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고서야 네(詩)가 산다면!

안준철 2025. 8. 27.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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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희 원작소설 <옥봉>이 '문'으로 각색되다

[안준철 기자]

 장정희 장편소설 <옥봉> 표지와 충남학생연극제 출품작 <문> 대본
ⓒ 안준철
지난 25일, 충남 홍성문화원에서 제 27회 충남학생연극제 출품작 <문>을 관람했다. 원작은 장정희 소설 <옥봉>이다. 홍성여고 연극동아리 '두각' 지도교사 신경섭 선생님과 학생(동인서, 손하윤)들이 각색을 했다. 왜 제목을 <문>이라고 했을까?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연극 대본에 '작품 각색 이유'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문은 드나드는 통로이며 시문과 문은 동음이다. 꽉 닫힌 문을 옥봉은 어떻게 열려다 생을 마감했을까? 그걸로 끝난 것인가? 한강에 투신했던 옥봉의 시문은 시집 속에 박제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세상을 열려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져 이 세상의 억압된 문을 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허난설헌, 황진이, 이옥봉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성시인이다. 그 중 이옥봉은 가장 비극적인 생을 살아간 여성이다. 가부장제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그녀의 재능은 차라리 저주받은 축복이자 형벌이었다. 서녀로 태어나 또한 스스로 소실로 살아야 했던 옥봉은 딱한 처지에 놓인 아낙의 청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시 한 편을 써 준 일로 사랑하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쫓겨나 비참하게 연명하던 생을 스스로 마감한다.

이옥봉은 죽었지만 그녀의 분신이자 존재 증명인 시가 남았다. '내가 죽고서야 네(詩)가 산다면!' 옥봉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옥봉은 들기름을 먹은 시고를 치맛말기에 두르고 강에 몸을 던진다. 장정희 작가는 "처음 시를 몸에 감고 물에 빠져 죽은 여인의 이야기를 접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게 사실이든 신화적인 상상이든 중요하지 않았다.(작가의 말)"고 적었다.

하지만 소설 <옥봉>이 완성되기까지 십몇 년의 세월을 흘려보내야만 했다. 자료조사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쏟아부은 시간도 필요했겠지만, 당시 현직교사로서 "눈뜨면 출근하고 퇴근하면 원고에 고개를 처박는" 일상이 만만치는 않았으리라. 더욱이 여교사의 신분으로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상을 준비하고 정신없이 종종거리며 칭얼대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뛰다 보면 이미 땀으로 화장이 다 지워지던 시절, 종일 수업과 이어지는 업무에 야간 자습 지도까지 마치다 보면 너무 지쳐 퇴근할 힘도 없어 주저앉아 있던 시절"이었으니.

장정희 작가는 현직에 있을 때 개인 소장한 시집 중 60여 권을 교실로 가져와 학생들이 원하는 시집을 골라서 읽고 감상문을 쓰게 하는 수업을 했다고 했다. 그중에는 내 시집 <나무에 기대다>도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세 차례나 학생들이 쓴 감상문을 메일로 보내주었는데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전주에서 홍성까지 먼 걸음을 한 것은 그 빚을 갚고 싶었달까.
 연극 <문>의 한 장면
ⓒ 안준철
홍성여고 한문교사이자 연극반 '두각'의 지도교사인 신경섭 선생님은 <교육문예창작회> 회원으로 함께 활동하면서 인연을 맺어온 사이다. 소설 <옥봉>을 해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각색해서 무대에 올렸다는데 작년에 선보인 낭독극은 만족스럽지 않았던 모양이다. 올해는 1시간짜리 연극으로 올렸는데 공연 전날 새벽 3시가 넘어서까지 대본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고 했다.

원작 작가와 지도교사 그리고 홍성여고 연극동아리 학생들의 열정으로 탄생한 <문>을 주요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줄거리를 따라가 본다.

이옥봉(이숙원)은 이봉의 서녀다. 왕실의 후손인 이봉은 벼슬살이보다는 어디에도 매인 바 없는 풍류 가인의 삶이 좋았다. 지리산 유랑 중 낙상하여 첩첩산중 민가에서 지내던 여인의 도움을 받는다. 옥봉은 그 여자에게서 얻은 딸이다. 옥봉을 낳다가 죽는다. 옥봉은 어려서부터 시문을 잘 지어 이봉의 아들 순남과 함께 아버지로부터 시를 배운다. 그 중 한 장면이다.

순남 : 옥봉?(고개를 갸웃거리며) 구술 옥에 봉우리 봉?
숙원 : 아름다운 것을 보면 제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제부터 제 이름을 대신하고 싶습니다.
이봉 : 그래. 세상에 이름 없는 것은 없지. 여자로 태어난 탓에 네게 맞는 이름을 갖기 어려운 시대가 아니냐. 너는 그 어쩔 수 없음을 한탄하는 대신 스스로 이름 짓기를 대신하였구나.
숙원 : 송구하옵니다.
이봉 : 아니다. 옥봉이라면 내가 지어줘도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가 없겠다. 옥봉 옥봉, 옥돌이 솟아오른 듯 아름다운 봉오리. (다정스럽게)옥봉아!

이봉의 정실부인인 장씨는 옥봉을 천것이라고 구박하고 형편이 안 좋은 곳으로 시집 보내려고 한다. 옥봉은 장씨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배필은 스스로 찾아보겠노라고 당당히 맞선다. 소실의 딸인 자신의 처지도 처지인지라 인품이 있고 시를 좋아하는 조원의 첩이 되길 자청한다. 바로 그 대목이다.

이봉 : 고정하시오. 옥봉이 이야길 들어봅시다.
옥봉 : 소실로 가겠습니다.
장씨 : (화색이 돌며) 그래 잘 생각했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 아니더냐.
옥봉 : 단,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고 흠모할 수 있는 사람과 살고 싶습니다.

조원은 과거시험에 합격한 수재로 우여곡절 끝에 옥봉의 청을 받아들이지만 조정의 당쟁에 휘말리기를 원치 않아 옥봉에게 공적인 글은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는다. 옥봉도 사랑하는 남편이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약속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소도둑의 누명을 쓴 남편을 위해 소를 써달라는 아낙의 거듭된 청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한 편의 시를 써준 것이 화근이 된다. 바로 이 시다.

세숫대야를 거울로 삼고
물로 기름 삼아 머리를 빗습니다.
이 몸이 직녀가 아닐진대
어찌 제 남편이 견우이겠습니까?

얼마 후 조원은 이 시를 들고 찾아온 파주 목사에게 모멸을 당하고 옥봉은 집에서 쫓겨나 비참한 나날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한다. 후에 옥봉의 시집이 명나라 해안가에서 발견된다. 조원의 아들 조희일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이옥봉의 죽음을 알고 시집을 필사한다. 실제로 옥봉은 중국 명나라까지 시명(詩明)이 알려진 여류 시인으로서 그녀의 시는 맑고 씩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중국과 조선에 펴낸 시집에서는 허난설헌의 시와 나란히 실려 있다.

홍성여고 연극동아리 학생들의 연기는 출중했다. 주인공 옥봉의 가녀린 듯 결기가 보이는 눈빛 연기가 일품이었지만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연기에서는 주연급이었다. 특히 옥봉을 구박한 장씨의 쌀쌀맞은 눈빛과 거동이며, 옥봉을 흠모했던 이봉댁의 머슴 두만이의 씩씩한 연기도 돋보였다. 옥봉이 남편에게 쫓겨난 것을 뒤늦게 알고 찾아와 "왜 천금 같은 재주가 용렬하기 그지 없는 그 사람의 것이어야 합니까? 세상에는 아픈 자가 지천이옵니다. 아씨의 시가 아픈 자들에게 닿아야 하지 않어유?"하고 항변할 때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옥봉과 힘든 세월을 함께 견딘 이봉 댁 하녀 부월도 극에서 중요한 역이다. 부월은 두만이를 좋아한다. 극 말미에 옥봉은 부월에게 부엌에서 부지깽이를 가져오라고 한 뒤, 소나무 부지깽이를 숯 삼아 두만에게 부월을 부탁하는 편지를 쓴다.

한편, 시장에서 개떡을 훔치다 들켜 도망가다가 옥봉과 마주치는 가난한 남장 소녀 맹아는 옥봉이 서녀이자 소실인 자신도 경험한 적이 없는 참혹한 사회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옥봉은 맹아에게 이렇게 묻는다.

"맹아라고 했지? 무슨 뜻이지? 누가 지어준 이름이야?"
아이는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대답한다.
"몰라요. 아무나 그렇게 불러요. 멍청하다고요."
이번에는 옥봉이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말한다.
"아닐 거야. 너는 앞 못 보는 소경 같은 멍청한 그 맹아가 아니야. 이제 막 돋은 연하디연한 푸른 새싹, 그 맹아야. 세상에서 가장 예쁜 이름이지."

이 대목에서도 코끝이 찡했다. 소설가이자 국어 교사였던 장정희 선생님의 교사로서의 DNA가 느껴졌달까. 연극 끝자락에 맹아를 다시 소환하여 화룡정점을 찍는다. 옥봉의 눈빛 연기가 빛을 발하는 마지막 대사다.

옥봉 : (종이에 들기름을 입힌 후 품 안에 넣고 가며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들을 본다.)
내 글은 과거의 문이었으나 미래의 열쇠가 될 것이다. 맹아야, 얼어붙은 땅을 딛고 돋은 이른 봄 새싹 같은 아이야! 너는 평생의 고통과 슬픔으로 전생의 죄, 이승의 빚을 갚았으니, 부디 다음 생에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 고생하지 말고 부디 푸르디 푸른 꿈 마음껏 펼쳐라. 얼어붙어 꼼짝 않는 문을 열고 바깥세상으로 나가 꽃을!
 <옥봉> 원작자 장정희 선생님과 홍성여고 연극동아리 학생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안준철
임철우 소설가는 추천사에서 "일찍이 중국과 일본에서 먼저 그 놀라운 천재성을 인정받았던 이옥봉, 수백 년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마침내 작가 장정희의 손끝에서 생생하고 감동적인 모습으로 재탄생한다"라고 상찬한다.

장정희 작가는 1995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4년 <문학과 경계> 신인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홈, 스위트 홈> 등과 청소년 소설 <빡치GO 박차GO> <사춘기 문예반>을 출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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