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정에서 의문사 서울법대 교수 최종길 열사
[김삼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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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법대 근대법학 100주년 기념관에 설치된 최종길 교수 추모 부조. 서울대 법대 근대법학 100주년 기념관에 설치된 최종길 교수 추모 부조. |
| ⓒ 명예회복추진위 |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가 있다면
그것은 유신시대일 것이다.
그는 서슴없이 자신의 양심이 가리키는 길,
'쉽지만은 않은' 그 길을 갔다
공식적인 교수회의 석상에서
정부의 강압적인 시위진압을 비판하였고,
학생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양심은 수시로 공권력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중략)
전 세계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유신독재의 빙하기.
최종길 교수의 죽음을 바로 그 위에 놓여져 있다. (주석 1)
최종길 열사는 1931년 4월 28일 충남 공주군 반포면 삼신리에서 태어나 송현초등학교를 나와 인천중학교에 이어 제물포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가족이 인천으로 이사한 것이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모병중인 군인들의 눈에 띄어 미군 제7사단 31포병대에 전입되었다.
아직 전쟁중이던 1951년 군복무를 마치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당시 서울대학교는 부산에 임시 캠퍼스를 두고 있었다. 그는 부산에서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녔다. 1957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전공 분야는 민사법학이었다. 주위에서는 사법시험을 권했으나 고시 준비에 필요한 비용을 가족에게 의존하기 어렵고, 무엇보다 관직보다 학문을 더 하고자 하여 대학원 진학을 하게 되었다.
기술고문으로 한국에 온 스위스인 홀라키의 통역을 했던 인연으로 그의 추천을 받아 1958년 4월 스위스 취리히대학교 법과대학에 유학하고 1년 후 독일 쾰른대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홈볼트 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4년 동안 공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불어를 공부하고자 방학에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6개월 동안 프랑스어를 공부하였다.
그는 1962년 3월 '한국민법 및 국제사법에 있어서 이혼'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 학계 최초의 독일 박사학위였다. 귀국하여 2년 동안 서울 법대에서 시간강사를 하고 32세에 인천기독병원 산부인과 레지던트 백경자와 결혼했다.
1969년 박정희의 3선 개헌이 추진되면서 대학가는 소용돌이쳤다. 서울 법대는 그 중심이 되었다. 정교수가 되었고 학생과장이 된 그는 시위학생 문제로 당국(중앙정보부와 경찰)과 맞서 학생들의 보호에 나섰다. 걸핏하면 경찰이 시위학생들을 진압코자 학내에 난입하려고 하고, 그는 이를 철저히 막았다.
그의 우수논문이 알려지면서 하버드대학 엔친연구소의 교환교수 초청을 받았다. 1970년 3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연구활동을 계속하였다. 2년 만에 귀국했지만 한국은 유신체제라는 광기의 시대였다. 그는 서울법대 도서관장을 맡았다. 시위학생들이 붙들려가고 심한 고문을 받은 사실에 분노했다. 교수회의에서 제자들이 당한 실상을 폭로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학생들을 구타하고 고문하는 무도한 행위에 대해 정의를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모른 채 하면 안 된다."고 일갈했다. 그의 발언은 중앙정보부에 보고되고 정보기관은 그를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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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 최종길 교수 고 최종길 교수 |
그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은 두 명에 불과했고, 그 중 간첩으로 판명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즉 간첩은 단 하나도 없는 '대규모 간첩단(?)사건'이었던 셈이다. (주석 2)
박정희 정권은 유능한 교수의 '입틀막'을 위해 간첩사건을 조작하고 극심한 고문으로 사망하자, 그가 탈출하고자 7층 화장실 창문에서 뛰어내리다 추락사했다고 발표하고 경찰은 이에 동조했다.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날조였다.
최종길에 대한 수사를 사실상 총괄 지휘했던 장송록은 "최종길 교수의 부검 사진에서 나타난 것처럼 심하게 고문을 당한 상태에서는 7층 화장실은 물론 어디로든 제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걸어다니는 것은 고사하고 살아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최종길 교수의 시신을 옮겨 7층으로 올라간 것조차 사실이 아닐 것이며 더구나 걸어다니지도 못하는 사람이 화장실 창문을 타고 넘어서 자살을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살이 아니라 최종길 교수는 이미 고문으로 죽었거나 가사 상태에서 사고 현장으로 옮겨진 것이 틀림없습니다."고 진술했다. 그는 또 고문을 한 수사관으로 차철원·양병률·변영철·김상원 등을 지목하였다. (주석 3)
민주화의 진척에 따라 2001년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이 사건은 2002년 1월부터 조사에 나서 7천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수사기록을 검토했다.
그 결과 당시 중앙정보부가 아무 근거도 없이 최종길의 간첩 혐의를 조작했으며, 최종길이 '간첩혐의를 자백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하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이후락을 비롯한 지휘계통, 담당 수사라인, 감찰실 수사관들의 진술을 종합하여 볼 때, 최종길이 간첩임을 자백한 사실은 물론 그가 간첩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도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이후락은 최종길이 접촉한 사람에 대해서나, 북한에 갔다는 등의 얘기는 전혀 없었다고 진술하고, 증거가 부족했음을 인정했다. (주석 4)
하버드대 엔칭연구소 부소장 에드워드 베이커는 최종길의 죽음과 관련하여 이런 말을 했다.
"(최종길)이 우익 인사인 줄 잘 알면서도 간첩으로 몰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것은 '저런 우익 인사도 간첩으로 내몰려 죽을 수 있는 무서운 세상'이라는 인식을 널리 국민들에게 심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주석 5)
주석
1> 김기선 글, 박흥수 그림,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최종길>, 2002.
2>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편, <아직 끝나지 않은 죽음>, 602쪽.
3> 앞의 책, 635쪽.
4> 김기선, 앞의 책, 150쪽.
5> 앞의 책, 13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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