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장 넘기다 김밥 둘둘, 꽁다리 물고 읽는 책
[정현주 기자]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키우지 않는 우리 집에 반가움을 담당하는 '택배'씨가 도착한다. 때론 단단하고 반듯한 모습으로, 때론 길바닥에 몇 바퀴 구른 듯 먼지를 뒤집어쓰고, 어깨가 축 늘어진 비닐로 오는 택배씨지만, 우리 가족은 그가 어떤 모습으로 오든 맨발로 달려 나가는 댕댕이처럼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 찜통이 된 집에서 수증기를 내뿜고 있는데 납작만두 같은 상자에 심박수가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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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풍을 빌려드립니다 소풍 떠난 마음으로 아파트 놀이터에서 정성껏 한 컷 |
| ⓒ 정현주 |
혼자 걷는 기분이 묘했다. 불안함, 설렘, 약간의 외로움, 연재는 이 도시에 이방인임을 깨닫는다. 모든 시작은 작은 떨림에서 시작한다. (p.10)
이 소풍 재미있겠는 걸. 책 한 장을 넘기고 두 번째 페이지에서 느낌이 온다. 소파에 반 쯤 기대어 읽던 책을 덮고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간다. 냉장고를 열고 훑어본 뒤 밥솥을 확인한다.
'소풍엔 김밥이지.'
밥솥을 꺼내 식초와 소금, 참기름으로 46시간의 흔적을 포장한다. 며칠 전 떡볶이 배달에 끼어 온 반달 눈 웃음이 매력인 단무지를 건져낸다. 성실한 세신사가 되어 당근 몸의 때를 벗겨낸다. 남편 얼굴이 떠오른다. 채소라면 칠색 팔색인데 유독 당근은 잘 먹는다. 날 것, 익힌 것 가리지 않고 당근은 오케이다.
어제 마트에서 시금치 한 단에 8천 원이라며 화를 내던 옆집 아줌마도 김밥을 싸려고 했을까. 시금치 대신 게맛살을 찢어 후추와 마요네즈로 마사지를 해준다. 고소함을 포근하게 덮은 달달한 맛이 '스윗가이' 아들을 닮았다. 달걀 6개를 프라이팬에 넓게 눕힌다. 김밥 식중독을 막으려면 완숙이어야 한다는 뉴스를 보았기에 약불에 오래 지켜볼 예정이다. 예민의 꼭짓점을 찍고 있는 고3 따님의 눈치를 보는 심정으로. 까만 김에 차례로 누운 재료들, 둘둘 말고 보니 제법 김밥 태가 난다. 김밥 꽁다리를 한입 가득 물고, 이제 본격적으로 소풍을 떠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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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6시간된 밥, 당근, 달걀, 크래미로 둘둘 말은 김밥 책을 읽다가 의식의 흐름을 타고 둘둘 말은 김밥. 이제 본격적으로 소풍을 떠나는거야! |
| ⓒ 정현주 |
아기를 키우는 시간을 고립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소외시키는 시간이기도 하다. 고립, 소외, 노동, 불면, 돈 부족, 호르몬 불균형, 이 모든 것과 몸부림치는 동안
아기가 자란다. (p.19)
레몬청을 만들까 하는데 자몽이 눈에 들어온다. 왜 자꾸 욕심이 생기는 걸까?
그토록 간결한 삶을 원했는데, '이왕 하는 김에'라는 습관이 다시 노동을 불러온다. (p.48)
그렇게 낯선 곳의 이방인으로 소풍의 주인이 된 지 6개월. 연재의 마음처럼 빈 곳이었던 복합문화공간 '소풍'은 소소한 행사와 소시민들의 발걸음으로 사람 향기가 차오른다. 빈손, 빈 가슴으로 각자의 상처를 안고 이 문을 열었던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며 문틈에 입을 대고 묵혀두었던 진한 호흡을 한다.
역시 답은 인간인가?
인간에게 상처받지만, 또 인간에게 위로 받는. 깊게 관계하고 싶지 않지만, 고립되고 싶지도 않은 마음, 이번에도 연재는 결론지었다. 두 마음 다 내 마음이라고. (p.81)
"그만하면 됐다"는 말은 자기 편의적 회피다. 상처 받은 눈동자를 한 번이라도 깊이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p.128)
그들은 상처를 잊기 위해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를 조용히 살아낼 뿐이다. 그렇게 상처는 조용히 진물을 마르게 하고, 상처는 하나둘 껍질을 벗으며 속살을 드러낸다.
내가 겪은 일이 특별하다는 환상, 아무도 나만큼 아픈 사람은 없다는 착각 속에 빠져 내 상처를 키우고 확대하고 심지어 극진히 보관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패딩에 묻는 흙처럼 털어버리거나 정 안되면 둘둘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 고이 모셔 두었다는 것을. 그 무슨 대단한 보물이라고 끌어안고 끙끙대고 있었다는 것을. (p.168)
꽃이 그냥 피는 게 아니라 경이로운 꽃임을 알게 되는 건, 험난한 과정을 지나온 사람이 가지는 특권이자 그런 삶을 견딘 사람에 대한 위로인지도 모른다. (p.173)
소풍의 클라이맥스 시간이 다가온다. 학생 때 소풍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보물찾기였다. 그들은 어떤 보물을 찾을 것인가. 복합문화공간 '소풍'에서는 전시회 이벤트를 준비한다. 제목은 <괜.너.괜>.
괜찮아, 너라서 더 괜찮아.
저마다 마음의 상처와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 소풍이라는 공간에서 펼치는 위로와 치유의 시간. 그리고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 어설프게 만든 나의 김밥을 바라본다. 지금 나의 소풍은 어디에 와 있는지, 어디 쯤에서 쉬고 있는 건지, 다음은 어디로 갈 것인가.
산다는 건, 어쩌면 김밥 같은 게 아닐까. 색깔도 다르고, 맛도, 식감도 제각각인 개성 넘치는 재료들이 김에 둘둘 말려 하나로 둥글둥글 굴러가며 빈 속을 채우는 여정. 오도독 씹는 맛이 재미있는 당근 남편, 포슬포슬한 크래미 아들, 조심조심 얹었던 달걀 딸. 나는 기꺼이 널찍하게 몸을 눕히는 까만 김을 선택하겠다. 각기 다른 맛, 다른 색깔의 이들을 하나로 말아 열 손가락 깍지 끼듯 야무지게 감싸주는 김이 되겠다.
가끔, 톡 쏘는 사이다 한 모금에 눈을 찔끔 감을 수 있다면. 지금 나의 소풍은 "제법 괜찮아, 우리라서 더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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