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운명의 주인 되려는 여성들의 투쟁... '왕좌의 게임'이 특별한 이유
[김성호 평론가]
뒤웅박이란 물건이 있다. 바가지와 마찬가지로, 유리나 사기는 물론 토기도 귀했던 지난 시대 여염집에서 박 속을 파내 무엇을 담거나 보관하는 용도로 쓰던 물건을 가리킨다. 박을 반으로 쪼개어 밖에서 내용물이 한눈에 보이는 바가지와 달리, 박 꼭지 부분만 뚫어 입구가 좁게 만든 것이 특징적이다. 자연히 바가지처럼 퍼내고 바로 내버리는 용도가 아닌, 무엇을 시간을 두고 보관할 때 뒤웅박을 쓰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뒤웅박은 보관용기다. 물건을, 그중에서도 음식에 쓸 재료를 담아 보관하는 친환경 용기로 쓰임이 있었다. 보관용기란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흙을 구워 만든 같은 항아리라도 장을 넣으면 장독이 되고 김치를 담으면 김치항아리가 된다. 물이나 술을 담는 항아리가 있고 유골을 담아 보관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누가 어디서 무엇을 위해 쓰느냐에 따라 항아리의 운명은 전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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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좌의 게임 스틸컷 |
| ⓒ HBO |
어디에 시집가느냐가 운명을 좌우한다. 그것이 지난 시대 대다수 여성의 삶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조선을 예로 들어 보자. 세상에 나서 일생을 살고도 그 영향력을 발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집 대문 안인 것이 여성의 삶이었다. 왕의 아내, 왕비가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비공식적으로야 외척 등 정치세력과 결탁해 힘을 발한 사례가 있었다지만, 조선은 왕비가 여성이란 이유로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고 왕궁 내의 일을 관장하는 내명부의 일만을 맡아 보도록 했다.
하물며 평범한 여성의 삶이야. 여성은 과거시험을 치를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고, 관료가 될 수도 없었다. 오로지 부수적 역할을 수행하는 의녀와 궁녀로서의 삶만이 공적 영역에 들 수 있는 제한적 가능성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 없다보니, 남는 것은 짝뿐이다. 누구를 신랑으로 하느냐, 그보다 어느 집에 시집 가 그 일원이 되느냐가 여성의 팔자, 곧 인생을 좌우했다. 박은 박이로되 같은 박이 아니로다. 여자 팔자가 뒤웅박 팔자란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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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좌의 게임 스틸컷 |
| ⓒ HBO |
<왕좌의 게임> 시즌4는 모두 8개 시즌이 나온 시리즈의 정점에 있다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원작자 조지 R. R. 마틴의 소설 중 3부 격인 '검의 폭풍(A Storm of Swords)'을 중심으로 살을 붙였는데, 그중 핵심을 이루는 것이 칠왕국 수도 킹스랜딩에서 벌어지는 혼돈이 되겠다. 선친의 죽음 뒤 왕위에 오른 어린 국왕 조프리 바라테온(잭 글리슨 분)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폭정을 펼치다 독살되고, 칠왕국이란 배가 또 다시 풍랑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시즌 가운데 유달리 눈에 밟히는 건 역시 산사 스타크(소피 터너 분)가 되겠다. 칠왕국 중 최북방 넓은 땅의 영주 네드 스타크의 맏딸로 곱게 자란 그녀가 수관으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킹스랜딩으로 온 뒤론 완전히 달라진다. 믿을 구석이 돼주었던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처형된 게 그 시작으로, 산사는 반대세력인 라니스터 가문의 볼모가 되어 킹스랜딩에 붙잡힌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오랜 시간 그녀의 바람은 선친끼리 약속한 왕자이자 차기 국왕 조프리의 아내가 되는 것이었는데, 그가 제 아버지를 처형하는 원수가 되리라고 누가 짐작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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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좌의 게임 스틸컷 |
| ⓒ HBO |
드라마는 산사를 비롯한 여성들이 수도에서 살아남는 모습을 비춘다. 산사와 같이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의 딸조차 결혼의 상대자가 아니면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가문의 후광 없이는 무엇도 될 수 없고 할 수도 없는 여자인 때문이다. <왕좌의 게임> 세계관 아래 등장하는 대부분의 직업을 여자들은 맡아 해낼 수가 업다. 관료도 될 수 없고 전문가로 기술을 배울 수도 없다. 오로지 귀부인과 창녀 뿐, 다른 어떤 가능성이 여성들에게 허용되는가.
그 속에서 여성들의 선택은 결혼에 집중될 밖에 없다. 더 나은 가문, 더 나은 남자와 결혼해 제 상황을 낫게 하는 것, 그럴 수 없다면 산사가 그러하듯 끝없이 고통 받게 되고 만다. 그녀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녀와 맺어진 남자의 문제 때문에.
<왕좌의 게임> 시리즈는 산사를 비롯한 여성 캐릭터들을 매우 인상적으로 활용한다. 유럽 중세시대를 모티브로 삼아 창조한 세계관 가운데서, 여성의 역할이란 앞서 언급한 조선시대 여성상과 얼마 다르지 않음에도 드라마는 그녀들의 삶과 선택에 집중한다. 실제로도 그러했듯 여성과 남성의 삶은 철저히 구분돼 건너가기 어려운데, 드라마는 도리어 그를 재료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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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좌의 게임 포스터 |
| ⓒ HBO |
철저하게 혈통과 계급에 따라 작동하는 사회상 가운데서도 남녀의 구분은 확연하다. 왕위며 작위가 세습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여성은 적장자라도 계승 서열에서 남성에게 밀린다. 오로지 아들이 없는 경우에만 가문과 작위를 승계할 수 있다. 반란으로 칠왕국 왕좌를 잃고 간신히 살아남은 타르가르옌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는 대너리스(에밀리아 클라크 분)인데, 그녀는 가문 내 단 한 명의 사내만 있어도 계승서열에서 밀릴 수 있는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다. 오로지 여자인 때문이다.
<왕좌의 게임> 시리즈는 그대로 여성이 스스로에 대한 억압에 저항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첫 시즌에서 남자는 활을 잡고 여자는 자수를 놓던 그 구분으로부터 벗어나 여성이 칼을 쥐고 영주가 되기까지의 여정으로 나아간다. 그 가운데 여자의 몸으론 허용되지 않는다 여겨져온 기사가 되는 이가 있고, 암살자가 되어 가문의 복수를 하는 이도 있으며, 가문 가운데 처음으로 왕위에 오르는 이도 있다. 하나하나가 당대 여성은 해낼 수 없으리란 편견에 반하는 일이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로, 모든 것이 남자에게 달렸다는 자조에 맞서는 일이다.
시즌4는 그중에서도 여성에 대한 억압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시즌이다. 가문 가운데 가장 영리한 이도, 태어나 평생에 걸쳐 동경한 꿈이 있는 이도, 그저 소박한 기대만 품었던 이도, 오로지 여자라는 이유로 당해내기 어려운 고난과 마주한다.
중세 봉건시대를 바탕으로 창조한 <왕좌의 게임> 속 세계관이 오늘의 여성들이 마주한 현실과는 천양지차일 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주목한 불평등과 억압의 지점이 소구력을 발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건 여전히 이 시대에 해소되지 않은 차별이, 편견이, 억눌리는 욕구와 자연스런 열망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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