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장 김원봉과 친일경찰 노덕술, 해방 후 뒤바뀐 운명
[김성수 기자]
1945년 8월 15일 광복. 35년간의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새로운 나라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일어난 일은 많은 이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일제강점기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은 '빨갱이'로 몰려 탄압받았고, 일제에 충성하며 같은 민족을 고문했던 이들은 '반공의 투사'로 떠받들어졌다.
김원봉(1898-1958)과 노덕술(1899-1968). 한 살 차이로 태어난 이 두 사람의 인생여정은 해방 후 한국현대사의 뒤틀린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무장투쟁의 최전선에 섰다.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한 그는 일제강점기 내내 폭탄투척, 요인암살, 관공서 파괴 등 무력투쟁을 통해 일제에 맞섰다. 일제는 그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고, 그를 체포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끝내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의열단의 활동은 일제를 공포에 떨게 했다. 1920년 부산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을 비롯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을 겨냥한 일련의 테러는 일제의 식민통치 기반을 뿌리부터 흔들었다. 김원봉은 단순한 무력투쟁가가 아니었다. 중국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등 체계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의 부인 박차정(1910-1944)도 여성독립운동가로 활약하다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김원봉 자신도 일제강점기 내내 조국 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진정한 독립운동가였다.
같은 시기 노덕술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근무한 그는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일에 앞장섰다. 특히 그의 고문기술은 악명이 높아 일본 고문관들조차 "치를 떨었다"고 할 정도였다.
노덕술은 자신과 같은 조선인들을 상대로 온갖 잔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전기고문, 물고문, 손톱 밑에 대나무를 박는 고문 등 그의 손을 거쳐 간 독립운동가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는 일제에 충성함으로써 자신의 안위와 출세를 도모했던 전형적인 친일파였다.
해방 후 뒤바뀐 운명
그런데 1945년 해방 후 두 사람의 운명은 기가 막히게 뒤바뀌었다. 김원봉은 해방 후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을 선택했다. 조국에서 새로운 나라 건설에 참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그를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친일파 출신의 관료들과 경찰들이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며 탄압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1948년 발생했다. 김원봉이 서울에 있을 때 노덕술이 그를 체포해 끌고 간 것이다. 일제강점기 내내 일제도 잡지 못했던 의열단장이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경찰의 손에 붙잡힌 것이다. 이때 노덕술에게 뺨을 맞으며 모욕을 당한 김원봉이 대성통곡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김원봉은 결국 1948년 월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게 탄압받는 현실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노덕술은 해방 후 화려하게 변신했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행적을 감추기 위해 그는 누구보다 '반공'을 외쳤다. 이승만 정권은 이런 친일파들을 적극 기용했다. 당장 행정경험이 있는 인력이 필요하다는 현실적 이유였지만, 이는 대한민국 건국의 원죄가 되었다.
노덕술은 해방 후에도 경찰 간부로 계속 근무하며 좌익인사들과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되어 친일파 청산 작업이 시도되었지만, 이승만(1875-1965) 정권은 이를 강제 해산시켰다.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덮기 위해 더욱 극렬하게 '반공'을 외쳤고, 이는 해방 후 한국사회의 이념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결국 노덕술은 반공유공자로 국가훈장을 3개나 받았다. 일제강점기 동족을 고문했던 '인간백정'이 대한민국에서는 '국가유공자'가 된 것이다.
월북한 김원봉의 운명도 비극적이었다. 북한에서 그는 전쟁과 무관한 부문인 국가건설부 부부장, 노동성 부상 등을 역임했다. 하지만 김일성과는 다른 독립운동 계열이었던 그는 결국 1958년 '반당종파분자'로 숙청당했다.
김원봉은 남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북에서는 '반동분자'로 몰려 결국 어느 쪽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말로치고는 너무나 처참했다.
현재도 계속되는 비극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김원봉은 아직도 공식적인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반면 노덕술뿐만 아니라 백선엽(1920-2020) 같은 만주군 출신 친일파들이 받은 훈장들의 문제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2019년에야 정부는 노덕술의 서훈을 취소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발표했지만, 여전히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그들의 후손들이 여전히 한국사회의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가난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김구(1876-1949), 여운형(1886-1947) 등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해방 후 암살당하는 등 비슷한 비극을 겪었다.
김원봉과 노덕술의 엇갈린 인생은 해방 후 한국현대사의 뒤틀린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대한민국 건국 과정의 가장 큰 오점 중 하나다.
프랑스, 헝가리, 폴란드 등 유럽 각국은 나치 부역자들을 철저히 처단했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적 필요라는 명분으로 친일파들을 기용했고, 그 결과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다.
진정한 광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킨 이들이 제대로 예우받고, 친일파들의 행적이 정확히 청산될 때 비로소 온전한 해방이 될 것이다.
김원봉 선생의 명예회복과 친일파 청산은 단순한 과거사 정리가 아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며,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역사의 과제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년에 181명, 여성의 죽음은 왜 국무회의에서 다뤄지지 않는가
- '집사' 김예성 구속, 특검은 왜 여기를 '때렸나'
- 트럼프-푸틴 회담 '빈손' 종료에도 "푸틴이 확실히 이겼다", 왜?
- 일본의 독도 집착...강제윤 시인이 섬에 주목한 이유는?
- 잠깐 몇 걸음 오를 뿐인데... 강북지역 최고의 경치를 보다
- 중장년 재취업의 오해, '지인 찬스'는 쉽게 통하지 않는다
- 오토바이 소음도 음악이 되는 악기, 여기서 만났습니다
- 3만원 받고 '김건희·윤석열 소송' 나홀로 준비 "역사에 남겨야 하니까"
- 이춘석, 경찰 조사서 '주식 차명거래' 혐의 인정
- '취임 72일 만의 임명장' 이 대통령 "국민 행복한 나라 향해 직진"