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분신한 이동수 열사
[김삼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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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조사를 맡은 문익환 목사 86년 5월 20일 서울대 '5월제'에서 강연하는 문익환 목사에게 치안본부는 이동수 군 분신투신자살과 관련 문익환 목사를 선동혐의로 수배했다.? |
| ⓒ 박용수 |
대학의 5월제 행사의 하나인 '광주항쟁의 민족사적 재조명'이란 주제의 강연회가 열려 민통련 의장 문익환 목사가 연사로 초빙되어 연설하고 있었다.
이동수 열사는 온 몸이 화염에 휩싸인 속에서 "파쇼의 선봉 전두환을 처단하자", "미제는 물러가라", "폭력경찰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7미터 2층 계단에서 아래로 투신하였다. 투신 직후 보건진료소로 옮겨져 응급조치에 이어 3시 50분경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 중에 앰블런스 안에서 숨졌다. 향년 24세였다. 4층 난간에는 이 열사가 벗어놓은 점퍼가 있었고 점퍼 안에서 수첩 등이 발견되었으나 이것들은 학교 당국과 경찰이 가져갔다.
이틀 후인 21일 아크로폴리스 광장에는 2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석하여 비상총회를 열고 이동수 열사를 추모하여 이틀간 검은 리본을 착용하고 수업 거부를 결의했다. 유해는 5월 22일 새벽 4시에 고양군 벽제화장터로 옮겨 간단한 장례식에 이어 화장되었다. 5월 23일 농대생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관악위령제가 열려 고인을 추모했다.
이동수 열사는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숭실대학에 입학했다. 3수를 통해 1983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원예학과에 진학했으나 2개월 후인 1983년 4월 군대에 들어갔다. 1985년 12대 총선 당시 상부에서 여당인 민주정의당에 투표하라는 지침에도 야당 후보를 찍어 부대 안에서 '찍히게' 되었다.
만기 제대(1985년 10월) 후 복학했으나 전두환 5공의 폭압과 각종 비리를 지켜보면서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 배후에 미제가 있다고 판단, 반미·반일 성향을 갖고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이동수 열사의 투신 현장을 지켜 봤던 문익환 목사의 법정 증언이다.
제 생애에 최대의 충격은 지난 5월 20일 서울대학 강연에서 젊은 학도가 국가를 위해 자기 몸에 불을 지르고 떨어져 죽은 엄숙한 경험이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죽어 무덤에 가더라도 제 망막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 불덩어리가 보입니다. 그의 숭고한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에게 명복을 빔과 동시에 그의 죽음에 값하는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그러한 심정입니다. 그의 죽음에 목이 돌아가지 않도록 옷깃은 여미고 이 자리에 서려고 합니다. 그 일이 그토록 가슴의 아픈 것은 저기 뒤에 아흔이 넘으신 저의 어머님이 앉아계신데, 제가 그날 서울대에 강연을 간다고 말씀드리니 '이 얘기는 꼭 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목소리에 조금 울음이 섞여 나온다. 자제하려 애쓴다) 제 어머님은 분신한 사람들 이름 모두를 적어 가슴 속에 지니고 계신 분입니다. (방청석 맨 앞줄에 앉은 문목사의 어머님 김신묵은 헉! 하며 갑자기 작은 소리로 울음을 터뜨린다. 옆에 앉은 손녀가 할머니 손을 잡으며 진정 시킨다)
"일제시대에 만주에 있던 독립군 중에서 자살한 사람은 없다. 절대로 죽지 말라, 간곡히 부탁했다"고 얘기를 먼저 하려 했는데 못했습니다. 그때 대검에서 민통련을 과격단체로 몰고 과격 단체의 두목으로 이 문익환이를 매도하는데 충격을 받아 그 얘기부터 하느라고 뒤로 미루었는데, (자책하는 심경이 목소리에 나타난다) 얘기 끊고 말문을 돌리려고 주변을 돌아보는데, 그때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그 학생은 미리 유서를 준비해두었고 제가 강연한 동안에는 이미 그 자리에 올라가 있었었죠. 제 얘기가 스피커를 통해 거기까지 다다랐는지도 모르겠고 안 다달었어도 그의 결심을 바꿀 수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님의 부탁을 왜 처음에 하지 못했나? 나중에 학생이 분신한 것을 알고 가슴을 쳤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저는 영원한 죄인입니다.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입니다. 나는 그때 죽었고 남은 생은 너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외부에 강연이 있어 내려갔다가 내가 도피중이라는 보도가 나오는 바람에 자진 출두한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그 얘기부터 해야 할 심정이었습니다. 이제 마음 가다듬고 "나는 남은 생을 너를 위해 살겠다"는 심정으로 재판정에 섰습니다.
이동수 열사는 <유서>를 남겼다. 유서의 마지막에 신동엽의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의 일부를 적었다.
유서
원예학과 1년 학우들에게.
쓰잘데 없는 짓만 거듭 범하고 떠나는 것이 죄스럽지만, 일단 모든 복잡한 마음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나니 응어리진 마음이 풀리는군요.
나 자신 그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나의 방황을 잡을 수 있을까 노력도 많이 해봤지만, 오히려 그대들에게 역효과를 안겨준 것 같아요.
이 글을 남기고 싶지 않았지만 여러분들과 나와의 관계가 절대적 가치가 아닌 상대적 가치로서 설명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또 우리가 종속되어진 인자가 아닌 추구하는 인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써 나갑니다.
여러분들은 너무나 현실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이 몸이 현실을 극복한 것은 아니지만 어떠한 논리의 테두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논리 자체를 아무런 근거 없이 거부하거나 추종한다면 그러한 사람의 대학생활은 에스엠적인 행동으로 표현될 것이고 그 결과 떨쳐버릴 수 없는 고뇌만이 그 사람을 반길 것입니다.
우리는 제도의 불합리와 불비를 한탄하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도에 앞선 자기 실존의 의식의 문제이며, 그리고 제도에 앞선 자기실천의 문제이며, 자기의 의식이 지향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는 용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과 같이 생활했던 두 달이란 세월은 나의 25년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는 그런 기간이었습니다. 해준 것 없이 같이 고민해보지도 않고 먼지처럼 사라지는 이 몸을 용서하기 바라며, 이 미안한 마음을 되새기며 그대들이 열심히 그리고 참되고 깨끗한 삶으로 매진할 수 있도록 먼 곳에서 지켜보겠습니다.
자신의 아픔보다 남의 아픔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그래서 그 아픔을 같이 나눌 수 있는, 그리고 더 큰 아픔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 최고의 Homo sapiens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끝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나와 함께 데리고 가기에는 아까운 느낌이 들어 영원히 잊지 못할 그대들에게 남겨두겠습니다.
원예학과 83 이동수 씀
1986년 5월19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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