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덮친 그날, 아들 맡기고 남편과 인사... "하나는 살아야 하니까"
<월간 옥이네> 8월호는 '재난 이후의 공동체'를 기록하고자 했습니다. 산불과 수해를 겪은 옥천 마을들, 지난해 큰 비로 제방이 붕괴되며 수해를 입은 대전 정방마을, 올해 3월 사상 최악의 산불을 겪은 경북 의성 점곡면까지. 재난 이후 마을이 어떻게 다시 연결되고 회복되는지를 따라가 봤습니다. <기자말>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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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이 지나간 후 과수원. 한창 푸르러야 할 풍경이 마치 겨울처럼 앙상하다. (사진제공 : 김경희씨) |
| ⓒ 월간 옥이네 |
그러나 이 침묵을 먼저 깬 이들이 있었다. 피해 한가운데서 서로를 붙들고 다시 일어난 여성들 – 구학선·강민재·김경희·김도희·장정희·황추랑씨는 각자의 삶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곧 '점곡면산불피해주민모임'으로 이어졌고, 이후 재난 대응과 마을 회복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었다.
이번 인터뷰는 그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재난 이후 마을을 다시 잇는 힘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기록하고자 한다. 동시에 재난 당시 현장에 닿지 않은 행정 대응, 부족한 정보 속에서 각자가 감당해야 했던 불안과 판단의 순간도 함께 살펴본다.
지난 7월 17일 점곡체육문화센터에서 강민재·김경희·김도희·장정희·황추랑씨 등 다섯 명과 나눈 이야기를 정리해 담는다. 점곡여성농민회 구학선 회장은 아쉽게도 개인사정으로 인터뷰에 함께하지 못했음을 밝힌다.
"이렇게 무섭긴 처음이었다"
강민재씨는 주말을 경북 구미에 있는 언니 집에서 두 아들과 함께 보내고 있었다.
"그날 오전 11시쯤 뉴스에서 안평면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바람이 강하긴 했지만 불이 설마 우리 마을까지 건너오겠나 싶었죠."
그러나 불길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번져갔다. 이 소식은 공식 재난문자나 행정의 대피 명령보다 먼저, 학부모 단체채팅방을 통해 실시간으로 쏟아졌다.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든 민재씨는 두 아들을 언니에게 맡기고 의성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마을로 통하는 도로가 봉쇄되고 있었다.
"점심 먹고 나니 시댁이 구암(점곡면 구암리)에 있는 동네 언니가 연락을 줬어요. 불이 재랫재 쪽으로 넘어간다고 하는 거예요. 생각보다 불이 크구나, 큰일났다 싶었죠. 아이들은 언니에게 맡기고 곧장 의성으로 향했어요. 그때가 오후 4시 반, 5시 쯤? 이미 구암 쪽 도로는 통제 중이더라고요.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냐' 싶었어요. 그래도 그땐 점곡은 괜찮았어요. 동네 언니와 계속 카톡(카카오톡 하면서 상황을 지켜봤죠."
다음 날인 일요일(3월 23일)에는 "불이 슬슬 잡히고 있다"는 말도 들려왔다. 다행이다 싶어 구미에 있던 아들들을 데려왔고, 월요일엔 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그날 점심 무렵, 갑작스레 조기 하교 공지가 도착했다.
"아이들을 데려가라는 연락이 왔어요. 그때부터 이상하단 느낌이 들었죠."
유례없는 강풍과 고온건조한 날씨를 타고 불길은 점곡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확한 산불 상황을 알 순 없었지만 심상치 않다는 직감만은 무시할 수 없었다. 민재씨는 아들들을 다시 언니네로 보냈다. 그리고 그날 밤 마을 인근 산 능선이 시뻘겋게 타오르는 모습을 목격한다.
하지만 당시 마을 분위기는 여전히 '혹시'와 '설마'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대피명령은 없었고, 산불 상황을 전달받을 공식채널도 부재했다. 주민들은 지인 혹은 모임 단체채팅방 등 비공식 통로를 통해 알음알음 소식을 전해들었을 뿐이다.
이런 상황이 급변한 건 3월 25일 화요일 오후. 불길이 본격적으로 마을을 덮치면서다. 오전까지만 해도 평온했던 마을에 불어온 강풍은, 매봉산을 넘은 불길을 더욱 돋우며 순식간에 동변리와 비대골을 집어삼켰다.
3월 22일 의성에 불이 난 순간부터 내내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는 김경희씨는 불길이 들이닥치기 직전인 25일의 오전 풍경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불이 넘어오기 전부터 연기가 정말 엄청났어요. '이거 큰일나겠다' 싶었죠. 그런데도 마을 분들은 밭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생각해보세요, 연기가 자욱한 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앞집 언니도 일하고 계셔서 '언니, 지금 일하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했더니 '심각하면 피하라고 하겠지' 하시더라고요. 우리 동네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다들 심각한 상황이면 '당연히' 이미 대피명령이 내려졌을 거라 생각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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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불 당시 하늘에서 본 경북 의성군 점곡면 일대 풍경. 화재로 인한 연기가 일대를 자욱하게 감싸고 있다. (사진제공 : 강민재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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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면)에 사과밭이 있어서 걱정이 좀 됐지만, 남편이 괜찮다기에 안심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뉴스를 보고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게 됐죠."
버스를 타고 의성으로 돌아오는 길, 영주를 지나 안동 쪽으로 접어들 무렵 버스의 또 다른 승객이 급하게 전화를 받으며 "큰일났다"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점점 다가오는 불길을 버스 안에서도 감지할 수 있었다.
"절벽 쪽에 불띠가 보이더라고요. 산은 불에 많이 타버린 상태였고요. 미천강 건너편은 이미 난리였고, 저희는 그저 불길이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기만을 기도하며 지켜보고 있었죠."
3월 25일 화요일 새벽, 도희씨는 마을 건너편 산자락 아래 있는 집에 들러 국을 전해주었다. 전날 귀갓길 소방대원들이 그 집 주변에서 불길을 잡는 것을 본 참이었다. 다행히 그 집은 소방대원들이 지켜낸 상황이었다. "이제 불이 지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도했지만, 집에 돌아왔을 땐 마당 가득 연기가 자욱했다.
"연기 방향을 살펴봤더니, 단촌(면) 어딘가에서 다시 불이 난 거예요. 저 불이 강 건너편인 우리 쪽으로 넘어오느냐 마느냐 기로에 서 있었죠. 그래도 오전까지는 평소처럼 할 일 하면서 보냈어요. 그러다 점심이 지나면서 바람이 엄청나게 세게 불었죠.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급히 밭으로 달려가 스프링클러를 돌리려 했지만, 겨우내 쓰지 않던 장비라 말썽이었다. 부품을 찾으러 집으로 되돌아오던 길, 도희씨는 마을 쪽에 불씨가 떨어져 번지는 걸 목격한다. 즉시 소방서에 신고하고, 주민들에게도 연락을 돌렸다. 남편이 있는 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소방서 차량이 도착하고 난 뒤엔 이미 도로 통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단촌면으로 우회하는 길도 모두 차단된 상태였다.
"동네 젊은 사람들이 통제하면서, '얼른 형님 나오시라고 전하라'며 저를 막더라고요. 그때 처음 '아, 이건 전쟁통이구나' 싶었죠. 생이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장한 마음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했어요. '난 여기서 목숨 부지할 테니, 당신도 여차하면 수로에라도 뛰어들어라'고. 그런데 남편은 밭을 떠날 수가 없다고, 사방에 불똥이 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상황에서도 불을 끄고 있었던 거예요."
후에 남편에게 전해들은 상황은 무시무시했다. 먹구름처럼 몰려드는 연기와 불티. 그것들이 땅 위로 떨어져 불씨가 되고, 다시 주변으로 번져갔다. 곧 점곡면 전역에 '전체대피령'이 떨어졌고, 주민들은 점곡초등학교 강당으로 모여들었다. 집에선 소식을 알 수가 없어 답답한 마음이었던 도희씨 역시 점곡초로 발길을 옮겼다.
"그날은 저녁 7시가 돼도 환했어요. 보통 3월엔 5시 넘어가면 어둑어둑해지는데, 마치 대낮 같았죠. 불빛이 뒷산(매봉산)을 덮었는데, 그 큰불이 동변(리)을 향해가는 게 그대로 보였어요.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저 어쩔 수 없이, 불길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죠."
산불은 마치 모든 어둠을 집어삼킨 듯, 점곡은 밤에도 환한 빛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통제됐던 길이 열린다는 소식에 남편이 있는 밭으로 달려갔다.
"그 사이에 불에 다 탄 거예요. 이제 태울 만한 건 다 태우고 지나간 거지... 마을 카톡방에도 뭐라 올릴 수가 없더라고요. 서로 안부를 묻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죠. 민재씨 부모님, 추랑씨가 사는 동변리 쪽이 거의 다 전소됐다는 얘기를 듣고는 가슴이 철렁했어요. 우리 가족도 오래 살던 동네였거든요."
불길은 능선을 따라, 골짜기로, 마을로, 사방으로 번져갔다. 동변리를 비롯해 사촌리, 비대골 등의 피해가 컸다. 특히 지형이 좁은 골짜기 마을인 사촌리 비대골은 산 능선 양쪽에서 타고 들어온 불길에 휘감기며 10가구 중 9가구가 전소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들리지 않았던 경고
장정희씨는 점곡에서 마을학교 운영에 참여하는 마을 활동가이자 학부모다. 산불이 마을에 도달하기 전인 3월 22일 토요일 오후, 그는 어린이들과 함께 학교에 있었다.
"그날도 마을학교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놀다가 산 쪽을 보니, 연기가 넘어오고 있더라고요. 그날 바람이 무척 세서 놀이터에 걸쳐놓은 옷이 날아다닐 정도였죠."
과거 캠핑을 즐겨 기상예보 확인이 습관이었던 정희씨는, 그날 유독 심상치 않은 바람의 세기를 또렷이 기억한다. 하지만 마을에는 그 어떤 경고도 없었다. 지난해 귀촌해 마을에 정착한 그에게 학부모 단체채팅방은 사실상 유일한 정보 통로였다.
"저도 처음엔 상황이 심각한 줄 몰랐어요. 눈에 보이는 불길도 없었고, 우리 마을엔 아직 피해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22일 오후 5시 넘어서인가, 학부모 단톡방에서 누군가 천제공원(의성읍에 있는 공설화장터)이 불바다가 된 사진을 공유했어요. 그걸 보고서야 '이거 정말 큰일이구나' 싶었죠."
이후 단톡방에는 산불 관련 정보가 빠르게 공유됐다. "단촌 쪽에 불이 났다더라, 고운사 위쪽까지 번졌다더라, 구암이 위험하다고 한다"는 등의 소식이 이어졌지만, 마을 방송이나 문자 알림 등 공식 안내는 여전히 없었다. 정희 씨는 당시 스마트폰 앱으로 확인한 강풍 예보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 정도 바람이면 진화도 어렵고, 불이 금방 넘어올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한편에 떠올랐다. 정희씨는 강풍 예보에도 아무런 대응이 없었다는 점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불이 가장 심하게 번졌던 25일 아침에 이미 바람이 얼마나 강할지, 방향이 어디로 불지 다 예보돼 있었어요. 그걸 몰랐을 리 없잖아요. 그럼에도 미리 대피 안내나 준비를 하라는 말은 없었어요. 그러니 화가 나는 거죠."
그렇게 주민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작스레 불길과 맞닥뜨려야 했다.
"미리 짐 싸고, 가족들 챙기고, 간단한 대피 준비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허둥대진 않았을 거예요. 물론 집은 탔을 수도 있지만, 소중한 물건을 챙겨나올 수도 있고, 다른 지역 인명피해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그걸 생각하면 너무 아쉽죠."
불이 다가오는 동안, 주민들은 어떠한 공식 정보나 경고 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여야 했다. 그 시간은 단순한 자연재해의 순간이 아닌, 누가 살고 누가 죽는가 하는 생과 사의 갈림길이었다.
당시는 워낙 급박해 그 의미를 새길 겨를도 없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무엇보다 미리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 있었음에도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 그래서 많은 주민이 삶의 터전을 잃고, 이웃의 고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더욱 쓰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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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 산불을 피한 밭 풍경. 저 멀리 시커멓게 탄 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사진제공 : 김경희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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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급격히 달라졌다. 3월 25일, 부산에서 일하던 중 딸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있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남편이 연락이 안 된다고 딸이 막 걱정하고 있었어요. 집에 있는 휘발유 통을 옮기러 간다더니 연락이 끊긴 거예요. 전화도 안 터지고."
같은 시각, 도희씨 부부도 추랑씨 남편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다. "오후 3시 넘어서부터 계속 전화했어요. 동변 쪽으로 불이 막 넘어가는 걸 봤거든요. 휘발유통 치우러 간다고 들었는데, 이후에 연락이 안되니 우리도 엄청 걱정했죠."
도희씨 부부는 추랑씨 남편의 행방을 확인하기 위해 동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마주한 풍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집 입구엔 스프링클러가 돌아가고, 1톤 트럭 뒤에 휘발유통이 막 쌓여있었어요. 마당엔 가스통도 굴러다니고요. 누군가 사투의 현장임을 알 수 있는, 완전히 전쟁터 같았죠. 그런데 형님이 보이지 않아 한참 찾았는데, 저쪽 산 밑에서 혼자 불을 끄고 있더라고요."
인근 집에선 '펑'하는 폭발음까지 들렸다.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계속 잔불을 잡고 있었다. 자신의 집과 이웃 집을 불에서 간신히 구했는데, 자꾸만 날아드는 불씨에 다시 불이 붙는 것을 두고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부랴부랴 뒤늦게 점곡으로 돌아온 추랑씨가 남편을 만났을 땐, 그는 목소리도 잘 안 나오던 상황이었다.
"도착했을 땐 연기가 자욱했고, 남편 목소리도 잘 안 나왔어요. 위험하다고, 불끄는 사람들 다 잡아갔는데, 우리 남편은 안 들키고 계속 끄고 있었던 거예요. 자기가 애써서 꺼놨는데 또 잔불이 넘어오니 도저히 못 나오겠더래요. 소방서에 잔불 정리를 요청하고, 겨우 남편을 설득해서 새벽 3~4시에서야 면사무소까지 나올 수 있었어요."
그 절박했던 순간을 함께 지켜봤던 도희씨는 "집집마다 그랬다, 한 사람 한 사람, 다 그런 사연이 있다"고 덧붙인다.사과밭은 전소했지만 집도, 남편도 무사하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추랑씨. 그렇지만 그 역시 아쉬움이 깊다.
"불이 오기 전에 대피 명령만 있었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거예요. 마을 사람들은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었던 거죠. 동네 할머니 중 한 분은 불이 난지도 모르고 그냥 대피만 하셨다는 분도 계세요."
"정보가 없다는 게 더 무서웠다"
3월 22일 의성 산불 발생 이후, 김경희씨는 가슴 졸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불길은 잡히지 않고 점곡까지 거리를 좁혀오던 그때. 그는 결국 아들을 안동 지인에게 맡기고, 남편과는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둘 중 하나는 살아야 하니까요."
지금이야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당시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내린 결단이었다. 그러나 아들만은 안전한 곳에 맡겼다는 안심도 잠시. 불길은 안동까지 번졌다. 경희씨는 아이를 데리러 다시 안동으로 향하려 했지만, 이미 길은 통제된 뒤였다.
"종합운동장에 있는 상황실에 안동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물어봤어요. 그곳에선 군청에 문의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군청 민원실에 갔더니 3층 산림녹지과에 가보라고 하고. 하지만 그곳에서도 정확한 답변은 들을 수가 없었어요. 도로 통제 상황을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이동은커녕 어디가 위험한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 경희씨는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저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정보가 없다는 게 이토록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그는 그때 뼈저리게 실감했다.
"제가 사는 송내리 쪽은 나중에야 대피하라는 문자가 왔는데, 그걸 보고 아들이 깜짝 놀라 전화를 했어요. 근데 이미 우리는 스스로 판단해 모두 대피한 뒤였죠."
주민들은 그저 불의 방향을 눈으로 확인하며 상황을 판단해야 했다. 그랬기에 같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도 위기의식 정도는 달랐다.
"강원도 산불 당시 재난방송에서 집에 물을 뿌리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남편에게 집에 물을 뿌려야 된다, 스프링클러를 돌리자, SS기1에 물 넣어서 뿌리자고 했죠. 그런데 남편은 '동네 형님들 말이, 바람 방향이 우리 동네로는 안 불어서 불이 안 온다'고 했다는 거예요. 너무 답답했죠. 무엇보다 정확한 정보가 없다는 게 제일 무서웠어요. 정말 저는 토요일부터 매일이 무서웠어요."
월간옥이네 통권 98호(2025년 8월호)
글·사진 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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