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항쟁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
[김삼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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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금을 연주하고 있는 생전의 윤상원 열사. |
| ⓒ 윤상원기념사업회 |
그는 한국인으로서 흔치 않은 곱슬머리였다. 그의 행동은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무장 동료들의 거의 광란 상태에 이른 것과 같은 허둥거림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침착함이 있었다. 그 침착함 속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그가 죽고 말 것이라는 예감을 뚜렷하게 받았다. 그의 눈길은 부드러웠으나 운명에 대한 체념과 결단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거의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볼티모어 선(The Baltimore Sun)> 서울특파원 불레들리 마틴이 쓴 '윤상원 그의 눈길에 담긴 체념과 죽음의 결단'이다. 그는 1980년 5월 28일 광주에서 5.18민주화운동을 현장 취재하면서 전남도청에 자리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를 취재하였다.
윤 열사는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용리 천동마을에서 태어났다. 광주 북성중학교와 살레시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 연극반에 들어가 자유분방한 신입생 시절을 보냈다. 1학년을 마친 후 군에 입대하여 일반하사로 33개월 복무한 후 1975년 복학했다. 재학 중 민청학련사건으로 9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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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년 5.18 당시 태극기를 들고 민주화시위를 하고 있는 광주시민들. |
| ⓒ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
5월 항쟁의 전 과정을 통해 윤상원은 선전·선동의 탁월한 기획자·실행자로 활동했다. 그가 초안을 잡고 들불야학 강학(교사)들이 19일 오후에 시가지에 배포한 최초의 호소전단 〈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를 비롯해 각종 선언문과 8호까지 나온 <투사회보>의 편집·제작·배포를 밤잠을 잊은 채 지휘한 것은 그이고, 수습위의 투항적 자세를 견제하기 위해 '해방광주'의 도청 앞 광장에서 매일 '민주수호시민궐기대회'를 주동적으로 조직해 낸 것도 그이며,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항쟁의 대의를 설명하는 임무를 맡은 것도 그이다.
더구나 그와 최후를 같이 하거나 끝까지 도청에 남은 지식인 동료들 대부분이 공수부대에 의해 장악된 항쟁 초기의 광주를 일시적으로 떠났던 것에 견주어 그는 시종일관 이 '빛의 땅'을 지키며 도청 접수에 참가했고, 파시즘의 물리력에 맞서 싸우며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5월 광주를 역사의 비석에 깊게 새겼다. (주석 1)
윤상원 열사는 광주민주화운동(5월 25일) 후반부에 학생수습위원회에서 새로 편성한 항쟁지도부의 대변인을 맡았다. 그리고 <투사회보>를 수시로 발행하여 시민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제도언론이 침묵하거나 사실을 왜곡할 때 큰 역할을 하였다.
'대학의 소리'팀과 '들불야학'팀은 5월 20일 광천동의 들불야학에서 합류하여 윤상원의 지도를 받아 <투사회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합심해서 발간키로 했다. 노동자(야학생)과 대학생(강학담당)들로 구성된 <투사회보>팀 10명은 차량임무규정, 투쟁대상을 정한 구호, 보급문제, 시체운반 등에 관한 사항을 집중적으로 담기로 했다. 5월 21일 첫 호가 나온 <투사회보>는 5월 25일까지 8호까지 발간하다 그 다음 횟수는 계속 9호로 사용하면서 제목을 <민주시민회보>로 변경, 발간하였으나 마지막 호인 10호는 미처 배포되기 전 계엄군에 의해 압수되었다.(주석 2)
<투사회보> (5월22일 발행) 제2호 머리글은 다음과 같다.
민주투사들이여! 더욱 힘을 내자!
승리의 날은 오고야 만다.
광주시민의 민주봉기의 함성은 전국적으로 메아리쳐 각지에서 민주의 성전에 동참해오고 있다. 21일에는 장성에서 화순에서 나주에서 다수의 차량과 무기가 반입되었다. 전주에서는 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제 승리의 날은 머지않았다. 승리의 날까지 전 시민이 단결하여 싸우자! 이기자! 민주의 만세 부르자!
외신기자가 지켜본 대로 5월 26일 밤이 저물고 있었다. 도청 안은 더욱 소연해졌다. 퇴각이냐 옥쇄냐, 마지막 갈림길의 선택만이 주어졌다. 항전 지도부에서는 끝까지 남아 있는 고등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뜻을 모았다. 이때에 윤상원의 모습을 소개한다.
우선 대열에 끼어 있는 어린 고등학생들에게 귀가를 설득했다.
"고등학생들은 나가라. 우리가 싸울테니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고등학생들 몇이 시무룩한 모습으로 대열을 빠져나갔다. 상원은 다시 목청에 힘을 돋구었다.
"여러분! 총 쏠 수 있습니까?"
"예!"
얼마 전과는 달리 우렁찬 함성 소리가 도청 안의 어둠을 흔들었다.
"여러분! 드디어 전두환 살인집단은 이 시각 현재 우리를 죽이기 위해 탱크를 앞세워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야수와도 같이 야음을 틈타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냥 도청을 비워줘야 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저들에 맞서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냥 도청을 비워주게 되면 우리가 싸워온 그동안의 투쟁은 헛수고가 되고, 수없이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투쟁에 임합시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뭉쳐 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불의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다는 자랑스런 기록을 남깁시다. 이 새벽을 넘기면 기필코 아침이 옵니다." (주석 3)
윤상원 열사는 이때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30년 짧은 삶을 접었다.
주석
1> 고종석, '5월 광주에 들불로 타오르라', <한겨레>, 1991년 5월3일.
2> 윤재걸, <작전명령-화려한 휴가:광주민중항쟁의 기록>, 117쪽, 실천문학사, 1988.
3>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윤상원 평전 : 들불의 초상>, 120~121쪽, 풀빛, 1991.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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