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의 생가라고 왜 배울 게 없겠는가

서부원 2025. 8. 1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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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의 대명사, '남도부' 하준수의 생가를 다녀와서

[서부원 기자]

▲ 독립기억광장 제막식 우원식 국회의장과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 이종찬 광복회장,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14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도서관 앞에서 열린 독립기억광장 제막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해방 이후 현대사 단원을 수업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내용이 있다. 이를 명확하게 해두지 않으면, 수업 도중 아이들의 질문 세례를 받느라 당최 진도를 나갈 수 없다. 강화도 조약과 을사늑약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역사에 문외한인 아이들도 좌익에 대한 편견만큼은 고래 심줄처럼 질기다.

"일제에 맞서 싸운 공산주의 독립운동가와 김일성의 가계를 우상화한 지금의 북한 공산당(노동당)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해 안재홍과 조소앙, 여운형 등은 좌익이 아니다."

아이들은 해방 전후 시기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이승만을 제외하곤 모두 좌익으로 알고 있다. 그들에겐 좌우 이념에 대한 구분이 단순하고 명확하다. 미국과 자본주의, 이승만과 남한은 우익이고, 나머지는 국가와 이념, 인물을 따질 것 없이 모두 좌익이라는 거다. 그들에게 좌익은 공산주의자와 동의어다.

좌익은 북한을 추종하고 공산주의를 신봉하며 소련에 우호적이라고 덧붙인다. 미국을 반대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부정하는 자들이고, 그로 인해 '빨갱이'라는 멸칭이 생겨났다고 믿는다. 일제에 맞선 그들의 무장 항일 투쟁도 우리나라를 공산화하기 위한 술책이라고 폄훼하는 아이들도 있다.

심지어 친일파와 공산주의자를 동일시하는 경우마저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신탁통치 결정에 찬성했다는 게 그 이유다. 당시 친일파들은 '찬탁은 매국'이라는 논리를 펴며 자신들의 죄과를 세탁하려 했고, 미군정과 이승만은 그들을 두둔하고 적극 이용했다. 당시 친일파들의 주장을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셈이다.

어처구니없게도 '빨갱이'를 척결하는 게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일로 여기는 아이들이 드물지 않은 이유다. 지난해 윤석열 전 대통령이 홍범도 장군을 느닷없이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며 흉상을 철거하는 소동을 벌인 뒤, 공산주의에 대한 아이들의 맹목적인 반감은 크게 누그러진 상태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공산주의 독립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교과서에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절반이 누락되어 있다."

좌익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수업 중 입버릇처럼 건네는 말이다. 이는 턱 없이 소략한 공산주의 독립운동사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공산주의를 빼놓고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설명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알다시피, 1925년 일제가 도입한 치안유지법도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한 악법이었다.

해방 후 극심한 좌우 대립과 6·25 전쟁으로 분단이 고착되면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의 업적은커녕 이름조차 깨끗이 지워졌다. 연좌제가 서슬 퍼렇던 시절,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함부로 입 밖으로 꺼냈다간 대번 '빨갱이'로 낙인찍혀 치도곤당해야 했다. 가족이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되레 숨겨야 하는 야만의 세월이었다.

독립운동사에서 감출 수 없는 사안이라면, 그가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숨기고 업적만 소개하는 식으로 논란을 피해 갔다. 주시경의 제자인 국어학자 김두봉과 <조선 사회 경제사>를 저술한 백남운 등이 그 예다. 김두봉은 영화 <말모이>의 실제 주인공이며, 백남운은 일제의 식민사관을 논파한 불세출의 경제학자다.

아무리 위대한 독립운동가도 해방 후 북한 정권을 편들었다면 그는 '역사의 죄인'이 되었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상대적으로 훈격은 낮아도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도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았지만, 해방 후 살아남은 게 화근이 됐다. 일례로, 대표적인 항일 무장 단체인 의열단의 단원 대부분이 수훈했지만, 정작 단장이었던 김원봉은 여전히 '빨갱이'로 남아있다.

엄혹한 분단의 현실 속에서 잊힌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떠올리는 건, 반쪽짜리 독립운동사의 남은 공간을 채우는 일이다. 식민지 조국의 해방과 통일 정부 수립을 향한 그들의 행적을 미화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왜곡하거나 폄훼해서도 안 된다. 신념에 따른 그들의 헌신에 대한 공과를 따져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교과서에 일절 언급 없지만 잊을 수 없는 서사 지닌 인물

지난 주말 경남 함양의 한 산골 마을을 찾았다. '남도부'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하준수를 만나기 위해서다. 교과서에 일절 언급이 없어 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아는 이에겐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서사를 지닌 인물이다. 신분을 위장하기 위한 '남도부'라는 이름은 지금까지도 '빨치산'의 대명사로 통한다.

그는 조선 인민 유격대의 부사령관으로 소개된다. 6·25 전쟁 당시 김일성의 지시를 받아 경상도의 태백산과 신불산 등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수행했던 인물이다. 정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산중에 고립된 채 토벌대와 교전을 벌였고, 1955년 부하의 배신으로 붙잡혀 총살당했다. 불과 서른넷의 나이였다.

'빨치산'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마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삶을 모두 설명해 주진 못한다. 그는 일제강점기 천석꾼 집안의 장남이었다. 선조 대대로 과거에 합격해 벼슬을 했을 만큼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이었다. 10대 시절 일본인 교사를 폭행해 퇴학당한 뒤에도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할 만큼 남부러울 게 없는 삶을 살았다.

유학 중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 학병으로 징집되자 이를 거부하고 귀국했다. 학병으로서 전쟁터로 끌려가는 대신 일제와 맞서 싸우기로 다짐하고 지리산에 숨어들었다. 해방되기 반년 전 다른 징집 거부자들과 함께 '보광당'을 결성하고 항일 무장 투쟁에 나섰다. '널리 나라의 빛이 되자'며 의기투합한 것이다.

해방이 되자 그는 일제에 부역한 관리와 순사 등 지역의 친일 앞잡이들을 단죄하는 데 앞장섰다. 1921년생인 그는 애초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그저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열혈 청년이었을 뿐이다. 그가 존경했던 인물은 중도파인 여운형이었고, 그가 세운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함양 지부 결성에 힘을 보탰다.

그가 공산주의자의 길을 간 건, 그의 본보기였던 여운형이 극우파에 피살된 직후다. 좌우합작운동이 실패하고, 이승만에 의해 단독 정부 수립이 공식화하던 상황에서 남로당 가입이라는 정치적 선택을 한 것이다. 이후 그는 1948년 봄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에 참가하며 공산주의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 삼게 된다.

이후 '남도부'로 살아간 그의 행적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삶이 곧 6·25 전쟁을 전후한 '빨치산'의 역사다. '남도부'라는 별칭이 '남'쪽으로 진격해 '부'산에 '도'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 북한군의 일원으로서 그의 활약상은 능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본명인 하준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남도부'로 기억되는 이유다.

그렇게 그는 '빨갱이'가 됐다. 지주 집안 출신인 데다 공산주의를 공부한 적도 없고, 단독 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남로당을 선택한 것뿐인데, 6·25 전쟁에 휘말리면서 해방 전 청년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삶은 하잘것없는 걸로 치부됐다. 좌우합작운동의 상징적 존재인 여운형조차 좌익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현실에서 그의 참혹한 운명은 예정돼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폐가나 흉가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처참
 마을 어귀 안내판에는 하준수 생가가 표시되어 있지만,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더이상 표식이 없어 찾을 수 없다.
ⓒ 서부원
내비게이션에 그의 이름이 나올 리 만무하다. 애꿎은 식당과 병원만 검색될 뿐이다. 다행히도 마을 어귀의 안내판에는 그의 생가를 표시하고 있었다. 지도로만 보면, 지리산이 병풍처럼 감싼 마을 한가운데 호령하듯 자리를 잡고 있다. 안내판엔 적혀 있으되, 더는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주민들에게 물어도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제각과 조선의 개국 공신인 하륜의 부조묘가 자리하고 있는 진주 하씨의 집성촌인데, 정작 그의 생가를 아는 이가 없었다. 한 주민은 부조묘를 찾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되레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그곳을 찾아온 이들이 종종 있다며 귀띔했다. 천석꾼 집안의 장남이었던 하준수는 이미 족보에서 지워진 이름인 듯했다.

"마을에서 그의 생가를 아는 사람은 나뿐이요. 일가친척이 그 집을 사서 살다가 떠난 뒤 방치되어 수십 년째 폐가로 남아있어요. 하준수라는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 죄가 되던 시절을 살았는데, 그 어떤 친척들이 생가를 보존하겠어요? 국가도 지방자치단체도 아무 관심이 없으니 저러다 곧 허물어지겠죠."

때마침 만난 어르신 한 분의 도움을 받았다. 그가 안내해 준 하준수의 생가는 폐가나 흉가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처참했다. 나무 기둥은 죄다 삭았고, 기와지붕은 곳곳이 내려앉아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오롯한 건, 과거 집주인의 이름을 적은 문패 하나뿐이었다. 주변엔 아이들 키 높이의 잡풀만 무성했고, 집의 앞마당엔 폐농기구와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하준수 생가의 처참한 몰골. 비는커녕 바람에도 곧 허물어질 듯 위태롭다. 주변엔 잡풀만 무성하고 멀쩡한 건 나무 기둥에 달려 있는 문패뿐이다.
ⓒ 서부원
복원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역사를 공부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곳이라면 누군가 찾아올 수 있도록 그 흔한 비석이나 팻말 하나 정도는 세워두는 게 맞지 않나. 자랑스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이고, 참혹했던 역사도 우리 역사다. '빨갱이'의 생가라고 왜 배울 게 없겠는가. 무참히 허물어진 하준수의 생가는 비루하고 옹졸한 우리 현대사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연신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어르신에게 하준수의 행적과 공산주의 독립운동에 대한 재평가를 서둘러야 한다고 위로의 말씀 건넸다. 역사 교사이자 시민기자로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도 전했다. 그는 애써 이곳까지 찾아온 외지인과의 인연에 감사해하면서도 따끔한 질책도 잊지 않으셨다. 그것은 역사 교사의 무지와 게으름을 꾸짖는 매서운 죽비였다.

"하준수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오로지 친일파 처단을 통한 조국의 온전한 해방과 통일을 염원했던 청년 지식인이었을 따름입니다. 그는 친일 청산과 해방, 통일을 외치면 '빨갱이'로 내몰렸던 시대의 희생양이었고, 해방된 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별반 달라진 게 없습니다."

사족. 하준수의 고향 마을에서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함양 상림에는 널찍하게 역사 인물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최치원과 김종직, 정여창 등 지역과 연관된 역사 인물들의 흉상을 세워두고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른바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양반 고을의 역사성을 강조하려는 취지다.

그 아래로 선정비와 영세불망비라는 이름의 송덕비가 즐비하다. 건립 연도를 보면 대다수가 19세기에 세워진 것들이다. 삼정의 문란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던 시기다. 우리는 백성의 고혈로 우후죽순 세워진 송덕비들을 통해 당시 세도정치의 부패상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또한 역사 공부의 더없는 소재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묻는다. 부러 공원까지 조성해 송덕비들은 보존하면서 하준수의 생가는 왜 안 되나. 정면교사든 반면교사든 그의 생가도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부디 관련 공무원들에게 부탁한다. 그의 생가에 가보면 누구라도 깨닫게 될 것이다.
 함양 상림 내 역사 인물 공원의 모습. 뒤로 지역과 연관된 인물의 흉상이 도열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앞에 두 줄로 송덕비가 늘어서 있는데, 대부분 19세기 세도정치 시기에 세워진 것들이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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