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아들과 꼰대 아빠의 숨막히는 지리산 천왕봉 산행
[김성호 평론가]
지리산 천왕봉에 몇 차례 다녀온 일이 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역시 처음이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마음 맞는 친구 둘을 꼬드겨 화엄사로부터 천왕봉에 이르는 종주를 하였는데, 20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위기도 물론 없지 않았다. 어쩌면 위기가 많아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일 테다. 산행에 익숙지 않은 둘을 부추겨 젊음과 호기로 오른 산행이다 보니 그럴 밖에 없었다. 지리산 종주는 국내 명산을 수백 차례는 족히 오른 지금에서도 한국에선 손꼽는 어려운 산행인데, 산에 익숙지 않은 이들을 데려갔으니 그 힘듦이 오죽했을까. 언제나 그러하듯 고통과 기쁨은 상대적인 것이다.
위기 중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삼대가 덕업을 쌓아야 볼 수 있다던 일출을 보기 직전이었다. 천왕봉 일출을 꼭 보아야겠다는 나와, 너무 힘들어 도저히 제 시간에 일어날 수 없다는 하나, 그 사이에 끼여 어쩌지도 못하는 또 하나가 있었다. 일정도 꼬이고 예약까지 챙기지 못한 탓으로, 천왕봉 직전 산장에서 머물지 못하고 하나 더 전에 묵어야 했던 우리는 남보다도 몇 시간은 더 일찍 일어나야 했던 터다. 말하자면 익숙지도 않은 산행에 잠도 충분히 자지 못한 몸으로 가파른 정상까지의 길을 걷자는 게 어떤 이에겐 막막하기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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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왕봉 스틸컷 |
| ⓒ NR1IFF |
천왕봉에 오르기 위해 장비를 챙기고 길을 따라 오르며 계곡에 가고 산장에 묵는 과정을 한 편의 영화로 묶었다. 영화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이들의 관계와 저간의 사정을 알게끔 한다. 로그라인을 보면, 아버지 성호는 부산에 사는 모양이고 아들 재우는 서울로 유학을 보내 대학교를 졸업한 모양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제때 취업을 하지 못하고 빌빌대는 아들이 못마땅해 아버지는 함께 천왕봉으로 가 일출을 보며 취업기도를 올리자고 한 모양인데, 해발 1915미터로 남쪽 반도 제일의 고봉이 그리 오르기 쉬울 리가 없는 것이다. 재우가 시작부터 죽을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출발과 함께 네 옷 대신 이걸 입으라고 투닥거린 둘이다. 너무나 가까워서 도리어 서로를 해하기 쉬운 것이 가족의 관계가 아닌가. 성호와 재우가 꼭 그와 같아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면 잔뜩 선 그 날에 서로가 베이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해지는 것이 오로지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처음 만난 계곡으로 잠시 잠깐 빠져서 양말을 벗고 발을 담그라는 아버지, 그를 끝까지 못들은 채 하며 따르지 않는 아들의 관계가 세상에 흔하고 널린 그렇고 그런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들의 마음이 꼭 그러하지만은 않단 걸 알지라도, 이들의 관계가 꼭 건강하다고도 할 수 없단 걸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 건강한 가족만이 있을까.
둘의 여정을 뒤따르며 영화는 가까운 두 사람이 적절한 거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마주한다. 기실 둘은 서로에게 그리 좋은 아버지고 아들인 것 같지만은 않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게으르고 무능하여 제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도 좀처럼 제 곁을 내주지 않고 마음도 몰라주는 철없는 자식이다. 그렇다고 아버지라고 마냥 좋은 어른이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아들 입장에서 아버지는 늘 자신을 못마땅해 하고 알게 모르게 미운 시선을 보내오는 꼰대인 것이다. 그간엔 제게 별 신경도 쓰지 않다가 취업이 좀 늦어진다고 무시하고 닦달하는 인상을 받는 것이 오로지 저만의 오해는 아니리란 게 아들의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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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왕봉 스틸컷 |
| ⓒ NR1IFF |
김재우 감독의 16분짜리 단편영화는 지리산 자락 청량하고 풍광 좋은 숲 가운데서 결코 여유롭지 못한 부자의 산행기를 뒤따른다. 산장 예약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온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가 답답하고 고집스럽게만 느껴지는 아들, 일출을 꼭 보아야 한다는 아버지와 그런 것마저 제멋대로 정하고 자기를 힘들게만 하는 아들의 상황이 거듭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물놀이를 하자고 해도, 가벼운 대화마저도 협조하지 않고 싫은 기색을 팍팍 내는 아들이 못마땅하다. 심지어 둘 사이 완충지대 없는 문제에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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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포국도1호선독립영화제 포스터 |
| ⓒ NR1IFF |
영화는 두 사람이 좀처럼 서로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다 마침내 서로를 상하게 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한 편으로 이들이 다시 서로를 챙기고 보듬어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분쟁이 서로의 관계를 전보다 낫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회복되기만 한다면.
<천왕봉>은 한국의 대표적 명산인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로드무비다. 지리산 자락에서 촬영한 듯 하지만 충분히 고지까지는 오르지 못한 모양으로, 그 산자락의 풍광을 제대로 담지 못한 부분이 아쉽다. 지리산과 같은 명산을 영화 가운데 제대로 담아낸 작품이 얼마 떠오르지 않는단 사실은 한국영화가 가진 자산을 충실히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상기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왕봉>의 시도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산과 산행을 영화 가운데 전면적으로 포용한 작품이 그리 많지만은 않은 때문이다.
천왕봉 코앞까지 가서 일출을 보지 못하고 내려오는 일은 그대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때로는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용기이기 때문이다. 20년 전 나는 그러지 못하여서 우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정상에 이르렀다. 고단한 산행 끝, 추위가 몰려오는 정상에서, 구름에 가려 일출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그는 그대로 의미 깊은 산행이었으나 만약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를 배려했더라도 실패라고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이 영화 <천왕봉>이 이야기한다. 그러고보면 무엇을 성공이고, 다른 무엇을 실패라 하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은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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