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립 노 모어’, 한국 상륙… 250억 투입한 몰입형 연극의 정수
대한극장을 가상 호텔로 개조
‘맥베스’를 1930년대 배경으로
한국 공연 역사상 최대 규모 제작비

전 세계 공연계에 이머시브 시어터(Immersive theater·몰입형 연극) 열풍을 불러일으킨 연극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가 마침내 한국에 상륙했다. 지난달 24일부터 약 3주간의 사전공연을 거쳐 21일 서울 중구 매키탄 호텔(구 대한극장)에서 개막한다. 한국 제작사 미쓰잭슨이 원작사인 영국 극단 펀치드렁크와 손잡고 선보이는 공연은 초기 제작비만 250억원에 달한다. 국내 공연 역사상 최대 규모 투자로, 올해 최고의 화제작으로 꼽힌다.
이머시브 시어터는 관객이 무대 밖에서 수동적으로 공연을 감상하는 기존 연극과 달리 배우와 같은 공간에서 움직이며 극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체험하는 것이 특징이다. ‘슬립 노 모어’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1930년대 스코틀랜드 배경에서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서스펜스 영화처럼 풀어냈다. 제목은 맥베스가 왕을 죽인 뒤 “다시는 잠들 수 없다”는 대사에서 따왔다. 다만 대사 없이 오직 배우의 몸짓과 동작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넌버벌(Non-verbal)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이 특징이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이었던 대한극장 건물을 가상의 호텔로 개조한 공간이 공연장이다. 관객은 마스크를 쓰고 7층 건물의 100개 넘는 방을 오가며 극 중 상황에 참여하는 듯한 입장이 된다.
극단 펀치드렁크는 ‘슬립 노 모어’의 연출가인 펠릭스 배럿이 2000년 극장 대신 버려진 군 막사에서 연극 ‘보이체크’를 선보인 데서 시작됐다. 당시 막사 곳곳에서 극 중 장면을 동시에 진행하는 한편 마스크를 쓴 관객이 그 안을 돌아다니며 이야기들을 발견하도록 했다. ‘보이체크’의 성공 이후 배럿은 다양한 이야기를 이머시브 시어터 형식으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기존의 관극 방식을 뒤엎은 배럿에 대해 영국 신문 가디언은 “연극을 재발명한 선구자”라는 찬사를 보낸 바 있다.
배럿 연출가는 20일 매키탄 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머시브 시어터는 그저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하나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을 그 세상의 중심에 떨어뜨리는 것”이라며 “관객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따라간다. ‘맥베스’에 나오는 맥베스 캐릭터를 따라갈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주변 인물을 따라가도 된다. 스스로 모험을 떠나는 이 작품에서 옳고 그름이나 정답은 없다”고 말했다.

펀치드렁크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 바로 ‘슬립 노 모어’다. 2003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된 작품은 2009년 미국 보스턴에서 공개됐다. 이후 2011년 미국 제작사 이머시브와 협업해 뉴욕으로 무대를 옮겨 지난 5월까지 무려 14년간 공연됐다. 또 중국 상하이에서도 2016년부터 지금까지 장기 흥행 중이다. 넌버벌 방식으로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은 작품은 공연계에 ‘보는 연극’에서 ‘하는 연극’으로의 패러다임을 바꾼 상징적 존재가 됐다. ‘슬립 노 모어’ 등장 이후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공연계에서 이머시브 시어터 제작이 유행하고 있다.
박주영 미쓰잭슨 대표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이었던 공간을 매키탄 호텔로 바꾸는 것은 새로운 세계관을 만드는 것이다. 관객이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몰입할 수 있도록 설계부터 미술, 조명, 음향, 가구, 소품 그리고 먼지 한 톨까지 연출의 의도를 담을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고 자부했다. 이어 “과거 대한극장이 지닌 문화적 상징성과 오늘날 공연 미학이 결합한 매키탄 호텔은 전통과 혁신이 만나는 무대이자 한국 이머시브 공연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펀치드렁크에 있어 공연 환경을 구축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극단 펀치드렁크가 ‘이머시브 시어터’라는 용어보다 ‘장소 감성형’(Site-sympathetic)이란 용어를 선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단순히 퍼포먼스가 벌어지는 장소를 넘어 건물의 역사 등 다양한 맥락이 작품 속에서 중요하고 창의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슬립 노 모어’ 서울 공연의 경우 뉴욕이나 상하이보다 공간이 클 뿐만 아니라 달라졌기 때문에 두 도시에는 없는 새로운 장면도 포함됐다.
배럿 연출가는 “셰익스피어를 히치콕 영화의 느와르 스타일로 만들고 싶었다. 서울에선 영화관을 공연장으로 바꿨다는 점에서 완벽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관객들이 스스로 영화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올해 공연계 최고의 화제작답게 ‘슬립 노 모어’는 프리뷰 기간 내내 좌석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오픈런(폐막일을 정하지 않고 무기한 공연)으로 진행되는 본공연 역시 티켓 예약이 몰리고 있다. 다만 워낙 제작비가 많이 들다 보니 손익분기점을 맞추려면 장기 흥행이 필수적이다. 박 대표는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면서 앞으로의 공연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면서 “10여년 전 뉴욕에서 ‘슬립 노 모어’를 본 뒤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번 작품이 한국 공연계에 긍정적 자극을 끼칠 것으로 자부한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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