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저성장과 자산 양극화 시대의 생산적 금융의 역할

정부가 올해 경제성장률을 0.9%로 예측했다. 워낙 성장률이 떨어진 데 대한 충격이 크기 때문에 주목도가 떨어지지만 우리 경제가 마주한 자산 양극화 문제도 만만치 않다. 2024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소득 상위 20% 가구가 전체 자산의 45.8%를 차지하는 동안 소득 하위 20%의 몫은 6.3%에 불과하다. 순자산 기준으로는 더욱 심각하다. 상위 10%의 가구가 전체 순자산의 44.4%를 보유할 때, 하위 10%의 점유율은 -0.1%로 사실상 빚만 안고 있는 셈이다.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순자산 지니계수는 자료를 공개하기 시작한 2017년 이후 계속 악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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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 멈추고 자산 양극화만 심화
순자산 3억 미만 가구 절반 넘어
자본 왜곡 풀고 혁신투자 늘려야
양질 일자리·중산층 복원 이끈다
」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통계는 순자산 보유액이 1억원 미만인 가구가 전체의 29.2%이고, 3억원 미만 가구는 전체의 56.9%를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열 가구 중 여섯 가구의 순자산이 3억원보다 적다는 뜻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100억 아파트 전액 현금 매매’나 ‘가상자산 10억원 이상보유 1만명’ 같은 자극적 뉴스는 대다수 국민에게 상대적 박탈감만 안겨줄 뿐 우리 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작년 한 해 100만 자영업자가 폐업, 48만 청년 인구가 ‘쉬었음’이라는 우리 주변의 진짜 이야기가 깊이 있게 다루어야 할 뉴스이다. 우리 경제는 성장이 멈추고 좋은 일자리는 사라지는데 왜 부동산 같은 자산만 가격이 치솟아 부의 불평등이 커지고 있을까? 한가지 이유는 자본이 생산성 높은 곳에 충분히 투자되지 못하고, 부동산 같은 비생산적 자산시장에 지나치게 흘러 들어갔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발간한 ‘산업별 자원배분의 비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보고서는 우리 경제의 총요소생산성 증가세 둔화의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총요소생산성은 노동이나 자본 같은 생산요소의 양적 투입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성장의 질’을 보여주는 지표다. 경제성장 초기에는 생산요소의 양적 확대가 주요 성장동력이나, 경제가 성숙할수록 이러한 자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하는지 나타내는 총요소생산성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핵심 요인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30년간 한국 경제의 총요소생산성 증가세가 둔화한 이면에는 기술 진보의 지체뿐 아니라 ‘자원배분의 비효율성’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동일한 자본과 노동으로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잠재력을 스스로 갉아먹는 상황과 같다. 이러한 비효율은 생산성이 높은 기업이 오히려 성장에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는 ‘고생산성-자원 과소 보유’ 현상을 중심으로 심화해 왔다. 특히 노동력보다는 자본의 배분 왜곡이 두드러졌으며, 이러한 자금 조달의 어려움은 제조업보다 서비스업, 기존 기업보다 혁신적 신생기업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를 나타내는 한 가지 지표는 스타트업 창업 5년 후 생존율인데, 한국은 약 34% 수준으로 미국(51.9%), 네덜란드(61.9%), 프랑스(50.8%) 등 주요 선진국보다 현저히 낮다.
이 상황을 타개할 한 가지 방법은 자본의 물줄기를 바꾸는 ‘생산적 금융’으로의 전환이다. 시중의 막대한 유동성을 부동산이나 가상자산 같은 비생산적인 자산시장보다는 기술 R&D, 혁신 스타트업 육성, 산업 설비 고도화 등 실질적인 부가가치와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생산적 영역으로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생산적 금융으로의 전환은 단순히 성장률 수치를 끌어올리는 것을 넘어, 저성장과 자산 양극화라는 두 개의 고질병을 동시에 고칠 수 있는 ‘이중의 배당(Dual Dividend)’을 약속할 수 있다. 첫째, 혁신기업에 대한 자본 공급은 생산가능인구 감소 시대에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릴 거의 유일한 해법인 총요소생산성을 직접 높인다. 둘째, 혁신기업의 성장은 안정적이고 부가가치 높은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 중산층 복원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자본시장 활성화는 평범한 국민도 소액으로 유망 기업의 주주가 되어 성장의 과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는 ‘부동산 불패’ 신화에 기댄 자산 격차의 고리를 끊고, 혁신과 노력이 보상받는 건강한 부의 형성 경로를 복원하는 길이다.
생산적 금융이 마중물 역할을 하려면 기업이 뿌리내리고 열매 맺을 수 있는 건강한 토양이 우선되어야 한다. 가장 근본적인 토양은 바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세계 무역질서를 흔들면서까지 얻고자 한 것은 자국 영토 내의 기업 투자와 제조업 생태계다. 올해 4.45%라는 눈부신 성장률이 예상되는 대만 역시 정부와 기업이 원팀이 되어 대규모 R&D 세액공제, 연구개발 자금 공동 투입, 산학협력 확대, 인재 유치 등 전례 없는 지원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 흐름과 비교할 때, 우리 정치인들의 현실 인식은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 안일한 것인가. 마지막 기회일지 모르는 지금, 금융당국이라도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정책의 실효성을 높여주길 기대한다.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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