제의 징용을 피해 전남 화순탄광으로 들어가면서 2학년을 중퇴하고, 해방 후에야 다시 학업을 계속 할 수 있었다.
1946년 2월 가족은 광주로 돌아왔다. 윤영규는 광주중앙초등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3학년이 되면서 한 학년을 월반하여 공부를 하는 한편 신문배달, 우유배달을 하면서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다. 이렇게 시작한 고학은 대학시절까지 이어졌다.
윤영규는 20세가 되는 1955년 한국신학대학에 합격했다. 교회 선배의 주선으로 미 8군 소속 부대의 구두닦이로 학비를 벌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광주로 내려온 윤영규는 충장로의 광명당서점 점원으로 들어가 6개월 동안 일하여 마련한 돈으로 1956년 다시 한신대에 재입학했다. 이 대학은 각 학년마다 5등 안에 드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어서, 그는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생활비는 노동으로 해결하였다.
고학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윤영규는 군입대를 지원했다. 6대 독자라 면제가 가능했으나 학부병 아닌 일반병으로 지원을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1960년 3월 15일 치른 대통령 선거는 사상 초유의 부정선거였다. 윤영규는 한신대 4학년으로 과대표 겸 대의원대회 회장으로 연일 광화문까지 나가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하고, 4월 26일 이승만의 하야 소식을 듣고는 학생들을 모아 수습데모를 주도했다.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병역을 미필한 교사들이 대량 파면되면서 그는 목포 영흥고등학교의 요청으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신학과를 졸업하여 윤리과목이 전공이었으나 학교 측에서 영어 과목을 맡겨 영어교사가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교사 생활은 파란곡절을 겪게 되었다. 첫 부임한 학교는 3개월 만에 재단분규에 휘말려 물러나고, 1965년 숭문학원 야간부 강의와 캐나다연합교회 한국선교부 광주사무소에서 일 하면서 모처럼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고, 우체국에 다니던 이귀임씨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1967년에는 광주상고에서 10년 동안 교사로 지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그에게 생애의 변환점이 되었다. 1979년 12월 광주 YMCA사건으로 4개월을 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내고, 1980년 5월 전두환이 광주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할 때 이에 저항, 수습위원으로 활동하다가 6월 19일 끌려가 군사재판에서 3년 징역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학교에서는 해직되었다.
학교에서 쫓겨나자 1981년 한신대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1983년에 졸업했다. 1982년 2월 광주 YMCA 중등교사협의회가 구성되고 3월에 전국적인 YMCA 중등교사협의회가 결성되었다. 윤영규는 대학원 진학 중에 이 모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83년 8월에 복권된 그는 나주중학교에서 3년여 근무하고, 1986년 YMCA 중등교사협의회 3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5.10교육민주화선언'사건으로 감봉 처분 및 전출 발령을 받고, 이에 항의농성을 벌이다가 구속되어 이듬해 8월 고등법원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세 번째 해직에서 1년 만에 복권이 되었다.
1987년 6월항쟁은 교육계에도 큰 변화의 물결을 몰아왔다. 이 해 8월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 준비위원회가 발족된 데 이어 9월 28일 전교협이 창립되었다. 윤영규는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고 2대 회장, 그리고 1989년 5월 28일 전교조가 창립되면서 초대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윤영규는 전교조의 산모이고 리더였다.
전교조 위원장의 자리는 바로 감옥으로 가는 NO.1의 티켓이 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전교조를 적대시했다. 창립된 지 11일 만인 6월 9일 그는 집시법 위반, 불법간행물 발행, 국가공무원법 위반 등의 혐의로 다시 구속되었다. 양심적인 교사들의 '참교육' 운동을 정부와 족벌신문이 좌경으로 매도하고, 교육당국은 색안경을 끼고 참교육의 대의를 왜곡했다.
전교조는 참교육을 실현하는 7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1. 과중한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고 중학교까지 실질적인 무상의무교육 실시.
2. 교육재정을 대폭 확충하여 교육여건의 획기적인 개선
3. 이기적인 출세를 목표로 삼는 살인적인 입시경쟁교육을 전인교육으로 대체.
4.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보장.
5. 교사의 자주적인 단결권 등 시민적 기본권 보장.
6. 민주적인 학생자치 활동을 활성화하여 자율성 육성.
7. 돈봉투를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아 건강한 교사 - 학부모 관계 정립.
그는 구속된 지 1년 1개월 만에 출감하여 전교조 총회에서 91%의 지지로 제2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윤영규는 전교조 위원장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한국사회 전반의 민주화운동에도 깊숙이 참여했다. 1990년 민주쟁취국민연합 상임공동의장, 1991년 강경대 열사 살인 규탄 및 공안정국 타파를 위한 전국민대책협의회 상임공동의장, 1994년 5.18정신 함양 및 범국민대책 위원회 전국공동위원장, 1995년 광주광역시 교육위원 등을 역임했다.
전교조의 합법화를 위한 줄기찬 투쟁의 결과는 1998년 마침내 성취되었다. 수평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전교조 운동에 호의적이었던 김대중 정부가 창설 11년 만에 전교조의 합법성을 인정한 것이다.
전교조가 합법성을 인정받으면서 윤영규는 광주충장중학교에 복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9년 정년을 맞고, 전교조 위원장직도 물러났다.
정년퇴임 후에도 그의 활동은 여러 분야에서 계속되었다. 2000년 5.18기념재단 이사장, 2001년 동아시아 평화·인권 한국위원회 공동의장, 2005년 전교조 자문위원 등을 지내면서 그간의 경험과 경륜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윤영규 열사는 2005년 3월 31일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만 70세, 그동안 거듭된 옥고와 과로로 축적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운명하였다.
장례는 4월 4일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지고 국립광주 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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