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19) 천년만년 시간의 당찬 변주, 수월봉 이야기

배공순 2025. 8. 2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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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봉의 절벽 단면. 사진=사진 배공순

오르막을 오르자 거센 바람이 머리칼을 날린다. 풀숲이 눕는 맵시와 나란하다. 하늘하늘 블라우스 자락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요동을 친다. 제주에서 가장 넓다는 고산들 바람과 제주 섬 중 으뜸이라는 차귀도의 바람이 드잡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수월봉 정상은 푸르름이 굽이치는 바람의 언덕이다.

차귀도를 넌지시 바라보며 들판 끝 해안가에 솟아있는 오름이 수월봉이다. 수월봉은 바다를 엿보듯 삐죽 나와 있는 칠십칠 미터 봉우리로 절벽이 날렵하고 운치가 그만이다. 해안을 끼고 이어지는 절벽은 화석층이 뚜렷하여 자연의 신비함을 더한다. 몸집은 작으나 세찬 파도를 압도하는 듯한 기세가 당차다.

바람을 맞받으며 해안 길로 내려선다. 해안에서 올려다보는 절벽의 변주에 넋을 잃고 바라본다. 어느 조각가가 빚은들 이토록 다채로울까 싶다. 굽이굽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아래위를 넘나드는 특이한 무늬의 연속이다. 수월봉과 겸상하듯 마주한 차귀도는 심심했을 바다 풍경에 한 점 명품으로 앉아 있다. 수월봉에서 차귀도 포구까지 둥그렇게 이어진 해안 길이 유려하다. 한쪽에는 화산활동의 흔적을 뚜렷이 내보이는 기기묘묘한 형상의 절벽이, 다른 쪽에는 짙푸른 바다 풍광이 펼쳐진다. 쉬임도 없이 수월봉을 때리던 파도가 절벽의 절단면을 만들어 놓은 덕에 화산체의 속살이 훤히 드러나 있다. 켜켜이 쌓인 세월이 만들어낸 명작이다.
절벽사이로 용천수가 흐르고 있다. 사진=배공순

절벽 틈새에 핀 꽃의 속살거림에 해들대며 걷다 보니, 암석 사이로 뚝뚝 물이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애통한 전설이 깃든 '녹고의 눈물'이다. 옛날 수월이와 녹고라는 남매가 살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중병을 고치는 데 좋다는 오갈피를 찾아 수월봉 절벽을 오르고 오르다 수월이 그만 떨어져 죽고 말았다. 동생 녹고는 애달프게 통곡하다 수월의 뒤를 따르고 말았다니, 왜 좋은 약은 그리도 위험한 곳에 있는 것인지…. 그 후로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을 녹고의 눈물이라 했고, 그 언덕은 '녹고물 오름'이라 불렀다는 것. 알고 보면, 지층을 통과한 빗물이 절벽 아래 진흙층을 통과하지 못해 흐르는 자연현상이라지만, 이렇듯 슬픔이 배인 전설로 하여 인간사의 애달픔과 고단함을 짐작하게 한다.

제주는 오랜 시간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화산섬이다. 한라산과 368개의 너울거리는 오름의 군무는 너무나도 멋스럽다. 지질학적 가치도 높다. 2010년 제주 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으며 다시 한번 제주의 가치를 널리 알렸다. 현재 제주의 지질공원은 열한 곳으로 한라산과 성산일출봉, 만장굴, 서귀포층, 산방산과 용머리해안, 중문대포 해안 주상절리대, 천지연폭포, 선흘 곶자왈, 우도, 비양도 그리고 수월봉이다. 특히 수월봉은 '화산학의 교과서'라고 불릴 정도로, 훌륭한 곳이다. 약 1만 4천여 년 전 뜨거운 마그마가 물을 만나 생긴 화산체 일부로 격렬했던 화산활동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서다.
수월정과 고산기상대, 차귀도. 사진=제주관광공사

수월봉에서는 차귀도의 세 섬과 당산봉까지 한눈에 담긴다. 탁 트인 들녘과 바다의 조망도 탁월하지만, 정상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풍광이 놀라움과 감탄을 부른다. 붐비면 붐비는 대로 조용하면 조용한 대로 걷기 좋은 곳, 천혜의 자연박물관을 음미하며 흐르는 시간에 자신을 맡겨보면 어떨까.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비라도 촉촉이 오시는 어느 날 문득, 일렁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침잠하는 사유의 뜨락으로 맞춤이어서….

얼마 전 일본의 극비 문서가 발견되면서, 한반도를 총알받이로 쓰려는 무자비한 계획의 실체가 밝혀졌다. 한반도 본토의 남서해안은 물론 아름다운 제주의 해안선에도 곳곳 고통의 상흔이 남아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태평양 전쟁 막바지, 해안에 무더기로 진지를 파고, 살상 무기를 비축하며, 젊은이를 징집하는 데 혈안이었던 그때의 흔적이다. 아름다운 수월봉 절벽에도 어김없이 갱도들이 있다. 일제가 특공용 보트와 탄약을 보관하던 장소로 '수월봉 갱도 진지'가 그것이다. 그것을 보는 마음은 씁쓸하기 이를 데 없지만, 갱도 아래 잔잔한 바닷속에는 예나 지금이나 뭇 생명이 살아 움직인다. 풍부한 수생식물이 어우러지고 크고 작은 어류가 먹이활동을 하며 대를 이어 살아가니, 숨탄것들의 평화로운 안식처로 모든 것을 내어주는 바다는, 어제도 내일도 그저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어느새 바다는 지는 해를 와락, 품어 안는다. 언제 푸르렀나 싶게 붉디붉어진다. 노란색으로, 보랏빛으로 변신을 거듭한다. 하늘과 바다에 그리는 그림이 장관이다. 나도 노을빛을 따라 울렁출렁 바닷속을 유영한다. 수월봉의 근육질 종아리가 보이고 더듬더듬 굽은 발등이 만져진다. 천년, 만년의 시간과 얼크러져 실존은 까마득하고 아스라하다.

수월봉 유연한 허리는 붉은 바람결에 꽃잎만큼씩 야위어 간다.
수월봉 갱도 진지. 사진=제주관광공사
수필가 배공순

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는...

나만의 소박한 정원을 가꾸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깊은 사유로 주변을 바라보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보태려 했던 것은, 문화재와 어우러지는 봉사활동이었다. 창경궁을 둥지 삼아 '우리 궁궐 지킴이'로 간간이 활동 중이다.

이곳저곳을 둘레둘레, 자박자박 쏘다닌다. 제주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레를 걷고 오름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사색의 오솔길을 오가며 사람 내 나는 이야기, 문화재나 자연 풍광, 처처 다른 그 매력을 소소하게 나누고 싶어 글을 쓴다.

<약력>

2016년《수필과비평》등단, 한국수필문학진흥회원, 제주《수필오디세이》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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