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철의 시시각각] 그는 왕이로소이다

루이 14세는 프랑스 절대왕정의 정점을 찍은 황제다. 섭정을 포함해 72년의 재위 기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등 여러 전쟁을 일으키고, 호화로운 베르사유 궁전을 지어 위세를 과시했다. 높은 관세로 수입을 막는 한편, 수출을 장려하고 보조금을 뿌려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등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폈다. 나라 안팎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태양왕이라고 불렸다. 후세 사가는 그가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을 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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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공화의 가치 수시로 무시
중상주의 약탈 닮은 관세 압박
비극적 역사 되풀이 우려 커져
」
요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그에 못지않다. 지난 2월 트럼프는 뉴욕의 혼잡통행료 승인을 취소한 뒤 SNS에 ‘국왕 폐하 만세(Long Live The King)’라는 문장을 남겼다. 백악관은 SNS에 맨해튼을 배경으로 왕관을 쓴 트럼프의 이미지를 올렸다. 이때만 해도 대통령 취임의 여운을 즐기는 ‘기행(奇行)’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왕 놀이’를 넘어 진짜 황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는 취임 후 줄곧 인권, 다양성 존중, 자신의 발언에 대한 책임 같은 워싱턴 정가의 관행을 깡그리 무시해 왔다. 위대한 미국 재건을 명분으로 세웠고 애꿎은 이민자가 희생양이 됐다. 저항하는 대학과 도시에 세금 압박과 군대 투입도 서슴지 않았다. 법률로 안 되면 행정명령을 남발했다. 이러다 보니 도대체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 불가다.
남의 나라 얘기로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이 힘센 나라 대통령은 외교와 무역에서도 같은 행태를 보인다. 갑자기 관세를 부과하고, 관세율은 자기 마음대로 정한다. 미국에 투자하면 세율도 깎아주겠다며 흥정도 벌인다. 다른 나라 정상과 전화를 하다 기분이 나쁘다며 고율의 관세를 때리기도 하고(스위스·인도), 정상회담 도중 상대(우크라이나·남아공)에게 면박을 주기도 한다. 주변국 조공을 받는 중국 황제를 보는 듯하다.
문제는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모범국가였던 미국의 시민들이 스스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정치적 퇴행을 대하는 태도다. 초기에 일부 주 정부가 위법한 행정명령을 중지시켜 달라며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법원에서 몇 차례 패소한 뒤로는 잠잠하다. 심지어 공직을 이용해 대놓고 사익을 챙겨도 반응이 없다. 트럼프는 카타르로부터 4억 달러짜리 전용기를 날름 받아 챙기고, 회원제 사교 클럽을 만들어 회원권을 50만 달러씩 받고 팔았다. 가족 소유의 가상화폐 플랫폼을 설립해 투자를 받았다. 지난 5월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일가가 암호화폐 발행만으로 3억2000만 달러의 수수료를 챙겼다고 보도했다. 과거 같으면 청문회로 밤을 지새우고 탄핵도 시도했을 사안인데 모두가 침묵한다. 이대로라면 위헌 소지가 있는 3선 도전을 선언해도 그러려니 할 것 같다. 그다음은 뭘까?
사실 트럼프의 관세와 투자 압박은 다른 나라야 어떻게 되든 미국인만을 위해 돈과 일자리를 넘기라는 것이다. 이 ‘저강도 약탈’은 17~18세기 중상주의와 닮았다. 지금은 모든 나라가 당장의 산업적 피해를 고려해 눈치를 살피지만, 언제까지 굴욕을 견딜 수 있을까. 특히 이런 힘의 논리가 용인되기 시작하면 나라마다 상대적으로 더 약한 국가를 상대로 똑같은 약탈적 질서를 강요하는 상황으로 번질 위험도 있다.
역사적으로 절대 왕정은 혁명을 불렀고, 많은 피를 흘린 뒤 민주·공화정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중상주의는 제국주의로 나아갔고, 그 끝은 전쟁이었다. 참혹한 희생을 치른 뒤에야 인류는 국제연합(UN)과 세계무역기구(WTO)라는 정치와 경제 질서에 합의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 질서를 떠받쳐온 미국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하나씩 무너뜨리고 있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거기에 ‘처음엔 비극으로, 다음엔 희극으로’라고 덧붙였다(『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300년을 거슬러 과거를 되풀이하려는 역사는 과연 희극으로 끝날까.
최현철 사회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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