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불처럼 이은 '씨알 정신', 함석헌의 두 제자 이야기

김성수 2025. 8. 2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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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균과 문대골, 평생의 실천으로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이야기

[김성수 기자]

"씨알은 단순히 작은 씨앗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를 움직이는 진정한 주체이며, 생명의 근본이다."

함석헌(1901~1989)은 평생 이렇게 강조해왔다. 그에게 '씨알'은 사회를 바꾸는 거대한 영웅이 아니라, 이름 없는 민중 곧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한 알의 씨앗처럼 작지만 흙과 비, 햇볕을 받아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열매를 맺는 존재야말로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이 함석헌의 사상을 가까이서 따르고, 또 각자의 삶으로 실천해 보여준 이들이 있다. 1938년생 동갑내기 제자, 박선균과 문대골이다. 스승을 만난 젊은 날, 한 사람은 물처럼 고요하되 끈질기게 사유와 실천을 이어갔고, 또 한 사람은 불꽃처럼 뜨겁게 맞서며 헌신의 길을 걸었다. 표면적으로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두 사람 모두 결국 스승이 말한 '씨알 정신'을 삶으로 구현했다.

시대의 양심을 지켜낸 물, 박선균
 책표지
ⓒ 서로북스
함석헌의 삶을 박선균은 이렇게 요약한다.

"가르치는 일, 농사짓는 일, 글 쓰는 일."

단순하지만 강력한 삶의 태도였다. 그는 스승이 직접 흙을 갈고, 씨를 뿌리고, 필연처럼 글을 써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평생 그 정신을 마음에 새겼다.

박선균이 본격적으로 씨알정신의 길에 들어선 것은 1970년이었다. 그 해 함석헌은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한다. 당시 박정희 군사 독재 체제 하에서 잡지를 창간한다는 일은 단순한 출판사업이 아니었다. 함석헌은 창간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 사람이 죽는 일, 천하 씨알이 다 소리를 내게 하는 일. 유기적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함이다."

함석헌이 세운 잡지는 그 시절 온갖 압박 속에서도 단순한 지식인의 글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직시하는 목소리였다. 명망 있는 글쟁이나 정치인이 아니라 이름 없는 '씨알'들이 세상의 주인임을 일깨우는 장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박선균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친구들의 권유로 잡지를 맡게 된 그는 이후 반세기 넘게 <씨알의 소리>와 함께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박정희-전두환 군사 독재는 이를 가만두지 않았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은 잡지를 강제로 폐간 시켰고, 박선균은 무지막지한 폭행의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이를 '개인적 불운'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씨알의 소리'가 꺼지지 않는 한, 역사의 진실 또한 꺼지지 않는다는 신념 덕이었다.

그의 삶은 물처럼 유연했지만, 동시에 끈질겼다. 한두 번의 좌절로 흩어지는 물방울이 아니라, 결국 큰 강을 이루어 흐르는 물줄기처럼,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흐름을 이어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난 2020년 <씨알의 소리> 50주년 기념호(266호)를 가리켜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한 권이라고 말했다. 그가 <씨알의 소리>에 품었던 간절한 소망은 단 하나였다.

"정치적, 종교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순수한 씨알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불꽃의 길을 택한 제자, 문대골

문대골은 젊은 시절부터 불같은 사람이었다. 1972년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의 중앙정보부에서 2 시간 넘는 고문을 당한 뒤 만신창이가 되어 스승을 찾아갔을 때, 함석헌은 뜻밖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사람이 웬만큼 맞아선 잘 안 죽는다."

이 짧은 말은 문대골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여기서 그는 '고난을 피하지 않는 것'의 의미를 배웠다. 억압에 굴하지 않고, 시련 한복판에서 더욱 뜨겁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씨알의 강인한 생명력이었다.

문대골은 함석헌을 단순한 스승이 아닌 '밥부(밥 아버지)'로 불렀다. 그는 스승이 글을 쓰고, 밭을 갈며, 밥을 짓는 평범한 일상을 통해 깨달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았다. 스승 함석헌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중시했고, 자신이 할 바를 다한 뒤 하늘의 뜻을 기다리며 담담하게 살아갔다. 그 곁에서 문대골은 "씨알정신은 책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살아내야 하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지난 1989년 2월 4일, 함석헌이 세상을 떠나자 문대골은 단숨에 행동에 나섰다. 스승 함석헌의 아들 집 주차장을 개조해 소박한 모임 '씨알 모임'을 시작했고, 결국 함석헌기념사업회로 발전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아내와 가난하게 살기로 약속했다"고 말했는데, 이는 단순한 생활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스승 함석헌이 강조한 '같이 살기' 정신을 몸으로 옮긴 것이었다.

문대골의 삶은 언제나 불꽃 같았다. 처음에는 뜨겁게 타올라 제 몸을 불사르는 불꽃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고난을 견디는 불씨로, 꺼지지 않는 등불로 변해갔다.

씨알정신, 오늘을 비추는 거울
 왼쪽은 문대골 오른쪽은 박선균
ⓒ 김성수
박선균이 물처럼 조용히 씨알 정신을 지켜냈다면, 문대골은 불처럼 뜨겁게 실천해왔다. 겉으로는 다르지만, 두 사람의 결이 만나는 지점은 분명하다. 결국 둘 다 '씨알'로 살았다는 사실이다.

박선균은 최근 출간한 <함석헌 씨알정신 운동 깊이 읽기>(2025년 7월)에서 씨알 정신을 이렇게 정의했다.

"참을 찾는 정신, 같이 살기 정신, 절대 비폭력 평화주의 정신."

이 세 가지 정의는 지금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절실하다. 빠른 성과와 이익만을 좇는 풍조 속에서, '과정 그 자체가 생명'임을 되새기게 하기 때문이다. 종교를 생명 그 자체로 본 함석헌의 시각은, 오늘날 허망한 욕망과 불안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전한다. 살아 있음 그 자체가 완전하다는 인식, 바로 그것이 씨알 정신의 핵심이었다.

함석헌은 한국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시대 박정희-전두환 군사 독재 시대에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도 다 죽어가던 대지의 어머니가 다시 살아 꿈틀거릴 때가 온다."

그의 말처럼, 씨알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남북 화해 무드가 한때 움트고 다시 침묵하는 지금도, 씨알 정신은 물과 불을 넘어 살아있다. 박선균의 끈질긴 강물 같은 실천과, 문대골의 뜨거운 불꽃 같은 헌신이 그 증거다.

두 사람의 삶은 단지 개인의 존재 방식을 넘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비춘다. 물과 불, 서로 다른 두 불길은 결국 합쳐져 생명을 살리는 불씨이자 강물이 된다. 바로 씨알의 길이다. 이제 과제가 남았다. 씨알 정신을 현재의 언어로 되살려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일이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 인물들의 이야기를 기념하는 작업이 아니다. 스승 함석헌이 남긴 땅의 냄새, 그리고 제자들이 몸으로 살아낸 삶의 궤적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삶의 균형과 진정한 희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씨알은 다시 흙을 가르고 자란다. 물처럼 이어지고, 불처럼 타올라, 조금씩 그러나 반드시 다음 세대에게 생명의 길을 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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